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하 13:20-29
다윗의 도덕적 실패로 인해 밧세바와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죽었습니다. 그 사건만으로도 큰 징계였는데 또 다른 비극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12장 10절의 “칼이 네 집에서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리라”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현실이 되기 시작합니다.
다윗에게는 아내가 여럿 있었습니다, 그 중 아히노암이라는 여인이 나은 암논이 장자였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다윗의 아내 마아가는 다말이라는 딸과 압살롬이라는 아들을 낳았습니다. 장자인 암논은 이 이복동생 다말을 좋아했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근친혼은 금지되었습니다. 그런데 암논은 다말을 향한 욕정이 가득해서 일종의 상사병 같은 것에 시달렸고, 친구 요나답이라는 자가 병문안을 왔다가 그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 요나답은 매우 간사한 사람입니다. 암논이 요나답 같은 인간을 친구로 두었다는 것은 암논의 수준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나중에 암논이 죽었을 때도 그는 슬퍼하기보다 다윗 앞에서 뭔가 아는 체, 다윗을 위하는 체합니다. 요나답은 암논의 욕망을 해결할 사악한 방법을 제안합니다.
암논은 요나답이 가르쳐 준 방법대로 병든 체 하고 있다가 아버지 다윗이 병문안을 왔을 때 부탁 한 가지를 합니다. 그것은 다말이 해주는 음식을 먹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암논이 앓고 있으니 그 정도는 허락해 줄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다말에게 암논을 병문안 하라고 말합니다. 암논은 다말이 병문안 왔을 때 강제로 다말을 범합니다. 그 과정에서 다말은 암논을 설득합니다. 다말은 압논 당신에게나 나에게나 이런 일이 부끄러운 일이고, 이런 죄를 짓고는 이 나라에서 살 수 없으니 차라리 아버지에게 정식으로 말씀드려서 결혼을 승낙받으라고 말합니다.
다말의 이 말은 다급한 순간에 암논에게 지혜로운 판단을 주는 기회였습니다. 순간의 욕망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암논은 자신의 욕정은 억누르지 않고 다말을 힘으로 억누르고 동침을 합니다. 그는 애초에 사리판단이 안 되는 자였습니다. 다윗의 왕위를 이을 1순위 후계자로서 흠 없이 준비해야 하는데, 그런 대의 보다는 자신의 욕망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암논만 그런 죄를 지을 성향을 가졌던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그런 죄를 지을 수 있는 죄인입니다. 자신의 앞날을 망칠 일들을 저지릅니다. 순간의 욕망 때문입니다. 그것이 죄인 줄 알면서도 이겨내질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인입니다. 스스로 멸망의 길로 가는 죄인입니다. 자기 생명을 해칠 일, 자기 도덕성을 허무는 일을 알면서도 유혹을 이겨내지 못합니다.
그런 암논은 다말을 범한 후에야 죄책감과 수치심, 앞으로 일어날 감당할 수 없는 일에 대한 불안을 느꼈고, 그 때문에 다말에 대한 분노를 품었습니다. 암논의 그 미운 감정은 다말을 원했던 감정의 크기보다 더했다고 15절에서 말합니다. 그래서 암논은 다말을 쫒아냅니다. 오빠인 압살롬은 그 사실을 알게 되지만 지금은 잠잠히 있자면서 다말을 다독였습니다. 다윗도 그 사실을 알게 되자 크게 분노했지만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았습니다.
2년이 흐른 후 당시의 중요한 행사인 양털 깎는 일이 있었을 때에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에게 형제들과 함께 참여하기를 원했지만 다윗은 모두가 다 참석할 필요가 있겠냐고 거절을 하자 그려면 암논이라도 함께 가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다윗은 처음에는 왜 암논이 거길 함께 가야 하냐고 물었지만 압살롬이 간청을 하자 암논을 보냅니다. 그래서 압살롬은 암논이 술 취했을 때에 부하들을 시켜 죽였습니다.
왜 압살롬은 암논을 죽이기 위해 2년을 기다렸을까요? 한 가지 가능성은 암논을 죽이기 위한 가장 적절한 때를 기다린 것입니다. 22절을 보면 압살롬은 증오의 대상인 암논에 대해 잘잘못을 일절 따지지 않았습니다. 암논은 의외로 조용한 반응에 의아했겠지만 자기 일에 대해 주변에서 크게 문제 삼지 않는 줄 알고 서서히 마음이 놓였을 것입니다. 압살롬은 암논의 긴장과 경계심이 자연스럽게 사라질 때를 기다린 것입니다. 또 자신이 암논을 죽일 만한 정치적인 기회를 기다린 것입니다. 자신이 암논을 죽이더라도 누구도 크게 문제 삼지 않을만한 정치적 위치가 될 때를 노린 것입니다. 압살롬은 애초부터 왕이 되기 위해 서열 1위인 암논을 없앨 기회를 노리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동생 다말 사건 때 침묵한 것입니다. 이런 생각이 타당한 이유는 나중에 압살롬이 아버지 다윗을 반역해서 왕이 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압살롬이 2년간 기다린 또 다른 이유는 아버지 다윗이 암논을 처벌할 것을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암논이 다말을 범한 사건을 알게 되었을 때만 크게 분노만 했을 뿐입니다. 다윗은 암논이 지은 죄에 따라 죽였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왜입니까? 암논이 지은 죄가 다윗 자신이 지었던 죄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은 음행을 저질러 놓고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있는데, 감히 암논은 법대로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자신이 이미 부끄러운 상태이니 다른 사람을 탓할 자격을 상실한 것입니다. 아마 암논도 아버지의 그런 점을 이용해서 다말을 범할 때 대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압살롬은 그렇게 암논에 대한 처벌을 기다리다가 결국은 처벌할 자격이 없는, 사건의 원인이 되는 도덕적 붕괴를 제공한 아버지 다윗에 대한 원망을 하면서 2년을 보냈을 수 있습니다.
