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19-20장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 한 노력이 처음에는 은밀했다가 점점 노골적으로 드러납니다. 그는 신하들에게 다윗을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다윗을 아낀 요나단이 그 사실을 알고 다윗을 피신시킵니다. 요나단은 아버지의 악행을 지적하고 잘못이 없는 다윗을 죽이지 말라고 설득했습니다. 사울이 아들 요나단의 말에 달라지는 듯 했지만 다윗을 죽이려는 노력은 계속됩니다. 사울은 또 창으로 다윗을 죽이려 했습니다. 다윗이 집으로 피신하자 사울은 군사들을 보내 다윗을 죽이게 했습니다. 다윗의 아내 미갈이 그것을 알고 다윗을 몰래 도망치게 합니다. 다윗은 사무엘이 있는 라마 나욧으로 가서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알리고 함께 지냅니다. 사울이 그 사실을 알고 군사들을 보냅니다. 세 번이나 보냈는데 모두 하나님의 영이 그들을 사로잡아 사울이 시킨 일을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군사들이 사울의 종이 아닌 하나님의 종이 된 것입니다. 결국 직접 다윗을 죽이러 온 사울에게도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사울은 사무엘이 있는 라마 나욧에 도착할 때 까지 계속 이상한 말을 했고, 사무엘 앞에서는 옷을 벗고 떠들다가 지쳐서 쓰러졌습니다. 제정신이 아닌 채로 있다가 돌아갔습니다.
다윗은 요나단을 만나 ‘네 아버지가 나를 죽이려 한다.’고 말했지만 요나단은 지난 번 아버지를 설득해서 다윗을 해치지 않겠다고 약속을 받았기 때문에 아버지가 달라졌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요나단은 다윗을 위해 아버지 사울의 마음을 확인하기로 합니다. 다윗이 들에 숨어 있는 동안 요나단은 아버지 사울에게 다윗을 죽이려는지 물어보기로 합니다. 다윗이 안심해도 된다면 요나단은 다윗에게 들리도록 자기 소년한테 ‘화살이 가까운 이쪽에 있다’라고 말하기로 했습니다. 반대로 ‘화살이 네 앞 먼 곳에 있다’라고 말하면 도망가라는 뜻으로 알라고 그렇게 자기들만의 암호를 약속을 했습니다.
계획대로 요나단이 연회 자리에서 사울과 이야기를 합니다. 사울은 요나단에게 네가 왕이 되려면 다윗을 죽여야한다고 하자 요나단이 반대했고 사울은 요나단에게도 창을 던집니다. 요나단은 자기가 아버지를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다윗이 한 말이 옳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음 날 요나단은 다윗과 약속한 장소에 종을 데리고 가서 활을 쏩니다. 그리고 자신이 하고 싶지 않았던 가슴 찢어지는 말을 합니다. ‘네 앞 먼 곳에 화살이 있으니 주워 와라.’ 요나단은 종이 화살을 주워오자 먼저 보낸 후 숨어있던 다윗을 만나 울며 작별합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이러한 핍박을 받아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20장 1절에서 다윗이 “내 죄악이 무엇이며 네 아버지 앞에서 내가 죄가 무엇이기에 그가 내 생명을 찾느냐”라고 말한 대로입니다. 사울의 시기심과 불안을 유발한 다윗의 뛰어난 업적들은 왕권을 노리고 발휘된 것이 아닙니다. 다윗은 사심 없이, 신실하게 자신의 주인이신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위해 모든 일을 한 것입니다. 사람들도 그것을 알았기 때문에 본문에서 위험에 빠진 다윗을 도왔던 사람들은 다른 이들이 아닌 바로 사울의 가족들입니다. 그리고 사무엘입니다.
