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21-22장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다윗을 죽이려는 사울의 태도가 확고하다는 것이 여러 사건들을 통해 확인되자 다윗은 이제 혼자가 되어 사울의 위협으로부터 멀리 달아나야 했습니다. 다윗은 제사장 아히멜렉을 만나러 놉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왕권을 지키려는 사울이 곳곳에 감시자들을 두었기 때문에 누구든지 다윗을 도와준 사실이 알려지면 그 사람도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히멜렉은 이스라엘의 유명한 장수인 다윗이 혼자 다니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다윗은 사울과 별 문제가 없는 것처럼 거짓말을 하고 도움을 청합니다. 아히멜렉은 제사장들만 먹을 수 있는 진설병 떡과 골리앗의 칼을 다윗에게 주었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보다는 사울의 힘이 미치지 않는 다른 나라로 피합니다. 블레셋의 가드라는 지역으로 망명을 하려했습니다. 가드는 엘리 제사장 시대에 빼앗긴 언약궤가 머물렀던 곳입니다. 가드의 왕은 아기스였는데 그의 신하들이 다윗을 알아보고 왕에게 보고했습니다. 그 사실을 안 다윗은 미친 척을 해서 자신을 지켰습니다. 다윗은 가드를 떠나 아둘람 동굴로 도망쳤고, 위협을 느낀 가족들도 모였습니다. 그리고 환난 당한 자, 빚진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들도 모였습니다. 그렇게 다윗이 피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이 다윗에게고 모였고 세력을 얻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다윗이 자신의 안전을 위해 두 차례 사용한 방법은 속이는 일입니다. 제사장 아히멜렉을 속였고, 가드왕 아기스를 속였습니다. 그 뿐 아니라 앞에서 다윗이 사울에게서 피할 때마다 계속 속임이 있었습니다. 미갈이 다윗의 도피를 도와줄 때, 요나단이 연회에 참석하지 않은 다윗을 위해 변호할 때도 속이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 속이는 일은 인간이 하는 죄 중에서 가장 빈번한 일입니다. 속임은 소극적으로 사실을 말하지 않는 방법으로 행해지기도 하고, 적극적으로 거짓을 말하는 것으로 행해지기도 합니다. 이 속이는 일은 성경이 묘사하는 인간의 실상 중에서 대표적인 특징입니다.
사울도 다윗을 죽이려 할 때 속임수를 썼습니다. 다윗을 나라와 백성을 위해 전쟁터로 보낸 것이 아니라 죽게 하려고 보냈습니다. 그런데 다윗도 사울처럼 그 잘못을 합니다. 자기가 살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속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처럼 아무리 뛰어난 하나님의 사람도 죄인의 생존방식을 배운다는 것을 드러내십니다. 그런 다윗의 속임으로 인해 다음과 같은 비참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앞에서 다윗이 제사장 아히멜렉에게서 떡과 칼을 받을 때 지켜보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사울의 신하 도엑입니다. 도엑은 사울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사울은 아히멜렉을 비롯한 놉 사람들을 몰살시킵니다. 결국 다윗의 거짓말로 피해자들이 발생합니다. 놉 사람들은 죽임을 당할 만한 반역자들이 아니었고, 제사장 아히멜렉도 자신이 잘못이 없음을 충분하게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그저 아히멜렉이 다윗을 도와주었다는 것 때문에, 또 아히멜렉과 그의 다스림 아래 있는 놉 사람들 전체를 몰살했습니다.
사울은 하나님께서 적 아말렉을 남기지 말고 진멸하라 하셨을 때는 제사를 핑계로 불순종하였습니다. 그런데 무고한 자기 백성 놉 주민들을 잔인하게 죽이는 일은 주저하지 않고 저질렀습니다. 그 잔인한 일을 시켰을 때 신하들이 주저하자 도엑을 시켜서 전멸시켰습니다. 죽임 당한 자들이 사울의 적들입니까? 아닙니다. 자기 백성입니다. 사울은 불안에 휩싸여서 모두를 경계합니다. 자식들, 신하들, 평화롭고 무력한 제사장들과 그 주민들 모두를 위험요소로 느끼는 것입니다. 이것은 완전히 근거 없는 망상입니다. 그 누구도 믿지 못하는 불신의 상태입니다. 그러니 아무 죄 없는 놉 사람들에게 불안한 감정을 쏟아냈습니다. 비이성적으로 분노를 표출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떠나고 사악한 영에 사로잡혀서 어리석은 일을 했습니다. 이런 사울의 악랄한 짓은 그가 더 이상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왕위를 잃는 일을 스스로 재촉했습니다. 신하를 비롯한 주변 인물들로부터 신뢰를 이미 상실했는데, 이제는 나라 전체로 볼 때도 왕으로서의 역할을 못하는 것입니다.
