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하 12장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고 그 남편 우리아를 죽였습니다. 절대권력으로 보이는 다윗의 악행에 누구도 항의하지 못했지만 하나님만은 침묵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 나단은 다윗에게 이야기 하나를 했습니다. 그것은 양과 소가 아주 많은 한 부자와, 반대로 재산이라고는 가족처럼 기르는 암양 새끼 한 마리가 전부인 가난한 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 부자에게 손님이 왔는데 부자는 수많은 자기 양과 소는 놔두고 가난한 자의 양을 빼앗아 대접했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그 이야기를 듣자 분노를 내면서 그런 악한 자는 죽어야 마땅하고, 그 양에 대해 네 배를 배상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나단이 말했습니다. 그 부자가 바로 다윗 당신이다. 다윗은 자신의 죄 때문에 하나님이 예고하신 징계들이 일어나는 것을 겪게 됩니다. 다윗의 죄로 인해 밧세바가 낳은 아이가 심하게 아팠고, 다윗은 아이를 위해 금식하며 간구했지만 아이가 결국 죽게 됩니다. 그리고 다윗과 밧세바의 사이에서 솔로몬이 태어납니다.
나단이 전한, 다윗을 책망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강조된 것은 다윗이 하나님을 업신여겼다는(9, 10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나라와 함께 많은 부와 아내들을 주셨는데 다윗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자기 힘으로 악을 행하면서 여인을 취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모욕한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이 금하신 것, 즉 간음과 살인을 저질렀기 때문에 죄이기도 하지만 근본 문제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을 불충분하게 여기고 스스로 욕망을 해결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는 불신입니다. 현재 자신에게 허락하신 것으로 자족하고 감사하면서 하나님의 주권에 순종해야 하는데, 자신의 타락한 본성에 근거한 탐욕을 권리로 여기면서 악을 행한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보다 자기를 우선시하며 제1계명을 어긴 것입니다. 그것은 열 번째 계명이 금지하는 탐욕으로부터 여섯 번째 계명이 금지하는 살인까지 역으로 거슬러 모두 연쇄적으로 다윗에게 일어나게 했습니다.
다윗은 나단의 말을 듣고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라는 짧은 말로 잘못을 시인했습니다. 우리는 다윗이 사악한 죄를 지은 것에 비해 그의 반성하는 말은 너무 간단한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잘못이 모두 드러난 상황에서 진정한 회개는 장황한 것이 아니라, 정직하게 시인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잘못을 시인하는 말을 할 때에 길게 설명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런 말은 길어질수록 책임을 덜기 위한 변명을 추가하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아시는 대로, 나단을 통해 지적하신 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그대로 인정하는 말 밖에는 더 할 말이 없었던 것입니다. 다윗이 짤막한 말로 끝내고 자리를 피하고 싶은, 회피 의도로 짧게 말한 것이 아니라면 그 단순한 고백은 부인할 수 없는 자기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처분을 받아들이겠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사울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핑계하고, 합리화했습니다. 다른 것으로 가리려고 했습니다. 다윗은 그런 점에서 달랐습니다.
다윗이 그렇게 죄를 시인하자 나단은 하나님께서 다윗의 죄를 용서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다윗이 한 고백의 진정성을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용서하셨는지를 나단이 어떻게 알았을까요? 다윗이 죄를 고백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 말을 들으시고 나단에게 즉시 말씀하신 것인지 아니면 나단이 다윗에게 올 때 이미 앞의 죄를 지적하는 내용들과 함께 다윗이 죄를 시인할 것과 하나님께서 용서하신다는 말까지 다 듣고 온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쨌든 회개하는 감정적 깊이, 눈물의 양, 애통한 시간의 길이가 참된 회개의 요건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하느냐가 용서와 구원의 여부를 결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슬퍼하고, 죄책감 때문에 고행을 하고, 선행을 한들 죄를 가볍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릴 수 없습니다. 용서는 용서를 베풀자의 주권에 달린 것입니다. 용서를 구하는 자는 겸손히 자백하며, 처분을 기다릴 뿐입니다. 그런 이해와 깨달음을 전제로 우리의 자백과 믿음은 단순할 수밖에 없습니다.
죄인을 구원하는 복음의 내용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표면적으로만 이해하면 값싼 것으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기독교 신앙 안에서 우리가 용서를 받는 것, 구원을 얻는 것은 아무나 간단한 말로 고백만 하면 얻는 것처럼 여겨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제대로 경험하지 않은 자들에게 ‘믿음으로’라는 심오한 영적 원리가 자기기만적인 죄책감 씻기로 전락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하는 무능한 죄인의 단순한 고백을 의미하는 믿음의 교리는 그런 편의주의적인 인간의 발상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죄인이라는 인정밖에는 할 말이 없기 때문에 단순한 것입니다. 그 단순한 고백이 진실하다면 ‘나’라는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지적이 옳기 때문에 자백하고, 처분을 기다린다는 의미가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는 나를 죄인이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심판과 영원한 저주를 마땅하다고 여기는 자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결정에 불만을 제기할 수 없습니다. 나는 영원한 멸망만을 기다리는 죄인인데 예수 그리스도라는 놀라운 은혜의 해결책을 주셨으니 그저 믿는 것입니다. 죄인인 나에게 살 길이 생겼으니 그 하나님의 방법을 의지한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다른 길은 없으니 “예”하고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할 말이 없습니다. 그것은 쉽고, 값싸고, 편리한 종교적 속죄 교리가 아니라 절대적이신 판단자 앞에서 감히 할 말이 없는 자의 고백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다윗은 그렇게 죄를 용서 받았지만 그것으로 모든 것이 마무리 된 것이 아닙니다. 다윗 대신 아이가 고통 받았습니다. 죄용서에는 상응하는 희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보이신 것입니다. 반드시 누군가가 죄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간음하고 우리아를 죽인 다윗은 처벌 받지 않았지만, 나단의 예고대로 다윗 대신 희생 당하는, 대가를 치르는 고통을 당해야 했던 것입니다.
