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버리시는 하나님도 신뢰할 수 있는가? (사무엘상 18장)

따뜻한 진리 2020. 8. 2. 21:10

사무엘상 18:6-21  

 

    다윗은 사울 앞에 드나들던 무명의 소년이었는데,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승리해 이제는 누구나 알아보는 영웅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다윗을 아주 좋아했습니다. 요나단은 자신의 모든 것을 줄 동지를 얻은 듯했습니다. 그래서 본문은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과 하나가 되었다고, 요나단이 다윗을 자기 생명 같이 사랑했다고 말합니다.

 

    또 사울의 신하들과 백성들도 다윗을 인정하고 높였고 사울은 다윗을 군대장으로 삼았습니다. 20절에 가면 사울의 딸 미갈도 다윗을 사랑하게 됩니다. 다윗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12절, 14절, 28절에 나오는 데 바로 여호와께서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또 본문 5절, 14절, 15절, 30절이 동일하게 말하는 것은 그가 지혜롭게 행했다는 것인데 단순히 다윗의 처세술이 좋았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다윗이 지도자로서 필요한 능력들을 부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4절은 “다윗이 그의 모든 일을 지혜롭게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니라”라고 다윗의 지혜로움과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연결해서 말합니다. 이렇게 다윗은 사람과 하나님께 사랑스러운 자가 되었습니다. 누가복음 2:52에서는 “예수님께서 지혜와 키가 자라 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셨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다윗이 그런 관심과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의 그런 시간이 그리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인가 사울과 다윗이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이기고 돌아올 때 많은 백성들이 환영했습니다. 그중 여인들이 “사울은 죽인 자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하면서 다윗이 사울보다 뛰어나다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사울은 이 노랫말에 마음이 크게 상합니다. 사울은 다윗이 더 얻을 것은 이 나라밖에 없다고 화를 냈고, 그 때부터 사울은 다윗을 주목합니다. 그것은 좋은 뜻으로 지켜보는 것이 아니라, 다윗의 인기가 높아져서 자기를 위태롭게 하는 지를 감시한 것입니다.

 

    사울은 정신이 이상해져서 마구 떠들어대기도 했고, 또 다윗의 수금 연주로도 이전처럼 효과를 보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사울이 다윗에게 창을 두 번이나 던졌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자기 곁에서 떠나게 하여 천부장으로 삼았습니다. 이는 다윗을 전투가 잦은 전쟁터로 보내서 위험에 노출시키고, 왕궁에 머물면서 정치적인 입지를 넓히는 것을 막으려는 사울의 음모입니다. 또 사울은 원래 골리앗을 쓰러뜨린 사람에게 딸을 주기로 약속했었는데 맏딸 메랍을 다른 사람에게 보내버립니다. 그것은 사울이 다윗을 모욕하기 위해 고의적으로 한 일입니다. 이후에 사울은 다른 딸인 미갈이 다윗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신하들을 통해 다윗의 마음을 떠봅니다. 다윗이 결혼할 마음은 있는지, 그리고 주저한다면 무엇 때문인지를 알아내려 한 것입니다. 당시 풍습 상 남자는 결혼을 위해 신부의 아버지에게 줘야 할 지참금이 있어야 하는데, 다윗은 자신이 그럴 형편이 안 된다는 것을 신하들에게 말했습니다. 그래서 신하들은 그런 다윗의 심정을 사울에게 전하고, 사울은 그 점을 이용하려 했습니다.

 

    사실 다윗은 사울의 딸과 결혼할 수 있는 자격을 이미 가졌습니다. 골리앗을 쓰러뜨린 자에게 그렇게 포상하겠다고 사울이 공언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의외로 다윗이 자신의 마땅한 권리를 주장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사울은 옳거니 하고 다윗에게 일종의 결혼 지참금을 요구합니다. 그것은 블레셋 남자 백 명을 죽여서 생식기 포피 백 개를 가져오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울이 한 말이 무엇입니까? “너는 나를 위하여 용기를 내어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라”라고 말했습니다. 또 본문은 사울의 생각을 밝힙니다. “그가 생각하기를 내 손을 대지 않고, 블레셋 사람들의 손을 그에게 대게 하리라” 무슨 뜻입니까? 다윗을 좋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사울이 직접 죽이면 큰 원망을 사게 되니까 블레셋의 손에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싸움이 “여호와의 싸움”이라고 말도 안 되는 의미를 부여합니다. 자신의 사악한 음모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으로 포장해서 다윗에게 명령한 것입니다.

