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죄를 다루지 못하는 다윗 (사무엘하 14-15장)

따뜻한 진리 2020. 12. 27. 18:31

무엘하 14-15장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다윗의 아들 압살롬은 여동생 다말을 추행한 이복형 암논을 죽이고 다른 지역으로 피신했습니다. 이 일로 다윗은 갈등에 빠집니다. 압살롬을 아들로서 사랑하는 마음과 후계자로 세워야 하는 정치적인 문제와 반역할 가능성 때문에 다윗은 쉽게 결정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요압이 다윗의 그런 심정을 알아채고, 드고아의 지혜로운 여인 하나를 불러서 어떤 일을 꾸밉니다. 그리고 그 여인을 다윗에게 보냅니다.

 

    그 여인은 요압이 지시한 각본대로 남편 없는 과부처럼, 진짜 자기 일인 것처럼 다윗 앞에서 연기했습니다. 자기에게 아들 둘이 있었는데 그 중 형이 동생을 죽였고, 그 사실을 안 지역사람들이 율법대로 하겠다며 그 살인자 형을 죽이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마저 죽는다면 자신은 모든 것을 잃기 때문에 다윗이 그것을 막아주기를 간청했습니다. 다윗이 명령을 내리겠다고, 이제는 가보라고 했는데도 그녀는 재차 여호와 하나님을 언급하면서 자신의 아들이 죽을까봐 두려우니 확실한 결정을 해달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 여인이 어떤 이야기를 꺼냈는가 하면, 자기 아들을 죽이려는 사람들의 위협은 다윗이 압살롬을 죽이려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압살롬이 왕궁으로 돌아오지 못하면 왕위 계승이 안 되어 나라가 위태로워지고, 백성들도 죽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다윗은 눈치를 채고 그 여인이 요압이 보낸 것임을 알게 됩니다. 다윗은 압살롬을 너무나 보고 싶었기 때문에 그 여인이 속인 것을 알았지만 마음이 동하여 압살롬을 데려오기로 합니다.

 

    압살롬은 결국 다윗의 허락으로 요압을 통해 예루살렘으로 오게 됩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를 왕궁에 찾아오지 못하도록 가택연금으로 격리시킵니다. 25절부터 27절에는 압살롬의 탁월한 외모를 말하는데, 압살롬에 대해 칭찬할 것이 외모밖에 없음을 의미합니다. 그의 내면에는 하나님의 기준에서 선한 것이 없었다는 것, 즉 사울과 유사한 사람임을 우리에게 넌지시 알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압살롬의 긴 머리는 그 외모를 더욱 특별하게 했지만 나중에 그가 죽는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그렇게 자랑할 것이라고는 외모밖에 없는 자에 대한 묘사에 이어서 그의 내면의 모습, 인간됨이 여러 사건 속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압살롬은 가택연금에 처한 지 이 년이 되자 요압을 압박해서 아버지 다윗에게 선처를 요구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요압이 대꾸를 안 하자 부하들을 시켜서 요압의 밭에 불을 지르게 합니다. 압살롬은 그런 성격의 사람이고, 그런 식으로 상대를 다루는 인간입니다. 그래서 결국 요압은 따지러 왔다가 압살롬의 불만을 듣게 되고, 요압의 중재로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과 어색한 화해를 하고 풀려납니다.

 

    그렇게 압살롬은 자유로 얻지만 아버지를 흠잡고 다닙니다. 사년 동안 백성들에게 아버지를 무능한 사람이라고 인식시키고, 상대적으로 자신이 백성을 위한 왕이라고 선전하고 다녔습니다. 그렇게 어느 정도 자신의 지지기반이 마련되었다고 판단한 압살롬은 헤브론으로 떠납니다. 그는 아버지 다윗에게 자기가 하나님께 맹세한 것이 있어서 헤브론으로 간다고 했지만 그곳에서 자기 세력을 모아 반란을 일으킵니다. 그 소식을 들은 다윗은 피신하고 압살롬은 예루살렘을 점령합니다. 압살롬은 계략이 뛰어난 아히도벨의 제안대로 예루살렘 성에 남겨진 다윗의 후궁들과 동침하였고, 다윗 왕을 기습 공격하여 죽이려 했습니다. 압살롬은 아버지를 대항했습니다. 압살롬은 외모는 준수했던 사람이었지만, 그런 일을 저지른 인간이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압살롬이 이렇게 주도면밀하게 준비하고, 결국 반란을 일으켜 아버지를 모욕한 행위들을 한 것은 왕권에 대한 욕심과 아버지 다윗에 대한 실망감 때문에 복수를 하고자 한 것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 같습니다. 다윗의 죄가 압살롬의 왕권에 대한 탐욕을 드러내고 그것을 얻기 위한 그 사악한 반역에 정당성을 부여해준 것입니다. 죄를 지은 다윗 같은 아버지는 존경할 필요가 없다고 여기는 악한 마음이 그를 사로잡은 것입니다.

