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23장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이스라엘의 그일라라는 지역이 블레셋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다윗이 그일라를 도와야 할지를 하나님께 묻고 응답을 받은 후 그일라를 위해 싸우려 했지만 3절이 말하는대로 다윗과 함께 한 사람들은 전쟁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두려워하는 자기 사람들을 위해 다윗은 재차 하나님께 물으며 확인합니다. 여전히 하나님께서는 그일라를 도우라 하셨고, 하나님의 은혜로 다윗이 블레셋을 이겨서 그일라를 구해냅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다윗이 그일라에 머물고 있는 것을 사울에게 알립니다. 그러자 7절에서 사울은 “하나님께서 그를 나의 손에 넘기셨다”고 말합니다.
앞에서 다윗 때문에 제사장 아히멜렉과 놉 사람들이 사울에 의해 비참한 결과를 맞이한 것처럼 그일라 사람들도 그렇게 될 수 있음을 다윗은 예상했을 것입니다. 그일라 사람들은 살기 위해 다윗을 사울에게 넘겨줄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일라 사람들이 자신을 사울에게 넘겨줄 것인지를 하나님께 물었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다윗을 넘겨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윗에게 은혜를 입은 자들이 다윗을 배신한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결국 그일라를 떠나 십광야로 피합니다.
그런데 십 사람들도 사울에게 다윗이 자기 지역에 숨었다고 알립니다. 21절을 보면 사울은 정보를 제공한 십 사람들에게 ‘너희가 나를 긍휼히 여겼으니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한다.’라고 말합니다. 사울이 왜 십 사람들에게 자기를 긍휼이 여겼다고 말했습니까? 자기가 지금 다윗 때문에 불쌍한 처지라는 것입니다. 마치 다윗이 악랄한 반역을 꾸며서 자신이 피해자인 것처럼 말하는 것입니다. 사울은 자기를 스스로 보호합니다. 불쌍하지 않은데 불쌍한 척, 피해자인 것처럼 말합니다. 앞에서 사울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자기 손에 넘기셨다고 말하면서 자기를 정당화하려고 하나님이 도와주시는 것처럼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14절은 “사울이 매일 찾되 하나님이 그를 그의 손에 넘기지 아니하시니라.”라면서 사울의 말을 반박합니다. 사울은 하나님이 자기편이 아니신데 자기편이신 것처럼 꾸밉니다. 하나님을 이용해서 자기를 특별히 여기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몇 차례 살폈지만 사울은 하나님이 자기를 돕지 않으시는 것, 버리신 것, 자기 편이 되어주시지 않는 것을 핑계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정말 반성하고, 돌이킬 기회를 놓칩니다. 그러면서도 상황이 자기에게 조금만 유리하면 하나님이 자기를 도우시는 것이라고 포장합니다. 다윗이 자기 손아귀에 들어올 것 같으니까 하나님이 자기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시대의 개신교 내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한 편에서는 비도덕, 비상식적인 문제들을 저지르면서 한 편에서는 자기들이 하나님 편이라는 것을 대외적으로 확인시키려고 합니다. 자기 교회의 세력이 크고 목회자가 유명하면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인정하시고, 자기들 편이라고 착각을 해왔기 때문입니다.
