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자존심을 건드리는 은혜 (사무엘하 10장)

따뜻한 진리 2020. 12. 6. 17:41

사무엘하 10장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본문에 등장하는 암몬이라는 나라는 이스라엘의 적국입니다. 사무엘상을 보면 암몬은 길르앗 야베스를 공격하려다가 사울이 이끄는 이스라엘 군대에 의해 크게 패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암몬은 주종관계 아래서 이스라엘에 굴복하게 됩니다. 암몬 왕 나하스가 죽고 그 아들 하눈이 왕위를 잇게 됩니다. 다윗은 애도의 뜻으론 조문단을 보냅니다. 그런데 암몬의 관리들이 다윗의 의도를 의심하고 음모론을 펴자 설득된 하눈은 조문 온 다윗의 신하들을 잡아서 수염의 절반을 깎고, 옷도 엉덩이가 보이는 데 까지 잘라버린 후 돌려보냈습니다.

 

    다윗이 그 사실을 알고는 조문단으로 다녀왔던 신하들을 여리고에 있게 합니다. 그들이 당한 일은 매우 모욕적인 일이었기 때문에 잘린 수염이 어느 정도 자라기까지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지낼 수 있게 한 조치였던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보낸 신하들이 그런 일을 당했지만 암몬에 대해서 곧장 어떤 대응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암몬이 도둑이 제 발 저리는 심정 때문인지 아람(시리아) 사람들을 고용해서 연합군을 만들었습니다.

 

    다윗이 그 소식을 듣고는 요압(사울왕국의 실권자 아브넬을 죽인)을 통해 상대하게 했습니다. 요압은 아비새와 함께 전략을 세웠고,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행하시기를 원하노라”(12절)라는 말로 서로를 격려했습니다. 마침내 요압이 진격하자 아람 연합군이 도망쳤고 그 바람에 쉽게 승리합니다. 아람 연합군은 다시 군대를 정비해서 재도전했습니다. 그런데 아람 군대는 또 도망을 쳤고, 이스라엘에 크게 패했습니다.

 

    본문에서 어리석은 판단을 한 암몬왕의 이야기 그 앞에는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다윗이 므비보셋에게 은혜를 베풀었던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9장과 10장은 뭔가 연관이 있는 것 같습니다.

 

    먼저 두 사건에서 유사한 점을 살펴보면 첫째, 둘 다 아버지 세대에 있었던 일을 생각해서 그 후손을 배려하는 일이었습니다. 9장에서는 다윗이 요나단과의 관계, 약속을 생각해서 그 아들 므비보셋의 삶을 보살펴 준 일이고, 10장은 다윗이 죽은 암몬왕 나하스와의 관계를 생각해서 아들 하눈과도 평화롭게 지내고자 한 일입니다. 그것을 제안하는 차원에서 다윗이 조문단을 보낸 것입니다.

 

    둘째, 두 사건 모두 다윗이 은혜를 베풀려고 한 일입니다. 9장 1절을 보면 “내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리라”라고 되어있고, 10장 2절을 보면 “내가 나하스의 아들 하눈에게 은총을 베풀되”라고 나와 있습니다. 다윗은 그냥 무시해도 될 만한 대상들에게 깊은 배려를 했습니다.

 

    셋째, 두 사건에서 모두 다윗의 의도를 먼저 짐작하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앞에서는 사울의 종이었던 시바가 다윗 앞으로 먼저 불려왔을 때 다윗이 므비보셋의 거처를 묻자, 시바는 다윗이 정적을 숙청하려는 것으로 생각하고 므비보셋은 장애가 심해서 정치적 문제를 일으킬 위험이 없다는 말을 먼저 꺼내지 않았습니까. 다윗의 의도를 오해한 것입니다. 10장에서도 다윗이 암몬에 조문단을 보냈을 때 관리들이 하눈에게 ‘다윗이 조문단을 보낸 것은 왕의 아버지를 공경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염탐하려고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두 사건 모두 은혜 베풀려는 다윗의 의도를 잘못 짐작하는 자들의 생각이 드러납니다.