 

    이번에는 다윗을 생각해보십시오. 다윗은 아들에게 반역을 당하면서 무엇을 느꼈겠습니까? 신하나 정적에게 반역을 당해도 힘들 것인데 아들이 반란을 일으켜 자신을 죽이려고 했으니 무척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다윗은 사울 때문에 겪었던 고생스런 피난생활을 다시 해야 했습니다. 이상한 것은 다윗이 반란을 일으킨 압살롬을 충분히 제압할 정치력과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성 예루살렘은 전략적으로 우위에 있는 요새였습니다. 그런데도 다윗이 예루살렘을 버리고 도망친 이유는 자기 죄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로 압살롬에게 왕권을 뺏기게 된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과 자기 아들 압살롬을 살리기 위해서 그랬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압살롬과 싸우면 전투 중 압살롬이 죽게 될 것이고, 다윗이 예루살렘에 남은 채로 압살롬에게 권력을 넘겨줬어도, 다윗의 부하들이 충성심 때문에 압살롬을 암살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부하 요압이 아브넬을 제멋대로 죽였던 것처럼 말입니다. 실제로 요압은 나중에 압살롬을 죽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순순히 자리를 비운 것입니다.

 

    그런데 압살롬은 그런 아버지의 사랑을 알지 못합니다. 그는 아버지가 자신을 충분히 죽이고도 남을 장수들을 데리고 예루살렘을 떠난 것이 어떤 의미인지 몰랐습니다. 혹 압살롬이 아버지의 사랑을 알았을 수도 있겠지만 그가 행한 일들을 보면 아버지의 사랑을 인정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은 자기 죄 때문에 집안에 고통이 있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예고를 들었고, 그것이 실현되는 과정에서 압살롬을 보호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사랑은 압살롬의 깨달음과 변화를 가져오기보다 더 많은 죄를 저지를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이렇듯 부모의 사랑과 희생마저도 자녀의 죄와 고통을 완벽히 막지 못합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아버지의 왕위를 빼앗으려는 압살롬을 통해 왕이신 하나님을 끌어내리고 자신이 왕 되려고 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런 반역적 행위는 사탄에게서 온 것이고, 아담으로 시작해서 온 인류가 하나님에 대해 보이고 있는 태도입니다. 사무엘서는 이미 왕이신 살아계신 하나님을 무시해 온 이스라엘을 줄곧 이야기해 오지 않았습니까? 여기서도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이 비록 죄를 지었지만 압살롬이 자기 마음대로 왕위를 가져갈 수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왕에게 기름 부어서 세우시는 분이 하나님이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아는 신하들과 백성들은 다윗과 함께 고생스런 피난길을 떠났습니다. 다윗의 왕위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분명히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자였지만 사울보다 좀 더 나은 자였을 뿐이고,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 때문에 그의 죄에도 불구하고 쓰임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비록 흠이 있는 다윗이었지만 많은 자들이 그에게 충성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따르는 예수님은 다윗과 비교할 수 없는, 어떤 흠도 없으신 분이십니다. 세상의 모든 매혹적인 것들은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지만 반드시 우리를 실망시키고 허무함을 맛보게 합니다. 사울이나 압살롬이 외모로 사람들의 마음을 쉽게 사로잡았지만 결국 고통을 주었고, 다윗은 내면과 행실이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자였지만 완전한 자는 아니었습니다. 죄로 인해 사람들에게 실망과 고통을 안겨줬습니다. 그의 가족이 그 고통을 겪었고 백성들이 겪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떤 점도 흠도 없으신 분이십니다.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시지 않는 완전한 분이십니다.

 

    또한 예수님은 결코 왕위를 빼앗기지 않으시는 왕이십니다. 다윗은 자신의 높아진 권력으로 죄 짓는 것을 쉽게 여기고, 자기 죄가 문제시 되지 않도록 힘으로 밀어붙이려 했습니다. 그래서 가장 가까운 자기 아들에게 아버지로서, 왕으로서의 권위를 잃었습니다. 그리고 일시적으로 왕권도 빼앗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힘과 권력으로 높아지신 것이 아니라 겸손하게 낮아지셨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힘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목숨을 내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를 높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세상 어느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의 왕좌를 감히 건드릴 수 없습니다. 히브리서 7장이 말하는대로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분이십니다.

 

    또 예수님은 우리를 바꾸는 사랑, 능력 있는 사랑입니다. 아들을 향한 다윗의 사랑은 압살롬을 변화시키지 못했습니다. 무능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처지를 바꿉니다. 죄인을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바꿉니다. 다윗의 죄 때문에 다윗의 자녀들이 죽어갔지만, 반대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 때문에 대신 죽으셨습니다. 다윗은 자녀들의 죽음과 죄 앞에서 무력했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끊으시고, 생명을 주셨습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영원토록 사랑하고 따르기에 부족함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가장 좋은 왕이십니다. 어떤 나라나 어떤 지도자나 우리의 마음을 빼앗는 우상보다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고 참된 만족과 위로를 주실 수 있는 유일한 왕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