자기백성을 자기 안전을 위해 죽이는 자는 왕이 아닙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빈번한 일입니다. 역사 속에서는 그런 왕들이 많았습니다. 반란을 일으키는 자들, 나라를 전복시키려는 자들, 음모를 꾸미는 자들을 처단하는 일들이 역사 속에서 항상 있습니다. 지금도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보게 되는 사울의 악행에 우리는 별로 놀라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이런 인간 왕을 세우고, 나라를 이루게 하신 것은 그와 대조되는 하나님 나라를 깨닫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인간의 나라는 하나님 나라가 어떤 지를 부분적으로 나타냅니다. 그래서 세상 나라에 반역자가 있듯 하나님 나라에도 반역자가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도 반역자는 처벌됩니다. 그 벌은 영원합니다. 모든 인간은 자기가 주인이 되려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에 대한 오해와 불평을 품고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반역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반역자인 인간을 모두 심판하시고, 돌아오지 않는 자들을 영원한 진노와 형벌 속에서 살도록 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반역자를 다루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이 인간 왕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반역자에 대해 이미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인간 사울은 의심과 망상에 사로잡혀서 있지도 않은 음모에 불안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아무 잘못 없는 사람들을 반역자로 몰아서 죽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반역자인 우리를 이미 정확하게 알고 계십니다. 또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를 보고 계십니다. 인간이 계획하기 전에 하나님을 대적하기 전에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반역자들을 역사라는 긴 시간 속에 두십니다. 왕 사울은 다윗이 두려워 지체함 없이 자기 백성인 놉 사람들을 죽이는 일을 실행했습니다. 헤롯 왕 역시 아기 예수가 두려워 어린 아기들을 죽였습니다. 인간은 무엇인가를 가질수록 잃을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나에게 유리할 때 먼저 손을 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 대해 이미 다 아시면서도 긴 시간을 허용하십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합니까? 어떤 반역자도 하나님을 위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충분한 시간 속에서 반역자들이 아무리 힘을 합치고, 더욱 발전, 진보하여서 하나님을 반대할지라도 하나님께는 불안과 위협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반역 행위가 분명할수록 인간은 스스로 어리석음과 악함을 확인할 뿐입니다. 그것을 전 역사를 통해서 확인시키십니다.
셋째, 하나님께서는 상호 소통 속에서 우리의 반역을 다루십니다. 사울은 불안감 때문에 이성을 잃었습니다. 악한 것에 사로 잡혀서 모든 것을 왜곡되게 인식하고 판단합니다. 대화가 되지 않습니다. 자기 생각과 느낌에 따라 일방적으로 행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반역자들과 반역의 행위를 정확히 다 아시면서도 일방적으로 행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과 일하심 속에 사람을 불러들이셔서 인격적으로 죄를 깨닫게 하시고,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품은 불만이 잘못된 것임을 깨닫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도록 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진정 우리를 위하시는 주인이심을 알게 하십니다.
넷째, 하나님께서는 반역에 대한 처벌을 자신이 감당하십니다. 세상 왕에게는 반역에 대한 다른 대응책이 없습니다. 가능한 빨리 음모를 밝혀내서 관련자들을 처단하는 것뿐입니다. 그것이 자기를 지키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반역자들에게 놀라운 해결책을 마련하셨습니다. 우리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전혀 책임이 없으신데 반역자들을 위해 비참한 것을 감당하셨습니다. 반역자들을 위해 하나님 자신이 대가를 치르신 것입니다.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반역자들을 위해 대신 죽게 하셨습니다. 십자가는 그 반역의 대가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이 얼마나 위대한지도 보여줍니다.
우리는 반역자입니다. 다윗처럼, 놉 사람들처럼 반역자로 오해받은 정도가 아니라, 진짜 반역자입니다. 이런 우리를 아시고, 다시 돌아오게 하시며, 영원한 자신의 나라를 굳건히 세우는 종들로 사역자들로 사용하시는 놀라운 왕, 지극히 선하신 왕은 바로 우리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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