 

    넷째, 두 사건에서 다윗이 은혜를 베풀기 위해 상대한 자들은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므비보셋은 자신이 어떻게 될까봐 다윗 앞에서 자신을 종이라고 말한 것 뿐 아니라, 다윗이 “무서워하지 말라”라고 말할 만큼 그의 두려움이 표출되었습니다. 또 암몬 왕 하눈은 자신의 관리들이 다윗의 조문단에 의혹을 제기했을 때 영향을 받아 자신의 성이 다윗에게 넘어갈까 두려웠습니다. 또 다윗의 조문단을 수치스럽게 한 후에 다윗의 반응이 두려워서 먼저 공격을 준비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판단, 반응에도 유사한 일이 있는 것 같습니다. 먼저 므비보셋과 하눈이 그런 것처럼 은혜를 알아보지 못하는, 이해하지 못하는 무지가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누군가가 은혜를 베푼다고 할 때에는 그의 깊은 배려와 희생이 거기에 담겨 있습니다. 그 은혜를 제공받는 자는 그 깊은 의미를 다 알지 못합니다. 부모와 자녀 사이에서 그런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주어지는 은혜의 깊이는 인간 사이의 그것보다 더 깊기 때문에 은혜를 깨닫지 못하는 무지가 더 심합니다. 우리 편에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 우리를 향한 어떤 배려와 희생이 있는지 다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받아들이는 자의 그런 무지가 은혜를 가로막는 장애가 되지는 않습니다. 받아들이는 상대가 그 희생과 수고를 몰라주더라도 베풀려는 자가 진정 문자 그대로의 '은혜'로, 어떤 혜택과 도움을 주려고 시작했다면 끝까지 하기 때문입니다. 자식이 부모 마음 몰라줘도 부모가 자녀를 향해 하는 일은 끝까지 은혜인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의 깊이를 다 알지 못한다고 하나님이 은혜를 거두시거나 취소하시지 않습니다.

 

    또 은혜는 그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자의 자존심의 충돌과 잃을 것에 대한 두려움을 유발하기도 합니다. 우리의 존재와 삶에 누군가가 우리를 위하여 개입하는 것이 은혜인데, 그것이 때로 두려움으로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은혜를 받아들일 때, 은혜를 베푸는 자가 은혜 입는 나보다 더 나은 존재라고 여기게 됩니다. 우리는 은혜 때문에 빚진 심정이 되고, 은혜를 베푼 자에게 함부로 하지 못하게 됩니다. 은혜는 우리를 일종의 지배구조 아래로 들어가게 합니다. 그런데 자존심을 가진 우리는 본성상 그 앞에 수그러드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은혜를 잘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자존심을 잃는 것 같아서 은혜를 거절하기도 합니다. 과민반응을 합니다. 그래서 하눈이 다윗의 조문단에게 그런 수치스런 일을 행했는지도 모릅니다.

 

    므비보셋과 하눈이 가졌던 은혜에 대한 무지와 두려움은 주어진 은혜를 누리느냐 못 누리느냐를 나누는 결정적인 차이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면 두 사건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무엇이 그 차이를 가져온 것입니까? 므비보셋은 은혜 앞에서 겸손하게 반응했고, 하눈은 이상할 정도로 어리석은 판단을 하고 저항을 한 것입니다. 두 사람 모두 은혜를 잘못 예상했고 자신의 무엇인가를 침해당할 것에 대해 두려워했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달랐습니다.

 

    그런 태도의 차이가 왜 있게 되었을지 이유를 든다면, 하눈은 뭔가 가진 것이 있었고, 저항할 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눈이 가진 능력, 그의 국력이 다윗을 이길 수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다른 나라의 힘을 빌어서, 연합군을 만들어서 싸워야 하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다윗의 군대에 패했습니다. 하눈은 자기 능력을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교만했습니다. 그저 자존심만 내세운 것입니다.

 

    하눈의 모습은 하나님의 은혜에 끝까지 저항하는 인간의 교만하고 어리석은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런 인간은 자신이 은혜가 필요한 불쌍한 존재임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 은혜에 사로잡혀 다스림을 받는 것을 속박으로 오해합니다. 자신의 자유를 방해하는 것으로 여깁니다. 아직 자신의 비참함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직 자신에게 뭔가 있다고 생각하고, 지키고 보존할만한 무엇이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이 세상의 모습입니다.

 

    반대로 므비보셋은 가진 것도 없고, 저항할 여지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겸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은혜를 필요로 했습니다. 우리가 은혜를 필요로 한다는 것은 그처럼 무능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나에게는 자원이 없고, 곤고하고, 가망이 없고, 지킬 자존심도 남아 있지 않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혼자 설 수 없습니다. 나는 나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깨달은 자는 자신이 자아를 내세우고 자존심을 지킬 형편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자들입니다. 성도는 죄로 인한 심판과 멸망 앞에서 그런 자존심과 고집은 아무 쓸모없는 것임을 알게 된 자들입니다. 우리는 나의 가치를 스스로 지킬 수 없고 죄인인 나를 심판하실 하나님의 판단, 그분의 판결이 떨어질 입에 모든 것이 달려 있음을 아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그 심판 앞에서 나를 가려주실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음을 믿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그 은혜가 나를 압도하는 것, 은혜를 베푼 자의 지배 아래로 들어가는 것, 나를 다스려주고 지켜줄 분이 있다는 것이 오히려 다행이고, 감사한 일임을 아는 자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