사무엘상 2:1-11
우리는 지난 시간에 사무엘상 1장을 살펴보았습니다. 그 내용은 한나가 자녀인 사무엘을 낳게 되는 과정이었습니다. 한나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열심히 기도했고, 또 보통사람이 할 수 없는 자식을 하나님께 드리는 일을 했지만, 본문에서 드러난 한나의 동기는 자녀가 없는 것에 대한 불만과 시기 때문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또 한나가 그런 식으로 하나님께 자녀를 구했던 태도는 이스라엘이 이방 나라들의 왕과 세력을 부러워하고 시기했던 것을 암시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사무엘서 1장은 한나 개인의 모습인 동시에 하나님 앞에서의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자신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다른 것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확보하고, 확고하게 하려는 인간의 욕망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미 계시는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신들의 왕을 세우려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오늘 본문은 한나의 기도라고 본문이 말하는데 찬양이기도 합니다. 한나가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 베푸심을 경험하고 하나님을 찬양한 내용입니다. 그것을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1절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을 자신을 괴롭힌 원수들에게 자랑하는 모습을 그립니다. 2절은 한나의 기도에서 주제에 해당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주님 같은 분이 없고, 의지할 만한 유일한 반석이 되신다는 고백입니다. 이어서 3절은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의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인데 아마도 브닌나가 자식을 먼저 낳았다고 마음고생을 시킨 것을 생각하면서 한나가 고백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4절부터는 2절의 주제 아래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가를 계속해서 말합니다. 용사가 힘을 잃게 되는 일과 넘어진 자가 힘을 얻게 되는 일, 많이 가졌던 자가 이제는 양식을 위해 품을 팔아야 하고 주렸던 자는 배부르게 되는 일, 불임이었던 여자가 일곱을 낳게 되고 반대로 자식을 많이 나았던 여자가 이제는 건강을 잃게 되는 등 이렇게 처지가 뒤바뀌는 여러 경우를 말합니다.
6, 7, 8절은 앞의 4절과 5절이 왜 일어나는지를 말하는데 그것은 바로 여호와의 주권이라고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9절 10절은 거룩한 자들, 즉 하나님의 편에 선 자들과 악인들을 비교하는데, 여호와께서 거룩한 자들은 발을 지키시고, 악인들은 흑암 중에서 무력하게 하신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덧붙이기는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는 하늘에서 천둥으로 치신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거룩한 자들과 여호화를 대적하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대우가 극명하게 대조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살펴보십시오. 여호와께서 거룩한 자들의 무엇을 지키신다고 했습니까? 발입니다. 그러면 여호와께 대적하는 자들은 무엇으로 치신다고 합니까? 우레, 천둥입니다. 천둥이 치면 어느 부위에 가장 큰 충격과 위험을 겪게 됩니까? 하늘에 가까운 쪽인 머리입니다. 즉 여호와께 대적하는 자들은 가장 중요한 머리에서부터 위협하시며, 거룩한 자들은 가장 하찮게 여겨지는 발까지, 또 그 여정을 인도하신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을 이렇게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면 여호와께서 우리의 처지를 바꾸시는 하나님이시고 상황을 역전시키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믿고 의지하면 그런 전화위복의 기회를 주신다는 것이 주제일까요? 부자가 되고, 아이를 낳게 되고, 힘과 권력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까? 그런 생각이 본문에 대한 이해와 적용에서 나오기 쉽습니다. 높은 것이 낮아지고, 낮은 것이 높아지도록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힘과 돈을 가진 자들의 것을 가져가시고, 약하고 가난한 자들에게 그것을 나누어주시는 하나님을 기대하게 됩니다. 또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언제든지 자신의 주권대로 뒤집으실 수 있기 때문에 지금 힘과 부를 가졌다고 자만하지 않아야겠다는 자세를 가질 수 있습니다. 본능적으로 그런 주의를 하려는 것은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면 이미 가진 자든지, 없다가 있게 된 사람도 언젠가는 뒤집으실 하나님 때문에 불안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붙드는 것은 우상을 의지하는 것과 같습니다. 자신의 소유, 상황을 우위에 두고 신적 존재가 그것에 좋은 영향을 미치기를, 악한 영향은 막아주기를 바라며 전전긍긍하는 것입니다. 