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이용하기 위한 믿음이 아닌 존중하기 위한 믿음 (사무엘상 4:1-22)

따뜻한 진리 2020. 5. 31. 17:38

사무엘상 4:1-22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1절을 보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무엘의 말이 온 이스라엘에 전파되었다고 말합니다. 즉 사무엘의 권위와 영향력이 이스라엘에 점차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2절부터 나오는 전쟁 이야기를 보면 여전히 엘리 가문이 주도적인 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과 싸운 블레셋은 사사시대에 출현한 강력한 민족인데 원래 해양 생활을 하던 세력입니다. 이들은 금속을 다루는 기술이 뛰어났고, 강력한 군사력을 소유해서 이스라엘을 위협했습니다. 본문의 첫 전투에서 이스라엘은 블레셋에게 져서 약 사천 명 정도가 죽게 됩니다. 이스라엘 장로들이 이 결과를 보고 뭐라고 말했습니까? ‘여호와께서 어째서 블레셋 사람들한테 우리가 패배하게 하셨는가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우리에게 어떤 잘못이 있어서 하나님께서 전쟁을 지게 하셨는가보다라는 반성의 뜻이 아닙니다. 원망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자기들 마음대로 여호와의 언약궤를 전쟁에 사용하기로 합니다.

 

    언약궤는 나무로 상자를 만들어서 안과 밖에 금으로 장식을 한 것입니다. 그 안에는 아론의 싹 난 지팡이, 만나가 들어있는 항아리, 십계명 돌판이 들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고, 하나님과 백성의 만남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본문에서 이 언약궤를 전쟁터로 옮길 때 누가 수행합니까? 홉니와 비느하스입니다. 언약궤를 제멋대로 전쟁에 이용하긴 하지만 신성한 것이니 종교적 지도자가 옆에서 수행한 것입니다. 평소에 진정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에는 충실하지 않고 위기 속에서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는 일에는 나선 것입니다.

 

    언약궤가 진영에 들어오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대에 차서 흥분하고 소리를 지릅니다. 블레셋은 그 소리를 듣고 두려움을 느끼면서 각오를 단단히 하고 싸웁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블레셋이 이겼습니다. 언약궤를 동원한 전투에서 이스라엘 희생자가 삼 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고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 현장에 있던 어떤 베냐민 사람이 도망쳐 나와 성소가 있는 실로까지 왔습니다. 엘리는 의자에 앉아서 하나님의 언약궤가 움직인 것 때문에 노심초사, 안절부절 못하면서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도망쳐 온 사람이 울부짖으면서 엘리가 있는 곳까지 왔을 때 엘리가 그 일어난 일을 듣고는 자기 의자 뒤로 넘어져서 목이 부러져서 죽었습니다. 그렇게 죽은 이유는 그가 나이가 많고 몸이 비대했기 때문이라고 본문이 말합니다. 나이가 많아 눈이 어두우니 의자를 보지 못했고, 앞의 2:29이 말하는 대로 아들들이 가져다 준 불법한 고기를 먹고 몸이 비대해져서 그런 사고를 당한 것입니다. 이렇게 엘리 가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순식간에 일어났습니다.

 

    엘리 가문의 몰락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마침 엘리의 며느리, 비느하스의 아내가 출산 막바지였는데 시아버지와 남편이 죽은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 조산을 하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아들을 낳다가 죽게 됩니다. 죽어갈 때에 출산을 돕던 사람들이 위로하고자 아들을 낳았다고 말했지만 그 여인은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고 말하며 자기가 나은 아들의 이름을 이가봇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여인은 죽어가는 중에도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고 말한 이유를 설명하는데, 그의 시아버지와 남편이 죽었고, 또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엘리의 며느리가 말한 내용은 엘리 부자가 보여준 모습과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나타나는 이스라엘의 태도에 비하면 그나마 하나님께 근접한, 본질에 관심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스라엘의 현재 모습을 통하여서는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지 않는 것, 그것에 관심이 있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합니다.

 

    그러나 언약궤를 빼앗기지 않고 승리했다면, 또 엘리와 그 아들들이 죽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영광이 머물러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의 영광이 그들을 통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이 관심사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이 안중에도 없는 사람들을 통해서도 영광을 드러내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드러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일반적으로 자신의 뜻을 바르게 나타내시기 위해 하나님을 중심에 둔 사람, 순종하는 종들을 통해 영광을 나타내십니다.

