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누가 우리를 더 잘 지키는가? (사무엘상 7-8장)

따뜻한 진리 2020. 6. 14. 20:58

사무엘상 7-8장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블레셋에 빼앗겼던 언약궤가 이스라엘의 벧세메스에 돌아왔지만 벧세메스 사람들이 언약궤를 함부로 다루고 하나님의 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언약궤는 기럇여아림으로 보내졌고, 그곳에서 이십 년 동안 있게 됩니다. 그 이유는 블레셋이 실로를 공격하면서 성전을 파괴하였기 때문입니다. 언약궤가 돌아갈 곳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종교적인 상징이 파괴되었기 때문에 불안했습니다. 그래서 2절 끝에는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간절히 바랐다는 것이 아니라 도와달라고 울부짖었다는 것입니다.

 

    드디어 이때부터 사무엘이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 역할을 하게 됩니다. 사무엘은 불안 속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찾는 백성들에게 말합니다.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제거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 섬기라 여기서 이스라엘의 문제가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우상과 함께 숭배했습니다.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그리고 빼앗겼던 언약궤가 돌아왔을 때 벧세메스 사람들이 보여준 언약궤를 대하는 태도에서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 사실임이 드러난 것입니다. 또 홉니와 비느하스가 하나님을 경멸했던 이유의 일부가 밝혀진 것입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우상 대하듯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무엘의 말에 따라 이스라엘 자손들은 바알들과 아스다롯을 제거하고 여호와만을 섬겼습니다. 그리고 사무엘은 미스바로 백성들을 모이게 해서 회개하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때를 틈타 블레셋이 또 공격하러 왔습니다. 두려움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이 사무엘에게 하나님의 도움을 구해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러자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블레셋 사람들에게 천둥으로 정신을 못 차리게 하셔서 이스라엘이 승리하게 하셨습니다. 14절을 보면 에그론과 가드까지 영토가 회복되었다고 말합니다. 에그론과 가드가 어디입니까? 그곳은 블레셋이 언약궤를 빼앗아 갔다가 저주를 받았던 지역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땅들을 되찾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사무엘이 다스리는 동안에는 블레셋이 공격을 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키셨습니다.

 

    8장으로 가면 시간이 흘러 사무엘이 늙게 됩니다. 그에게는 두 아들이 있는데 요엘과 아비야입니다. 그런데 역사가 안 좋게 반복되는 일이 발생합니다. 엘리의 두 아들처럼, 사무엘의 두 아들이 사무엘을 닮지 않고 부패한 지도자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모여 사무엘에게 왕을 세워달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늙었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과 같지 않습니다.’ 사무엘이 언제 떠날지 모르니 불안하고, 그 아들들은 신뢰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무엘은 그 문제를 가지고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백성들이 왕을 달라고 하는 것은 너를 버린 것이 아니라 나를 버려서 왕이 되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고, 하나님을 버리는 행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의 요구를 들어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왕이 세워지면 백성들이 어떤 일을 겪게 되는지 사무엘이 가르치게 하십니다. 그들이 원하는 대로 왕이 세워지면 백성들은 자녀들을 군대와 노동력을 제공하는 수단으로 보내야 하고, 자신들이 수고해서 얻은 많은 것들을 무거운 세금으로 권력자들에게 바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때 가서 후회해도 하나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을 것이라고 사무엘이 말했습니다. 다시 한 번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19절에서 백성들이 뭐라고 말합니까? “백성들이 사무엘의 말 듣기를 거절하여 이르되 아니로소이다 우리도 왕이 있어야 하리니 얼마나 무서운 고집입니까! 그래도 자신들이 더 똑똑하다는 교만입니다.