한나의 고백, 성경에 나오는 높은 것이 낮아지고 낮은 것이 높아지게 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고백은 그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그러한 것처럼 현실에 대한 불만, 가진 자들에 대한 불만을 가지고 악의적으로 체제를 전복시키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빈부귀천 때문에 하나님에 대해 벌벌 떠는 것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때로 그런 것을 사용하셔서 자신의 주권을 드러내시지만 그런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람이 흥하고 망하는 것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빈부귀천은 영원한 것이 아니고, 변하는 것이기 때문에 진정 영원하고 견고한 것은 하나님 자신임을 알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2절을 살펴야 합니다. 2절이 주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주님 같은 분이 없고, 의지할 만한 유일한 반석이 되신다는 고백입니다. 신앙을 가지면 역전을 시키시는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이 세상에서 우리가 잘되고, 높아지고, 힘을 얻게 되는 일의 혜택이 반드시 있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신앙이 있는가 여부와 항상 관계된 것은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의 주권으로 높아짐과 낮아짐, 뒤 바뀌는 일들이 있지만 왜, 누구를, 어떻게 하는지 그 이유를 우리가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일반은총의 차원에서 그 사람을 사용하시기 위해서 일수도 있고, 구원하실 자를 낮추시는 과정에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을 높이시기도 하지만 가난하게, 낮은 위치에 계속 두실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분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상으로 가시고, 매달리는 모습을 생각해보십시오. 가장 거룩하신 이를 하나님이 어떻게 다루셨는지 보십시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우리에게 보이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모든 조건과 상황이 어찌 되던 불변하시는, 견고한 반석이신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 속에서, 인생 중에서 일어나는 모든 변화와 불안, 서로의 상황이 바뀌는 일들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하기 위한 흔들림입니다. 진짜 역전, 뒤집힘은 여기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정말 중요한 역전, 갈림은 9절과 10절이 말합니다. 악인들을 흑암 가운데서 입을 다물게 하시는 심판 때를 말합니다. 4절에서 8절까지는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엎치락뒤치락하는 일들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말하지만 그 엎치락뒤치락 하는 와중에서 항상 신자에게 혜택이 보장된다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진짜 중요한 역전, 뒤집힘은 마지막에 일어납니다. 형통한 악인과 고통 받는 자녀의 진짜 역전은 그 때 일어납니다. 거룩한 자들은 발을 지키시고, 기름을 부으시고 악인, 대적하는 자는 머리를 치시고, 흑암 가운데 갇히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높은 것이 낮아지고, 낮은 것이 높아지는 것을 바랄 때 자신의 유익을 위해 자신의 형편이 개선되기 위해 그러는 것인지 정말 하나님이 그런 주권자이심을 고백하는 것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나아가 이 찬양은 한나의 경험을 바탕으로 고백되어졌지만 한나의 경험을 뛰어넘습니다. 1장이 한나의 경험과 고백인 동시에 이스라엘의 상태를 말하고 있는 것처럼 2장 역시 한나의 고백인 동시에 이스라엘이 겪게 될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10절에 이스라엘 왕 사울과 다윗에 대한 이야기를 숨겨 두신 것입니다. 사울은 자신을 왕으로 세우신 하나님은 인정했지만, 자기의 왕위를 도로 찾으시고 낮추시는 하나님은 인정하지 못했습니다. 한나는 찬양하는 순간에는 그것을 몰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대로 그녀의 고백이 사실로 드러난 것처럼 우리의 경험을 뛰어넘어서도 그 고백은 사실이고, 하나님은 진실로 그러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이 땅에 사는 동안은 사람의 처지는 언제든 바뀔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십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 나라는 견고합니다.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상황과 조건에 따라 마음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반석이신 하나님 자신만을 의지하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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