다윗은 아이가 심하게 앓자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다윗은 나단을 통해 분명히 그 아이가 죽을 것이라고 들었는데,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걱정하는 원로들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밤새 금식하면서 엎드렸습니다. 그런데 칠일 만에 아이가 죽자 다윗은 언제 그랬냐는 듯 몸을 씻고 음식을 먹었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보통 사람들 같으면 그 반대로 사람이 죽은 다음에 더 슬퍼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하들도 이상히 여겨서 아이가 살아있을 때에는 금식하면서 울더니, 아이가 죽은 후에 금방 태도가 바뀐 이유가 무엇이냐고 다윗에게 물었습니다. 다윗은 혹시나 하나님께서 자신을 불쌍히 여기셔서 아이를 살려주실까 해서 그랬는데, 이제는 아이가 죽어서 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 이뤄진 것을 확인했으니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징계의 과정에서도 하나님을 붙잡았습니다. 자기를 버리신 것 같은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을 붙잡았습니다. 절대주권자인 하나님의 징계로서 결정된 일이니 그 아이가 죽겠거니 생각하면서 가만히 지켜보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죄가 무엇인지를 어느 정도 이해했던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지만, 인간의 죄를 즉결처분 하지 않으시고 왜 시간 속에서, 과정을 통해 다루십니까? 그저 죄를 지었으니 미워서 버리시려고, 끝내시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시고,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죄를 다루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런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의지하고 기대하면서 혹시라도 은혜를 주실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매달린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처분, 결말은 엄격했습니다. 아이가 죽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간구를 들어주시지 않고, 원래 예고하신 대로 엄격하게 실행하신 하나님에 대해 불만을 갖지 않았습니다. 결과를 받아들였습니다. 계속 슬퍼하는 것은 아이의 죽음을 예고한대로 실행하신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니 슬픈 기색을 내려놓았던 것입니다. 은혜를 구할 기회가 있을 때 성실하게 하나님 앞에 엎드리며 구한 자는 기대와 다른 무서운 결말이 내려졌을 때도 그것을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어떤 고통도, 대가도 치르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용서하셨다고 말씀하셨지만 무서운 징계들을 내리신 것처럼, 세상을 사는 동안 누구나 겪는 고통 외에도 성도는 구체적인 범죄에 대한 징계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지만 죄가 무엇인지를 알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어떻게 여기시는지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또 그런 잠깐의 징계는 그것과 비교할 수 없는 영원한 형벌을 면케 하신 은혜가 얼마나 큰지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7장 14절에서 다윗에게 언약을 주실 때, “그가 만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은총을 빼앗지는 아니하리라”의 말씀을 다윗부터 경험케 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그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 징계가 저주가 아니라 앞에서 말한 목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우리가 몸소 당해야 하는 완전하고 영원한 저주를 예수님께서 대신 받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이 땅에서 겪는 고통, 징계는 그 완전한 용서를 전제로 허락되는 연단의 과정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 예수님 때문에 우리 인생 속에서 겪는 고통이 우리의 죄에 비하면 지극히 작은 교훈에 불과한 것임을 알지 못한다면 인생의 고통과 징계 속에서 절망하거나, 하나님을 불신할 것입니다. 또 회개를 한다해도 종교적 분위기를 진지하게 꾸미기 위한 순서, 양심의 껄끄러움을 제거하기 위한 형식, 자신의 겸손을 자랑하기 위한 위선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바리새인의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다윗의 단순한 회개도 그런 것이라고 오해하게 됩니다. 우리의 회개는 그저 심판을 피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죄인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옳으신 것을 인정하고, 나에 대한 하나님께 판단을 맡기는 태도에서 나와야 합니다. 구원하신다고 하면서 왜 고난을 주시는 것인가를 가지고 불만을 품지 않을 수 있습니다.
죄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이러한 믿음이 있을 때 우리가 인생의 채찍과 고통을 겪으면서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을 수 있고, 반대로 ‘하나님의 주권이니 내가 뭘 한들 소용있겠어’라는 핑계로 기도도 하지 않고, 체념하며 무력하게 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다윗처럼 바른 믿음이 있는 자가 징계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를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마옵소서(합3:2)”하고 간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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