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5~6장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지난 시간 살핀대로 이스라엘을 상대로 두 번 승리 한 블레셋은 여호와의 언약궤를 가져갔습니다. 그리고 블레셋의 아스돗이라는 지역의 다곤 신전에 언약궤를 가져다 놓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자가 승전기념물을 자기 나라의 중요한 장소에 가져다 놓는 것처럼, 고대근동에서는 정복자가 패자의 신상을 자신의 신전에 갖다 놓는 것이 흔한 관습이었습니다. 아스돗 사람들이 다음 날 일어나 보니까 다곤 신상이 여호와의 궤 앞에 엎드러져 있었습니다. 우연히 그랬겠지 생각하고 일으켜 세워놨는데, 그 다음 날에도 다곤 신상이 넘어져 있었고, 이번에는 머리와 손목까지 끊어져 있었습니다.
그렇게 여호와의 살아계심을 상징하는 언약궤 앞에 블레셋의 우상 다곤이 쓰러지고, 부서지는 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아스돗의 사람들에게도 독한 종기가 생겨나게 하셨습니다. 아스돗 사람들은 여호와의 언약궤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하고, 지도자들을 모아 가드라는 지역으로 언약궤를 옮겨다 놨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가드 사람들이 독한 종기로 고생하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에그론이라는 지역으로 다시 언약궤를 옮겼습니다. 역시나 에그론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치셨는데, 11절에 따르면 온 성읍이 사망의 환난을 당했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독종 때문에 너무 고통스러워서 그 부르짖음이 하늘에 사무쳤다고 말합니다. 지난 시간에 우상숭배는 수치를 가져온다는 것을 성경에서 확인했는데, 이스라엘 뿐 아니라 블레셋도 그 일을 당한 것입니다. 자신들이 섬기는 우상 다곤이 여호와 앞에서 수치를 당하였고, 블레셋 백성들은 심각한 피부병으로 흉측한 고통 가운데 수치를 당한 것입니다.
블레셋은 다시 지도자를 모아서 의논을 했습니다. 언약궤를 원래 있던 곳으로 보내야겠다고 결정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돌려보내야 할지 몰라서 그렇게 일곱 달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결국 그들이 방법을 마련했습니다. 언약궤를 자신들이 건드린 것에 대한 사죄의 의미로 제물을 함께 보내기로 했습니다. 금으로 종기 모양을 다섯 개, 쥐 모양 다섯 개를 만들었습니다. 그것은 6장 5절에 나온대로 자신들을 괴롭게 하는 종기 모양이었고, 그런 전염병을 가져다 준 쥐 모양으로 만든 것 같습니다. 다섯 개로 만든 것은 16-17절에 나오는 대로 블레셋의 다섯 지역에 해당하는 숫자입니다. 이것은 공감주술이라는 것으로써 문제를 일으킨 것을 모방한 인형 같은 것을 다룰 때 그것이 상징하는 실제 문제도 함께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렇게 블레셋이 언약궤와 제물을 준비해서 이제 이스라엘 영토로 보냅니다. 보낼 때 사람이 끌지 않고 소가 끌게 합니다. 그런데 어떤 소입니까? 새끼 송아지를 갓 낳아서 젖이 나오는 암소였습니다(7절). 왜 그렇게 했습니까? 이 암소는 본능적으로 새끼가 있는 곳으로 가려고 할 텐데, 진짜 여호와라는 신이 언약궤를 자신의 성소로 돌려보내려 한다면 이 동물을 통제해서 어떻게든 언약궤를 끌고 가게 할 것이라고 기대한 것입니다. 그것으로 자신들에게 임한 재앙도 여호와가 내린 것임을 확인하려 한 것입니다(3절, 8절). 또 재앙이 내린 곳은 아스돗, 가드, 에그론인데 가사와 아스글론 두 성읍의 왕들까지 총 다섯 명 모두가 궤를 돌려보내는 일에 참여하였습니다(17절). 블레셋 전체가 언약궤 사건을 중대한 일로 인식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언약궤를 돌려보냈던 블레셋은 두려움 가운데 신중하게 일을 진행하면서도 자신들이 겪은 일과 인과관계를 확인하고 싶었고, 만약 연관성이 있다면 여호와라는 신이 어떤 신인지에 대해 알고자 했습니다.
그렇게 준비해서 언약궤를 실은 수레를 암소가 끌게 했습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소가 수레를 끌고 이스라엘 지역까지 갔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갔는지 보십시오. 12절에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소가 울면서 좌우로 치우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짐승이지만 새끼가 얼마나 그리웠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소들을 강하게 붙잡아 끌고 가신 것입니다. 그러니 울면서 끌려 간 것입니다. 울면서 순종한 것입니다.
