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여유 부릴 수 없는 전쟁 (사무엘하 11장)

따뜻한 진리 2020. 12. 13. 21:53

사무엘하 11장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다윗이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찾아 은혜를 베풀고, 암몬왕 나하스가 죽었을 때에 그 아들 하눈에게 은혜를 베풀려 했습니다. 암몬왕 하눈이 다윗의 은혜를 모욕하는 어리석은 결정을 해서 전쟁을 일으켰지만 결국 이스라엘에 패했고, 그것은 이스라엘의 막강함을 주변 나라에 다시 확인시켜 주었을 뿐이었습니다. 이런 내용들은 다윗이 이제 두려울 것이 없는 나라의 왕이 되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동시에 다윗이 어떻게 해서 오늘 본문의 사건을 저지를 마음 상태가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배경이 되기도 합니다. 나라의 강성함, 그 여유로움이 다윗이 악한 죄를 지을 수 있는 힘을 제공한 것입니다. 이제 이스라엘이 모든 조직이 잘 갖춰진 나라로서 잘 돌아가니 다윗은 할 일이 없어 자신의 죄성을 만족시킬 것을 찾았습니다. 눈에 보이는 나라의 전쟁을 수행하는 일과 내면의 전쟁에서도 다윗은 만만하게 여유를 부린 것입니다.

 

    병사들은 전쟁을 치르고 있는데, 다윗은 해가 질 무렵에 왕궁의 옥상에서 바람을 쐬고 있었습니다. 그는 눈에 들어오는 주변 경관을 보다가 목욕하는 밧세바를 보게 되었고, 사람을 보내어 누군지를 알아내게 했습니다. 밧세바를 불러오게 해서 동침을 했고, 밧세바는 임신을 하게 됩니다. 밧세바는 그 사실을 사람을 통해 다윗에게 알렸고, 그 과정에서 이미 많은 사람들이 다윗과 밧세바 사이의 일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다윗은 전쟁터에 있는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를 불러옵니다. 그런데 우리아는 다윗에게 보고를 한 후 집에 가지 않았고, 다윗은 자기 뜻대로 하지 않은 우리아를 최전방을 보내 죽게 합니다. 우리아의 장례가 있었고, 다윗은 밧세바를 궁으로 데려옵니다.

 

    이 과정에서 다윗은 자신의 죄를 덮으려고 애를 씁니다. 밧세바가 자신의 아이를 갖자 남편의 아이인 것처럼 포장하려고 남편 우리아를 불러서 밧세바와 동침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아는 자기 집으로 가지 않았습니다. 자기 군사들이 전쟁 중이었을 때 쾌락을 추구한 다윗과는 달리 우리아는 전쟁터에 있는 동료와 부하들을 걱정했고, 왕궁 문에서 부하들과 함께 잠을 잤습니다. 그 사실을 안 다윗은 우리아를 다시 불러서 왜 집에 가지 않았느냐고 묻고는 음식과 술을 먹여서 보냈습니다. 그래도 우리아는 전처럼 집에 가지 않고 부하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우리아는 다윗 왕이 전쟁터에서 자신만을 불러들인 것, 자기를 지나치게 환대한 것, 왜 집으로 가지 않고 군인들과 야영을 했는지에 대해 물으면서 사생활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에서 당연히 의심했을 것입니다. 또 다윗 역시 우리아가 어느 정도 눈치 챘음을 분명히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우리아를 단순히 속이려 한 것이 아닙니다. 다윗은 자신과 밧세바 사이에서 일어난 일을 우리아가 덮고, 지금까지 그런 것처럼 계속해서 충성스런 부하로 남으라는 무언의 압력을 행사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아는 다윗의 권위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다윗에게 항거했습니다. 아내 밧세바와 동침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우리아는 어떤 내용이 담겨있을지 짐작이 가는 다윗의 편지를 들고 전쟁터로 다시 간 것입니다.

 

    우리아가 가져온 편지를 받은 요압은 전투할 때 우리아를 적진의 가까운 곳에 배치시켜서 죽게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아는 죽었고 그 소식을 전하러 온 전령을 통해 다윗은 요압에게 이런 말을 전합니까? 25절을 보면 “이 일로 걱정하지 말라 칼은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삼키느니라 그 성을 향하여 더욱 힘써 싸워 함락시키라”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이런 뜻입니다. ‘전쟁하다 보면 언제든, 누구든 죽을 수 있는 것이니 요압 너는 우리아의 일 때문에 나에 대해 못마땅하게 여기면서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훌훌 털어버려라. 그리고 계속 맡겨진 전투나 승리로 이끌어라’.

