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9-10장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사무엘로 하여금 사울을 이스라엘의 인간 왕으로 세우시는 내용입니다. 사울은 베냐민 지파였습니다. 베냐민은 야곱의 아내 라헬이 요셉 다음에 낳은 막내아들입니다. 베냐민은 가나안에서 땅을 분배 받을 때 이스라엘 영토의 가운데 있는 곳을 받아 정착했습니다. 그들의 영토는 작았고 유다와 에브라임이라는 강력한 지파들 사이에 끼어 있었습니다. 또 베냐민 지파는 사사시대에 내란으로 인해 거의 전멸할 뻔했습니다. 그래서 21절에서 사울은 “나는 이스라엘 지파의 가장 작은 베냐민 지파 사람”이라는 말을 한 것입니다.
이런 배경을 가지고 있었던 사울은 개인적으로는 매우 인간적인 매력을 많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2절을 보면 이스라엘 중에 사울보다 더 “준수한” 사람이 없다고 말하는 데 이것은 매우 잘 생겼다는 것입니다. 또 키는 아주 커서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만큼 컸다고 합니다. 사울은 아버지 기스의 암나귀들을 찾기 위해 매우 먼 거리를 다니다가 종의 제안으로 선견자를 찾아갑니다. 마침 물 길러 나온 소녀들이 그 선견자가 방금 성읍에 들어왔으니 빨리 따라가면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알려주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시점, 장면이 하루 전의 사무엘에게로 바뀝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내일 한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인데 그 사람을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라고 하셨습니다. 다음 날 사울이 나타났을 때에 그가 바로 어제 말한 그 사람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해주셨을 때에야 사무엘은 알게 됩니다. 사무엘은 특별한 식사 자리에서 화목제를 드린 후에 제사장 몫이 되는 넓적다리를 사울에게 주었고, 사울의 머리에 기름을 부어 특별한 지도자로 세우는 것을 표시합니다. 사울은 예상치 못한 그러한 일들에 당황하면서도 그것이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는 몰랐던 것 같습니다.
사울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사무엘이 예언한대로 이미 다른 이들이 암나귀들을 찾은 것을 알게 되었고, 어떤 사람들에게 떡과 포도주 선물을 받았고, 선지자의 무리를 만났을 때 하나님의 영이 임해서 새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예언을 하게 됩니다.
사무엘이 백성들을 미스바에 소집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베냐민 지파의 사울이 뽑히게 하셨고, 사무엘은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임을 모두에게 확인시킵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사울은 숨어 있었습니다. 사울은 왕으로 세워졌고 백성들은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그 동안 사무엘이 말한 것과 자신이 경험 한 것들이 무엇인지 제대로 몰랐고, 받아들이지도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사울을 이스라엘의 첫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그 과정을 보면 하나님께서 철저하게 개입하신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일하셨다는 것을 본문이 묘사하기 때문입니다. 사무엘과 사울이 만나는 과정이 그렇습니다. 사울의 아버지가 암나귀를 잃어버린 것부터 시작해서 적절한 타이밍에 사람들이 개입합니다. 그래서 사울이 사무엘이 있는 그곳에, 사무엘이 머무는 그 시간에 도착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울이라는 사람이 그렇습니다. 사울의 집은 보잘 것 없는 가문입니다. 또 사울은 아버지의 잃어버린 암나귀를 찾느라 긴 시간을 보낸 사람입니다. 아버지에게 순종하는 좋은 아들이었지만 좀 고지식합니다. 또 당시의 유명한 사무엘을 모를 만큼 세상 일에 둔한 사람입니다. 자신감이 없어서, 자신이 왕으로 세워졌는데도 숨어 있습니다. 이러한 사울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가 있습니다. 11절을 보면 전에 사울을 알던 모든 사람들이 예언을 하는 사울에 대해 “기스의 아들에게 무슨 일이 있어났느냐 사울도 선지자에 속하느냐” 하고 말했다고 하는데 그것이 속담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비웃는 말입니다. 사울이 무슨 사법고시라도 합격했냐 하는 말투입니다. 겉모습은 출중하지만 지도자로서는 배경과 능력이 변변치 못한 사람, 이것이 사울에 대한 인간적인 평가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그런 사람을 세우셨습니까? 사람의 기준에서 훌륭한 왕이 아니라,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할 사람을 세우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는 것을 드러낼 왕을 원하신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사울이 세워질 때 은밀하게 준비하셔서 당사자들이 만나게 하셨습니다. 의도적으로 성경 본문은 13절까지 사울의 종이 사무엘을 언급할 때 “하나님의 사람”, “선견자”라는 말을 사용해서 사무엘을 가립니다. 사울은 사무엘이 누군지 모르고 있다가 사무엘이 내가 그 사람이라고 말했을 때 비로소 알게 됩니다. 사무엘 편에서도 사울이 가려졌습니다. 