 

    사울의 사악함은 다윗을 전쟁터에 보낸 것만이 아닙니다. 사울의 요구에는 무서운 음모가 숨겨져 있습니다. 17장 26절에서 다윗이 이스라엘 사람들 앞에서 골리앗을 가리키면서 했던 말이 있습니다.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 누구이기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라는 말을 했습니다. “할례 받지 않은”이라는 표현은 이스라엘이 할례를 받게 되어있기 때문에 그것과 무관한 이방인에 대한 모욕적인 표현입니다. 이방인들은 그 표현의 의미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사울이 다윗에게 블레셋 남자들을 죽이고 포피를 베어 오게 한 것은 블레셋 전체에 대한 심각한 치욕을 주는 것으로서 블레셋 사람들이 다윗을 어떻게든 반드시 죽이겠다는 결심을 하게 만들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사울은 다윗이 겹겹의 위험에 처하도록 그토록 주도면밀한 계획을 한 것입니다.

 

    사울이 왜 그런 악한 일들을 꾸민 것입니까? 28절에서 말하는 대로 여호와께서 다윗과 함께 하심을 사울이 알게 되면서 두려움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다윗과 함께 하시는 것이 왜 사울에게는 두려움의 이유가 됩니까? 사무엘을 통해 들은, 자신을 버리셨다는 여호와의 말씀이 드디어 다윗을 통해 실현되는 것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두려움에 사로잡혔고 그것은 공격성으로 표출되었습니다. 14장 52절 말씀대로 사울은 다윗을 단지 자신이 불러 모았던 군사들로 생각하여 자기 아래에 두고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는 도구로 사용하려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다윗의 영향력이 자신의 예상을 넘어서고, 또 자신의 음모로 다윗을 죽이려고 했지만 오히려 다윗이 당당히 살아서 오는 것을 보면서 두려워한 것입니다. 사울은 다윗에 대한 시기와 왕의 자리를 빼앗길 것에 대한 불안감이 커지면서 다윗에 대한 분노와 살해하고자 하는 악한 마음만 커졌습니다. 그래서 백성과 신하들과 사울의 자녀들은 다윗을 좋아했는데, 오직 사울만이 다윗을 대적한 것을 본문이 말합니다. 사울이 다윗에게 악한 행위를 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불만을 표출한 것이기도 합니다. 사울은 자신의 악함 때문에 버림받았고, 수차례 하나님이 기회를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일하시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내가 높아지고, 가치 있게 되는 하나님의 뜻은 쉽게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낮아지고, 버림당하는 일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뜻과 생각을 거절하시고, 또 지금까지 나를 사용하신 것을 거두시고, 나를 별로 중요하지 않은 위치와 상황으로 떨어뜨리신다면 어떻게 반응하겠습니까? 그럴 때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회피하고, 또 그것이 확인되기라도 하면 사울처럼 불만을 품기 쉽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바르게 생각해야 합니다. 나를 높이신 분이 하나님이라면 낮추실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라면 죽음도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하는 기초적인 생각입니다. 그런데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못합니다. 하나님을 우상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잘 되게 해주는 신으로 여깁니다. 그것은 불신자의 생각입니다. 사울에게 있는 문제의 기초입니다. 사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왕으로서는 버리셨어도 한 인간으로서는 은혜 주시기를 겸손하게 구했어야 합니다.

 

    혹 우리가 그런 상황에 처해도, 모든 기회가 사라진 것을 알게 되어도, 죽을 일만 남은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기회가 사라져서 이제는 내가 아무리 잘해도 반전이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되어도, 그래도 끝까지 주어지는 기회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그래도 붙잡고, 겸손하게 주권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기회를 끝까지 주십니다. 그 기회를 볼 수 있고, 그 기회에 순종하는 것이 신자에게 있어야 할 하나님을 향한 믿음입니다. 그런 기회마저 버린 사울처럼 강퍅해져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오해를 하는 것이 아니라 버림받는 일을 받아들이고, 끝까지 하나님을 붙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버림당하셨습니다. 우리 대신 징계를 받으셨습니다. 사울은 자신이 잘못을 해서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어떤 불순종도 없이 하나님께 버림받으셨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버림받는 일을 받아들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일평생 하나님께 순종하였지만 십자가에 죽어야 하는 비참한 일은 다른 것으로 바뀌거나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순간까지 하나님을 신뢰하셨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세상 속에서 우리를 버리시는 것 같은 순간에도 끝까지 기회를 주십니다. 세상을 기반으로 생각할 때 나의 가치와 역할이 축소되는 것처럼 보여서 버리신 것 같지만, 그것은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붙잡는 기회입니다. 여호와 하나님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고백할 기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