 

    다윗의 악함은 단지 자신의 죄를 숨기려 한 것 정도가 아니라 자신의 드러난 죄에 대해 아는 자들을 두려워함 없이, 누구도 비판하지 않고, 덮고 가도록 만든 것입니다. 그는 간음한 것을 넘어 자기가 죄를 지어도 그 누구도 자신의 권력에 도전할 수 없다는 확신을 가졌던 것입니다. 다윗은 밧세바에게 접근할 때부터 대범하게 죄를 지었습니다. 11:3절을 보면 “다윗이 사람을 보내 (목욕하는) 그 여인을 알아보게” 했습니다. 또 4절을 보면 “다윗이 전령을 보내어 그 여자를 자기에게로 데려오게” 했습니다. 또 5절을 보면 “그 여인이 임신하매 사람을 보내 다윗에게 말하여 내가 임신하였나이다”라고 알렸습니다. 이미 여러 사람들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다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아가 죽은 것도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모두가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모두가 진실을 다 알고 있어도 아무도 자신을 비판할 수 없고, 왕권에 별 문제가 없음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힘으로, 권력으로 누르려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안목, 하나님의 주권을 중요시하며 위기를 넘겨온 다윗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습니다. 그러면 다윗이 그동안 완벽하다가 편안해지니까 갑자기 와르르 무너진 것입니까? 아닙니다. 다윗은 원래 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그 점을 부각시키고 지적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통해 이스라엘을 세우시기 위해 참고 넘어가신 것입니다. 다윗은 왕으로서 아내를 많이 가진 것이 이미 허물어진 부분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사건과 연관된 것을 말하자면 신명기 17:17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왕은 아내를 많이 두지 말라고 하셨는데 다윗은 그 점에서 경솔했습니다. 다윗이 성전을 짓겠다고 했을 때 하나님이 지적하신 문제였던 전쟁으로 피를 많이 흘린 죄와 함께 그 시대 왕들의 일부다처제 풍습을 그는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러한 죄가 오늘 본문에 와서 터진 것입니다.

 

    다윗은 한 때 하나님이 주신 여유와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처음에는 은혜 베푸는 일을 했지만, 이제는 극악한 일을 하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앞의 9장 10장은 다시 다윗의 험난한 인생이 시작되는 분기점이 된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범죄는 다시 험난한 삶을 겪는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다윗의 그런 사특함은 우리에게도 똑같이 있습니다. 고난이 사라지고 분투해야 할 삶의 과제가 사라지면 방심하게 됩니다. 기회와 능력만 있으면 죄를 지을 수 있는 대로 죄 짓는 것이 인간입니다. 가진 권력과 재력이 클수록 죄도 크게 짓습니다. 내가 이만큼 이룬 것이 있고, 사람들을 위해서 한 것이 있으니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이 정도는 해도 되겠지 하는 생각이 죄에 대한 경각심을 떨어뜨립니다. 다윗처럼 드러난 죄에 대해서도 대범해집니다. 사람들이 알아도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잘못을 인정하고 고치기보다 자신의 것을 잃지 않기 위한 조치를 하는 것에 더 재빠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서 거듭나는 것은 죄와 무관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나의 멸망을 대신 해결해 주신 것이고, 이전에 몰랐던 나의 죄를 죄로 알게 된 것이고, 죄를 미워하게 되는 것이고, 죄를 이길 능력을 얻게 되는 것이지 죄를 안 짓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는 죄와 부단히 싸우는 일을 해야 합니다. 죽을 때까지 그 일을 계속해야 합니다.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게 되거나, 죄를 지어도 죄가 아닌 것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또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무엇인가를 이뤘다는 것은 죄를 좀 지어도 되는 마일리지나 쿠폰을 얻은 것도 아닙니다. 이만큼 잘했으니까 죄를 지어 좀 깎아먹어도 평균이 유지되겠지 하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고린도전서 10:12절의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라고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도는 미래로 갈수록 내가 무엇을 이루리라, 더 흠 없고 깨끗한 자로 완성되리라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그런 마음을 가질수록 나중에 가면 거짓된 영적 성취욕에 사로잡혀서 그동안 잘했으니 이제 조금은 나의 원대로 해도 되겠지하는 생각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늙고 힘이 없어서 아무리 할 일 없게 되어도 부단히 자기 마음의 죄와 싸우는 일은 그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가 자기 죄에 대해 민감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이 낮아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도의 인생은 점점 낮아져서 자신의 깊은 곳을 보게 되는 방향성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내 모습이 안 보인다고 말하는 것은 나의 죄를 더 이상 볼 수 없게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알수록 우리의 죄를 더 깊이 보게 되고, 그것을 덮으시는 그리스도의 은혜가 더 크게 깨달아져야 마땅합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수록 자신의 더 깊은 죄성을 발견하게 될 것을 예상해야 합니다. 신앙이 성숙할수록 외적인 인품과 행위가 고결해지기는 하겠지만, 자기 내면에 대한 인식이 외부의 평가로 인해 전혀 자만하지 않을만한 깊은 죄에 대한 자각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당신들이 나를 어떻게 보든 나는 내가 두렵습니다.'하는 말이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이전에 몰랐던 깊고도 교묘한 나의 죄성을 깨닫고 놀랄 각오를 해야 합니다. 자신을 죄인 괴수라고 말한 사도 바울처럼 말입니다. 세상이 보기에,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괜찮은 나'일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자신을 볼 때 정작 중요한 영혼의 문제에 있어서는 인간적으로 아무것도 안심할 것을 없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내 안에 계속 살아나는 죄의 욕망을 덮고도 남을 하나님의 은혜를 항상 간절히 구하는 성도들이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