 

    사무엘서에는 인간의 이 질투와 자기고집이 깔려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셔도 아니오, 제 생각이 맞아요.”하는 무서운 인간의 교만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과 그 주권에 순종하지 않고, 다른 것을 요구하는 인간의 욕망이 드러납니다. 사무엘상 1장에서 한나가 남편으로 만족하지 않고 아들이 없는 것을 질투했던 것처럼, 이제는 이스라엘 백성이 다른 나라의 왕을 부러워하며 그것을 하나님께 달라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미 통치자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세우신 사사가 있었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온 이후 이스라엘은 사사들을 통해 하나님의 다스림과 보호를 받았습니다. 사사들이 완전한 사람들은 아니었지만, 이스라엘을 다스리시고 적들로부터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충분히 드러났습니다. 또 오늘 본문에서처럼 자신들이 미스바에 모여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블레셋을 천둥으로 치시고 이기게 하신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좀 지났다고 잊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하고 왕을 구했습니다.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왕의 역할을 충분히 하신다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세우신 대리자들을 통해서 왕의 일을 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중에서도 사무엘은 훌륭한 사사였고, 선지자였습니다. 정말 사무엘이 늙었고, 그의 아들들이 맘에 안 든다면 하나님께 다른 사사를 세워달라고 구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왕을 달라고 합니다. 다른 나라들처럼 왕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돌보심이 부족하다고 여긴 것입니다. 언제 어떤 방법으로 자신들을 도와줄지 모르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은 불안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눈에 보이는 대책을 마련하겠다는 것입니다. 위기를 겪을 때마다 회개하고, 하나님께 매달리는 것이 싫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좋아하는 우상과 이방족속의 유용한 삶의 방식을 계속 고집하면서 가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위험 요소도 없애겠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제외시키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사람이 생각하기에 하나님이 모든 필요를 완벽하게 해결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신다면 왜 결핍과 불안이 남아있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과분한 사랑을 이미 받고 있으면서도 눈에 보이고, 통제할 수 있고, 예상할 수 있고, 세상이 누리고 있는 것이 더 탁월하다는 유혹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있는 것들, 사람이 만든 안전장치가 든든한 것 같지만 그것은 반드시 우리를 속입니다. 그것들이 당장에는 안심을 주는 것 같지만 우리를 이용하는 것이 더 큽니다. 왜냐하면 죄인이 만든 것은 반드시 죄의 속성을 띠고 사람을 속이고, 그것이 우리를 종으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 학벌, , 인기와 존경, 권력, 보험, 국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들이 자아 만족과 미래의 안심을 위해 의존하는 것들을 보십시오. 그것들이 어려울 때에 큰 도움이 되는 일이 있기는 하지만, 훨씬 더 많은 것들을 가져갑니다. 왕이 백성을 지켜줄 것 같지만 사실은 자신의 권력을 위해서 백성을 이용할 뿐입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하나님 이외의 것은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다는 것을 분명히 알려주었습니다. 우리가 그토록 열망하던 것, 이것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한 그것이 우리의 삶을 허무한 것에 낭비하게 하고, 종으로 살게 합니다. 그래서 반드시 후회하는 시간이 옵니다. 그런데 인간이 어리석은 것은, 후회를 통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와야 하는데 그러지 않습니다. 그 후회의 단계에서 또 다른 것을 모색합니다. 새롭게 등장하는, 이전에 없던 새 것에 또 속아서 삶을 낭비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압니다. 현실의 위험은 사람이 만든 것, 세상이 주는 도구들로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또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하나님이 나의 인도자가 되신다고 해서, 완벽하게 좋은 일만 일어나는 것은 아님을 압니다. 인생의 불안은 하나님 자신을 끝까지 의지하라고 허락하신 것임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향해 가시면서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옮겨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버리실까봐, 실패하실까봐 불안하셔서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일까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그러나 완전한 사람으로서 현실의 고통을 피할 수는 없던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현실의 어려움, 고난이 있습니다. 아픕니다. 어렵습니다. 괴롭습니다. 외롭습니다. 그런 것들이 언제 찾아올까봐 두렵습니다. 걱정해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어려움을 지나치게 하실 수도 있고, 겪게 하실 수도 있고, 그 어려움으로 우리가 끝나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닙니다. 그 모든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께로 더욱 끌어당기시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그것을 아는 자들입니다. 인생이 고통스럽지만 지나가는 것이며, 하나님이 우리의 왕 되시는 것은 말 그대로 하나님이 왕 되시는 것이지, 이 땅에서 우리가 왕 대접을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완성되지 않은 여기,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우리의 처지가 어떠하든 하나님의 왕 되심을 인정하고 즐거워하는 것으로 신앙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주인 되심, 왕 되심과 우리의 피조물 됨을 인정하는 것이 믿음의 기초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인간보다 우리를 잘 지키는 왕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왕이 되신다는 이 사실이 얼마나 큰 특권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