하나님이 누구를 세우실지 모르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두 사람의 만남 바로 전날 사무엘에게 말씀하셨고, 사울이 사무엘 앞에 나타났을 때에 이 사람이 그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선 인간적인, 정치적인 것과 관련이 없는 사울을 찾으셨을 뿐만 아니라, 사람의 개입을 막으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왕을 달라는 백성들의 요구에 응하셨습니다. 18절에 나오는 대로 애굽과 모든 나라의 손에서 건져내신 왕 되신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들 위에 다른 왕을 세워달라고 한 그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왕을 세워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거부하는 백성들의 요구를 들어주십니다. 사람 같으면 그런 요구를 할 때 ‘이제는 니들끼리 알아서 해라’하고, 손을 털어 버릴 텐데, 하나님은 내버려 두시지 않으셨습니다. 구체적이고도, 적극적으로 개입하십니다. 주도적으로 그 일을 하십니다. 그것은 어떻게든 자기 백성을 붙잡으시려는 하나님의 애착입니다. 어리석은 백성의 요구대로 들어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가장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는 하나님의 행위입니다. 어떻게든 그 백성을 이끌고 가시려는, 그 관계를 계속 이어가시려는 하나님의 처절한 사랑표현입니다.
그렇게 해로운 것을 원하는 자식에게 어쩔 수 없이 그것을 줄 때, 자식은 부모 마음을 알고 죄송스럽게 받아야 하는데, 그렇게 합니까? 아닙니다. 좋다고 하면서 받습니다. 어쩔 수 없이 주는 마음을 헤아리지 않습니다. 또 반대로 그것을 주지만 어떻게든 다치지 않게, 상하지 않게 하려고 그것을 변형시키고, 안전한 정도로 주면 그게 아니라고, 자기가 생각한 것이 아니라고 불평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울을 세우셨을 때 백성들은 두 가지 반응을 보였습니다. 모든 백성이라고 일컬어지는 부류는 왕의 만세를 외쳐 불렀습니다. 한편에서 불량배들이라고 불리는 자들은 사울을 멸시했습니다. 우리는 만세를 외친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인 것으로 여기기 쉽지만 두 부류 모두 하나님을 분노케 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찢는 반응이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한 부류는 왕이신 하나님을 버리는 일이 실현된 것을 기뻐한 것이고, 또 한 부류는 그러한 하나님의 배려마저도 불만스럽게 여긴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을 지으시고, 일으키시고, 지금까지 보호하신 하나님을 거절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 자신 이외의 모든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이르기까지 관계를 이어가도록 허락하시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상당수의 신자들은 하나님이 자신이 주시는 것들을 우리가 받아 누리는 것을 보시면서 기뻐하신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주실 수 있고, 주시려고 합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그것은 신자와 불신자에게 구별 없이 주어지는 일반적인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진정 주시려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자신을 주시려고 합니다. 그 하나님의 마음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이 가장 분명하고도 최종적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자신들의 메시야, 왕을 기다린 자들에게 예수님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한 편에서는 예수님이 자신들의 현실적 문제 해결을 하고, 해방을 가져오고 나라를 재건할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에 환영하면서 자기들의 왕으로 삼으려고 했고, 다른 한 편에서는 자신들이 생각한 왕의 모습이 아니라고 불평하면서 죽이려고 했고 죽였습니다. 어떻습니까? 사울 앞에서 보인 두 부류의 모습과 유사하지 않습니까? 인간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본심을 깨닫게 하시려고 주신 최선의 것을 대해 사람들은 그런 태도를 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모든 것들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고자 애써야 합니다. 하나님이 뭔가를 주셨다고 해서 내 요구를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기뻐하신다는 뜻도 아니고, 맘에 들지 않은 것을 허락하셨다고 해서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 신앙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신에게로 이끄시는 것입니다. 무엇을 주든 안 주든 이제는 좀 더 하나님만으로 만족할 수 있겠냐고 질문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자신을 우리에게 가장 좋은, 필요한 분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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