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첫 왕의 죽음을 슬퍼한 다윗 (사무엘하 1장)

따뜻한 진리 2020. 10. 4. 21:35

사무엘하 1장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사울이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해 버림받고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면, 다윗은 그 아말렉에 대해 승리하면서 백성들을 되찾았습니다. 다윗이 시글락으로 돌아와 이틀이 지났을 때, 전장에서 겨우 도망 나온 듯한 모습의 병사가 다윗에게 와서 엎드려 절했습니다. 그 사람은 사울과 요나단이 죽었다고 말했습니다. 다윗이 놀라서 어떻게 그것을 아느냐고 묻자 그 사람은 자신이 아말렉 용병이고, 우연히 길보아 산에 올라갔다가 사울이 고통스러워하며 자신을 죽여 달라고 해서 죽였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사울에게서 벗겨온 왕관과 고리를 증거물로 내놓았습니다. 다윗은 너무나 슬퍼하면서 그 젊은 군인을 죽이라고 명령했습니다.

 

    다음으로 다윗은 슬픔의 시를 써서 개인적인 작품으로 남기지 않고, 유다 족속에게 가르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야살의 책에 기록되었습니다. 그 시의 제목은 “활 노래”입니다. 이 시에서 다윗은 사울과 요나단을 이스라엘의 용사로 표현합니다. 다윗은 사울이 신앙적 결점이 많지만 그래도 이스라엘을 지키기 위해 끝가지 싸웠다는 것을 기억시킵니다. 특별히 다윗은 요나단에 대한 깊은 애정을 묘사합니다. 요나단이 아버지와 한 편이 될 수도 있었지만 하나님의 일하심을 깨닫고 순종하는 태도로 다윗을 도운 것은 신앙적으로 칭송받아 마땅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앞의 사건을 살펴보면 다윗이 그 젊은 아말렉 병사를 죽인 것은 이상하게 여겨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용병인 아말렉 소년이 반역하여 사울을 죽인 것이 아니고, 9절에 나오는 대로 사울이 자기를 죽여 달라고 했기 때문에 죽인 것입니다. 그러니 그 아말렉 소년은 어쩔 수 없이 그 일을 행하고, 다윗에게 와서 보고한 것뿐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 소년이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앞의 사무엘상 31장을 보면 사울은 활에 맞아 중상을 입었고, 무기 든 자에게 자신을 죽여 달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31장 4절에 나오는 대로 사울이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에게 죽임 당하는 것을 모욕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기 든 자가 사울을 죽이지 못하자 사울은 창을 세워 놓고 자결합니다. 그리고 무기든 자도 함께 자결했다고 본문이 말합니다. 무기든 자도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끝까지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깊은 책임감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장 8절을 보면 그 아말렉 병사는 사울이 자신의 소속을 물었을 때에 “나는 아말렉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말했습니다. 사울이 이방인인 아말렉 군사에게 자신을 죽여달라고 했을 리가 없는 것입니다. 또 그는 사울을 죽였다고 말하면서도 어떤 자책도 느끼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에게 찾아온 그 아말렉 군사가 사울의 목숨을 끊었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당시 다윗이 사울에게 핍박당했던 것을 아는 사람이라면 다윗이 사울의 죽음을 기뻐하고 그 죽음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자를 포상할 것이라고 기대할 만 합니다. 그래서 그 아말렉 병사는 사울이 죽었으니 이제 다윗이 왕이 될 일만 남았고, 이 소식을 전하면 다윗도 기뻐하고, 자기도 보상을 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해서 자신의 공로가 극대화 되도록 사실과 거짓을 섞어 다윗에게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다윗을 제대로 아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사울의 죽음을 오히려 슬퍼했고 그 아말렉 병사의 거짓과 의도를 간파했습니다.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함부로 대하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이지도 모르고, 또 그것을 이용해가면서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행위를 다윗은 그냥 둘 수 없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계속 지켜온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그 원칙을 적용한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의 활의 노래라는 슬픔의 시에서도 그것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진심으로 다윗은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슬퍼한 것입니다. 다윗의 슬픔은 단지 개인적인 슬픔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최대 관심사는 하나님이었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었습니다.

 

    다윗이 사울의 죽음을 슬퍼한 것과 그 죽음을 거짓으로 보고해 이익을 기대한 군사를 죽인 일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다윗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을 신뢰했다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고통을 당했을지라도 사울을 통해 세워지는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뜻이 있고, 하나님이 드러내실 자신의 영광이 있다는 것을 믿은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자기를 죽이려 한 사울이었지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나라로 세우시는 일에 그를 사용하셨고, 그가 마지막까지 블레셋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싸우다가 죽은 것을 시로 칭송한 것입니다.

 

    사무엘상 처음을 생각해보십시오. 이스라엘이 왕을 구하는 행위가 하나님께 어떤 일이었는지를, 하나님의 심정도 떠올려보십시오. 사울이 악하기도 있지만 그 왕을 구한 백성들도 악합니다. 이 땅 전체가 악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선택하시고, 구해서는 안 될 것을 구하는 백성에게 왕을 주시고, 끊임없이 관계하시면서 자신을 드러내시고 은혜와 영광을 알도록 하신 것은 놀라운 것입니다. 다윗은 그것을 본 것입니다. 다윗은 자기중심적인 시각을 벗어나 하나님께서 자기 시대에 하시는 일을 보려고 노력한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시대를 통해 하시려는 일이 있기 때문에 그 속에서 자신이 겪어야 하는 일을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개인적인 감정에 사로잡혀 사울을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이 사울을 통해 이스라엘을 어떻게 여기고 계신가, 백성인 우리들에게 어떤 일을 하고 계신가, 무엇을 전달하고 계시는가를 생각한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하나님이 자신들을 다루심을 경험하는 것이 얼마나 큰 영광인지를 본 것입니다. 그 속에서 자신이 고난을 당했지만 전체에게 의미가 있음을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 다윗이 자신의 형편과 사울에게 시달린 괴로움, 원통함을 기준으로 하나님의 뜻을 해석하려 했다면 사울을 죽이기 위해 하나님이 공의로운 분이심을 강조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울을 죽이는 것이 타당하다고 합리화 했을 것이고, 사울의 죽음도 기뻐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다윗과 같은 하나님 중심적인 시각이 있는지 생각해봅시다. 하나님께서 나의 삶, 우리 각자의 삶을 통해 하나님을 알리시는 것, 나를 구원하셔서 나를 통해 영광을 받으시는 부분도 중요하지만, 내가 속한 시대 속에 하나님이 이루실 일, 이 시대 사람들에게 깨닫게 하시려는 것도 중요합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할 때 자기중심적인 뜻에는 관심을 갖지만, 자신이 속한 시대와 공동체 안에서 나의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는 잘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전쟁의 시기를 산다거나, 경제적인 부흥기 때 산다거나, 우리처럼 코로나라는 전 지구적 위기를 겪는 일 속에서 우리가 지금이라는 순간, 이 나라에 태어나서, 나를 둘러싼 사람들과 이런 사건들을 겪으면서 살게 하시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나를 넘어서 공동체적으로 함께 겪으며 함께 깨달아야 할 의미가 있습니다. 나의 시대가 평화롭든 혼란스럽든, 또 종말로부터 어떤 지점에 있든 하나님께서 이 세대 모든 이들에게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시고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고난에 대해 불평하지 않을 수 있고, 나의 신변을 위한 기도를 넘어 하나님의 큰일을 위해서도 기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