 

    그러므로 구약에서 자기 영광을 이스라엘을 통해 나타내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바뀐 것이 아닙니다. 엘리의 며느리가 한 말대로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바르게 나타내시려고 그런 일을 행하신 것입니다. 엘리 가문이 그 일을 못하니까 바꾸시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대하지도 않고 멸시하는, 엘리 가문과 이스라엘을 깨닫게 하시려고 그런 일을 행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바로 잡아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온전히 보이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의 며느리는 그런 하나님의 일하심을 알지 못했습니다. 자기 가문이 종교적 권위를 유지하고, 그것을 통해 이스라엘이 잘되고 자신들도 이익과 혜택과 지위를 누리면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고, 영광이 나타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사라지기 때문에 자기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사라졌다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중요하다고 여기지만 우리를 중심에 두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것은 아닐까요? 기복주의자들처럼 우리가 잘 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요? 우리가 잘 안 되는 것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영광을 취하실 수 있습니다. 엘리가문과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제대로 몰랐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임재, 능력 드러내심을 언약궤라는 대상에 묶어서 활용하려고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신앙이 아닙니다. 그러면 그게 무엇입니까?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하나님을 향하고 있다고 해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다고 해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내용이 우리의 기억과 이해 속에 있어도 하나님을 도구로 사용하려고 할 때 그것은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고 포장은 하지만 자신의 이익을 위해 하나님의 능력을 끌어오려고 하는 것은 우상숭배입니다. 물질적이든, 심리적이든 자신이 주체가 되어서 신적인 능력을 끌어오려고 하는 것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기복주의 자들이 진지하게 바른신앙을 추구하는 자들을 조롱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지나치게 하나님을 경외하고 존중하기만 하고 하나님이 주시려는 것을 받아 누리지 못한다고 말입니다. 자식에게 좋은 것을 주시려고 하는 아버지를 이웃집 아저씨처럼 대한다고 비웃습니다. 정말 그럴까요? 물론 하나님을 존중하고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며 추구하는 것은 메마름과 빈곤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럴 위험보다는 하나님을 도구 삼고, 우상화 하고, 자기 욕망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으로 포장하는 위험이 훨씬 더 큽니다. 또 그것을 성경이 더 빈번하게 깊이 지적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엘리 가문이 그랬습니다. 이스라엘이 그랬습니다. 그것이 타락한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십계명 중 1계명에서 3계명은 그것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을 믿고 따르고 있다는 백성들에게 그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그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상숭배는 하나님 이외의 다른 신들을 찾을 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을 찾는 것일지라도 하나님을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필요대로 하나님을 도구화하는 것은 우상숭배입니다.

 

    그런 식으로, 우상을 다루듯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할 때 겪게 되는 결과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시편 97:7 조각한 신상을 섬기며 허무한 것으로 자랑하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이사야 42:17 조각한 우상을 의지하며 부어 만든 우상을 향하여 너희는 우리의 신이라 하는 자는 물리침을 받아 크게 수치를 당하리라

예레미야 10:14 사람마다 어리석고 무식하도다 은장이마다(예레미야 51:17) 자기의 조각한 신상으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하나니 이는 그가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 것이요 그 속에 생기가 없음이라

 

    우상숭배의 결과가 무엇이라고 성경이 일관되게 가르쳐줍니까? 수치를 당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이스라엘이 누구에게 수치를 당했습니까? 블레셋에게 수치를 당했습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비인격으로 여기는 신앙이 만연합니다. 하나님을 도구 삼는 신앙이 대부분입니다. 필요할 때만 찾습니다. 자신의 현실에 도움이 되면 믿습니다. 그런 신앙은 현세에도 부끄러움을 당할 수 있지만, 나중에 가서 참혹한 수치를 당합니다. 예수님께 너를 알지 못한다는 말을 듣는 수치를 당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도구로 여기지 않고 하나님 되게, 인격적으로 대하는 신앙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인격적으로 다루시는 분입니까? 하나님 자신에게 우리가 어떤 도움도 되지 않고, 우리가 오히려 죄인임에도 참으십니다. 지키십니다. 인도하십니다. 기다리십니다. 모든 것을 주셨으면서도 우리에게 무시당하시는 하나님이신데도 우리를 구원하시고, 자녀 삼으셔서 아버지로서 인정받고자 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어떻게 대하시는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진실로 인격적으로 존중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여건과 현실을 위해, 내 마음의 안정을 위해, 주변 상황 해결을 위해 하나님이 도움이 될 것 같아 기독교 신앙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하나님으로서 인정하고 즐거워하는 신앙이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