언약궤가 도착한 곳은 벧세메스인데, 벧세메스는 블레셋의 경계선 바로 건너편의 이스라엘 영토에 있는 성읍입니다. 언약궤가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오자 벧세메스 사람들은 언약궤를 맞이하고 수레를 만든 나무를 잘라내고, 끌고 온 소를 제물로 바쳤습니다. 블레셋 다섯 왕들, 방백들은 언약궤를 따라오다가 벧세메스에 도착한 것과 그곳 사람들이 하는 일을 보고 돌아갑니다. 이제 일이 마무리 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축하하고 기쁜 일만 남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엄청난 일이 일어납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보았다가 칠십 명이 죽었습니다. 너무 놀라고 두려워서 언약궤를 기럇여아림이라는 곳으로 보내버립니다.
앞에서 언약궤를 자신들의 승리를 위한 도구로 사용하려 했던 이스라엘이 큰 희생을 치루고 홉니와 비느하스가 죽었던 것처럼 벧세메스 사람들도 언약궤를 부주의하게 대했습니다. 언약궤를 빼앗길 때와 다시 찾을 때 이스라엘이 가지고 있었던 자세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종교적인 형식은 그럴듯하게 잘 치렀지만 그 이후에는 여전히 그들은 여호와 앞에서 주의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두 가지 사건에서 화를 당합니다.
오히려 블레셋은 여호와 하나님이 자신들을 다루시는 것을 처음 경험해서인지 매우 주의하고, 심사숙고합니다. 그들은 이전 역사에서 여호와께서 애굽을 어떻게 다루셨는지를 기억하며 자신들은 그렇게 되지 말자는 이야기도 했습니다(6:6). 역사를 통해 교훈을 얻을 줄 아는 민족이었습니다. 그러나 블레셋이 하나님을 더 바르게 대했고, 하나님을 존중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대하도록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그렇게 경거망동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들은 하나님을 존중하지 않았습니다. 승리가 필요할 때는 언약궤를 매개로 자신들 마음대로 하나님을 움직이려고 했습니다. 또 벧세메스에서는 언약궤를 맞이할 때 종교적인 의무가 마무리되자 긴장이 풀려서 언약궤를 호기심의 대상으로 여겼습니다. 이는 마치 동물원에서 맹수를 대하는 것과 같습니다. 필요할 때는 자기들 맘대로 통제하고, 다루고, 호기심의 대상으로 여기다가 그 맹수가 한 번 ‘으르렁’ 하면 깜짝 놀라서 아주 저 멀리 도망 가버리는 것입니다. 우상을 대하는 보편적인 자세입니다. 그것에는 인격적인 존재를 대하는 태도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블레셋과 이스라엘 둘 다 벌하셨습니다. 둘 다 하나님을 우상 수준으로 대한 것입니다. 블레셋이라는 이방은 잠깐, 그렇게 하셨다면 이스라엘은 언약궤가 떠날 때와 돌아올 때 그런 일을 하심으로서 자기 백성으로 선택하신 자들에게는 더 엄중하고도 분명한 태도를 요구하신 것입니다.
대다수의 종교는 자신들의 신을 비인격적으로 여깁니다. 그저 대상일 뿐입니다. 도움을 얻기 위한 수단입니다. 조금 인격성을 부여한다 해도, 필요할 때 잘 달래고, 안 좋은 일이 있을 때는 두려워하는 정도입니다. 기독교 신앙이라는 범위 안에서도 그럴 수 있습니다. 인격적인 하나님과 관계를 지속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문제해결과 잘 됨을 위한 능력의 원천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존중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분을 인격적으로 대한다는 것입니다. 인격적으로 대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나에게 실용적이지 않더라도 그 존재 자체를 환영하고, 만족스러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나를 인격적으로 대하지 않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점점 마케팅 기술이 발전되어서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해주는 것처럼 연기하는 곳들이 많아집니다. 우리를 고객으로 대해주는 곳들이 상당수 그렇습니다. 또 지금은 아니더라도 나중에 덕 볼 일이 있을 것 같아서 나를 기억해주고 챙겨주는 그런 사람들도 있습니다. 좀 비참한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런데 현실이 그렇습니다. 이익이 안 되고 도움이 안 되면 금세 태도가 변하는 것이 세상입니다. 사람이 죄인이어서 생긴 대표적인 문제가 그것입니다. 상대를 ‘너’가 아닌 ‘그것’으로 전락시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도 그런 자세를 갖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인격적인 반응을 얻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좋은 것을 주시지만 즉각적인 도움을 주시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도움이 되니까, 문제해결에 유익하니까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여기 계신, 인격적 존재로 여기고 존중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 자체를 너무나 기쁜 일로, 충분한 일로 여기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상대가 도움이 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에도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이 사랑의 기초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나 블레셋이나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멸시했습니다. 우상 대하듯 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무시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우리를 항상 인격적으로 대하시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을 기억합시다. 우리가 죄인으로서 하나님을 전혀 생각하지도 않을 때에, 이미 가장 인격적인 헌신을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신 것을 기억합시다.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신 인격적인 사랑의 원천이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대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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