문제는 사울에게 있었음을 그의 가족들이 증명합니다. 그들은 다윗을 살리기 위해 거짓말까지 합니다. 미갈은 자신이 주도적으로 다윗을 피신시켰지만, 사울에게는 남편의 위협 때문에 탈출을 도운 것처럼 거짓말을 했습니다. 요나단도 다윗이 아버지 집에 중요한 일이 있어서 왕의 연회에 참석하지 못한 것으로 거짓말을 합니다. 그것은 아버지 사울이 자기들도 죽일 수도 있음을 느꼈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 앞에서 정직할 이유를 상실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울의 자녀들이 사울에게 문제가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사울에 대하여 잘못이 없었습니다.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 그분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을 신뢰하고 순종한 것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러한 다윗을 통해 놀라운 능력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뜻대로 하였는데, 다윗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을 사울 때문에 겪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하셨습니다. 자신의 권리와 주장을 드러내지 않으시고 오직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죄도 없으신대 고난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임당하셨습니다. 다윗은 예수님을 예고하는 구약의 표상인데, 그러한 점에서 예수님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죄가 전혀 없으신 데도 죄인으로 취급당하시며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그런 죄 없는 다윗을 시기하였습니다. 다윗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불만을 품은 것입니다. 자기가 잘못해 놓고는 자기 것을 잃을까봐 하나님과 다윗을 대적했습니다. 19장 31절에서 사울이 요나단을 보고 ‘다윗이 살아있으면 네가 왕 되는 것과 네가 나라를 얻게 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한 것을 볼 때 그는 아직도 자기 왕권을 포기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리셨다고 여러 번 말씀했는데도 사울 자신은 깨닫지 못 할 만큼 영적으로 어두웠거나, 알면서도 하나님께 불만을 갖고 버틴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요나단은 어떻습니까? 그는 아버지와 달리 다윗에게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따릅니다. 18장 3절, 20장 17절에서 성경은 요나단이 다윗을 자기 생명과 같이 사랑했다고 말합니다. 요나단은 사울왕의 후계자가 아닙니까? 아버지 말대로 하면 왕이 될 수 있으니 다윗을 대적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적으로는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요나단은 다윗이 왕이 될 것을 알면서 그를 인정합니다. 생명을 다해 지켜주려 합니다.
그러므로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는 단순히 두 사람의 뛰어난 우정, 친구를 위해 자신을 포기하는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와의 관계를 묘사합니다. 요한복음 15장 13-14절에 예수님은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나단이 다윗을 자기 목숨처럼 사랑한 것 같이,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자기 생명 드리기를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성도의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다윗을 향한 요나단의 마음처럼,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드러나시고, 높아지시고, 뜻을 이루시는 것을 즐거워합니다. 자신은 낮아지고, 자리를 잃게 되고, 잊혀지고, 사라질지라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러워지시는 것을 기뻐합니다.
요나단은 사울의 악함이 노골적으로 드러날수록 다윗에게로 더욱 기울었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리신 것이 마땅하고, 다윗이 세워지는 것이 합당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윗을 향한 요나단의 애착은 강해지고 다윗을 위해서는 자신의 목숨도 아까워하지 않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세상 것들의 실체를 알수록, 나의 죄인됨을 알수록 예수님께 더욱 가까이 갑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시는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음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구원이 합당함을 더욱 깨닫습니다. 성도의 그리스도를 향한 애착은 강해지고, 그리스도를 위한 헌신이 전부이게 됩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갈수록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는 것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관심이 결여된 것을 보게 됩니다. 그저 이 땅, 이 세상, 자기 것에 대한 애착만 있습니다. 세상 어려움을 당할수록 실망하여 그 애착을 버리기 보다는, 이전보다 더 벌벌 떨면서 여전히 세상에 있는 것 중에 더 확실하게 보이는 것을 붙잡으려 하지 않습니까? 그 붙잡는 행위에 도움을 얻으려고 신앙을 갖는 것은 아닙니까?
요나단이 자신이 왕 될 자리를 포기하면서까지 다윗을 위하듯,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이러한 흠모함과 애착이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귀히 여김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세상 살수록 하나님이 참으로 세상의 주인이실 수밖에 없음을 발견하고 있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일하심과 약속들에 대해 ‘그것이 마땅합니다’하고 동의를 하고,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기를, 하나님의 영광 보기를 원하는 마음이 커지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진정한 친구이신 예수님을 위해 우리의 어떤 것도 내놓기를 주저하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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