신자 개인도 그런 논리로 신앙생활 합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것 같고, 능력 주시는 것 같고, 상황이 좋아지면 자기 신앙이 바른 줄 알고 즐겁게 헌신합니다. 그런데 반대로 하나님이 나를 특별대우 안 하시는 것 같고, 능력 안주시는 것 같지 않고, 힘든 상황이 그대로면 의심이 생깁니다. 기뻐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여전히 자기가 주체가 되고, 신이 되려는 것입니다. 자기 우상화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것과 허용, 허락하시는 것을 분별해야 합니다. 교회가 성장했다고 하나님이 그 교회를 바른 교회로 인정하시는 것입니까? 반대로 교회가 성장하지 않는다고 하나님이 버리신 것입니까? 그런 성장과 쇠퇴는 다른 종교에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교회 다니면서 일종의 은혜를 받고, 삶의 활력과 위로를 얻는 것이 다른 종교, 문화에도 있습니다. 그래서 가시적인 기독교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현상이 정말 하나님의 특별한 인정과 사용하심일 수도 있지만 일반은총에 그치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사울의 눈에는 다윗을 죽이려는 자기 의도대로 일이 잘 풀리는 것처럼 보일 때 그것은 하나님이 사울의 편이시기 때문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기 위해서 사울에게 협조한 것이고, 그것을 하나님이 허용하신 것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만큼은 모든 사람에게 생사화복, 희노애락을 일정수준에서 보편적으로 허락하시고 유지하십니다. 신앙과 상관없이 그러하십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원이 없는 어떤 종교들도 잘 되도록 하나님은 내버려두시는 것이고, 거짓교회들도 내버려두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일반은총의 차원에서 다들 하는 역할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눈에 보이는 것이 잘 된다고 해서 하나님이 나와 우리를 옳다고 인정하신다고 확신할 수 없습니다. 뭔가 특별함이 드러나는 곳에 속해 있으면 구원 받겠지 생각하는 것은 착각입니다.
그렇게 인간은 하나님이 인정하시지 않는 일을 하면서도 자기 정당화를 할 때, 일반은총 영역에서 경험한 하나님의 허용과 배려를 가지고, 자기를 특별히 인정하시는 것으로 오해하고 오용합니다. 반대로 그런 성취가 없고 상황 개선이 안 되면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용하시지 않는 것, 하나님 뜻이 아닌 것, 열심을 내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핑계합니다. 특별함을 경험하는 것이 하나님의 선택하심, 인정하심과 관련이 없습니다. 그것으로 나의 신앙, 나의 생각과 행동이 옳다는 근거로 삼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어떻습니까? 사울이 받지 못하는 특별대우를 받았습니까? 특별대우는커녕 다윗에게 불리한 상황과 조건 속에서 사울의 부당한 핍박이 계속됩니다. 그는 하나님께 선택되어 기름 부음을 받았지만 고난과 위기만 계속됩니다. 그런 가운데 어찌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다윗은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계속 여호와 하나님께 묻습니다. 그일라를 구하라는 곤란한 일을 시키시는 하나님께 순종합니다. 자기 코가 석 자인데, 위기 중에서도 백성을 구했습니다.
예수님을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이 특별대우 받으신 적 있습니까? 상황이 좋게 바뀐 적이 있습니까? 예수님은 태어나실 때부터 죽음의 음모 속에 계셨습니다. 그래서 본격적인 사역이 시작되고 후반부로 갈수록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더욱 죽이려고 계획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과정에서도 자기 백성들을 돌보셨습니다. 먹이시고, 고치시고, 전파하시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그 돌보는 행위가 예수님에 대한 비난과 공격을 더욱 부추겼고, 또 그 돌봄 속에 있던 자들이 오히려 예수님을 곤란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고난 가운데 계셨습니다. 어려운 상황 속에 계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지 않으신다. 나를 도와주시지 않는다. 고통을 해결해주시지 않는다. 그러니 내가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나는 할 수 없다’라는 태도를 보이신 적이 없습니다. 또 반대로 하나님이 자신을 특별히 여기신다는 것을 이용해서 자기를 주장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그 정당한 권리와 능력을 끌어오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라는 시험, 즉 하나님이 자신을 특별히 여기시는지 증명해 보이라는 것이 시험거리였습니다. 예수님은 “나는 특별하다”를 증명하려 하시지 않고, 하나님의 종으로서 섬기시고 죽으셨습니다.
우리도 그러해야 합니다. 자기중심적 해석을 멀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특별히 여겨주시는 것이 드러나야 확신을 가지고, 신앙생활에 열심을 내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분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향한 특별한 사랑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로 충분하게 나타났습니다. 그것이 영원토록 확인되고 경험해야 할 가장 특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려운 일들이 잘 안 풀리고, 오해가 있고, 위기가 있고, 위협이 있어도, 분명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라면 종으로서 순종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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