어떤 의도와 모략이 숨어 있는지 우리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이 비참한 사건의 원인은 다윗의 죄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다윗이 하나님을 업신여긴 대가로 그의 가문에는 수치스런 일과 피흘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의 죄가 영향을 미친 것입니다.
다윗의 죄는 그저 개인적인 죄로서 회개하고, 문제를 정리하면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반성하고, 하나님께 은혜를 얻어 용서받으면 끝나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의 죄가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은 아담의 죄가 전 인류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 지를 부분적으로 경험케 하는 일이었습니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죄성을 가집니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죄를 짓고 싶어하고, 죄의 욕망을 품고 발휘하고자 기회를 노립니다. 그래서 죄짓는 방법을 쉽게 보고 배웁니다. 모방을 합니다. 또 잘 통제해 오다가도 누군가가 죄를 범하면 동기부여를 받아 저지릅니다. 다른 사람이 죄를 지었으니 나도 해도 된다고 합리화합니다. 다른 사람이 저지른 죄가 내가 죄 지을 명목을 제공합니다. 또 어떤 죄를 지은 인간은 그 죄와 유사한 타인의 죄를 다룰 힘을 잃습니다. 그것을 심판할 능력을 상실합니다. 그래서 죄는 점점 증폭됩니다. 뻔히 나의 죄가 영향을 미치는 것을 보면서 손을 쓰지 못합니다.
이렇게 죄는 그것을 판단하는 능력과 저항할 의지를 꺾어버리면서 확장합니다. 우리는 흔히 ‘그것 봐 너도 그러잖아, 왜 나한테 뭐라 그래’라며 상대가 나를 판단하는 자격을 부정하는 것으로 비판을 피합니다. 또 다른 사람이 동일한 죄로 무너지는 것을 보고 ‘나만 나쁜 것이 아니군’하면서 안심하고, ‘너도 나랑 똑같아’하면서 죄책감을 덜어내는 방향으로 계속 갑니다.
언젠가 TV에서 사춘기 자녀에 대한 고민으로 연예인들이 나와서 이야기를 하고, 전문가가 조언을 해주던 일이 있었습니다. 전문가의 결론은 무엇이냐 하면 사춘기 자녀는 그냥 내버려두라는 것입니다. 어떤 방법도 없으니 그냥 놔두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런 사춘기 자녀 때문에 마음고생을 하는 부모들에게 일종의 위안이 되라는 뜻으로 덧붙인 말은, 나중에서 그 자녀가 똑같은 자식을 나아서 동일하게 고통당할 것을 고소하게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흔히 부모들이 자식이 속 터지게 할 때 흔히 내뱉는 말인 ‘너도 나중에 너랑 똑같은 자식 낳아서 길러봐라’하는 내용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것이 죄가 확장되는 현실 앞에서 인간이 하고 있는 일입니다. 손 쓸 수 없는 무력함 속에서 나 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함께 무너지는 것으로 위안 삼는 것, ‘나만 죄인이 아니야’라는 것이 유일한 위로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누군가가 같은 죄인이 되는 것을 기다립니다. 같은 죄를 짓도록 여건을 몰아갑니다.
인간은 이 죄의 악순환을 스스로 끊을 수가 없습니다. 죄가 퍼져가는 비참한 현실에서 헛된 위안을 만들어 낼 뿐이지 참된 위로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궁극적인 개선의 가능성이 없습니다. 이런 비참함 속에서 오직 예수님만이 죄인인 인간의 해답이 되십니다. 다윗이라는 한 사람의 죄가 이렇게 무섭지만, 거슬러 올라가 조상 아담의 범죄는 비교할 수 없이 치명적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과 죽으심은 그보다 더 강력합니다. 타락한 인간을 회복시킬 뿐만 아니라 더 나은 상태로 이끌어가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이었지만, 죄문제를 다스리고 사람의 영혼을 구할 수 있는 일에 대해서는 무력했습니다. 다른 사람을 구원하고, 죄를 다스리기는커녕 그 자신이 죄로 넘어지고, 죄의 영향을 퍼뜨리는 일을 했습니다. 세상 왕은 많은 일을 하는 것 같지만 정작 중요한 문제는 해결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해결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셨습니다. 사람이 죄와 죽음 아래에서 갖는 모든 위로는 헛됩니다. 그러나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 나의 죄가 씻기고,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것을 얻게 될 것이 유일하고 진정한 위로가 됩니다. 죄 아래에서는 우리가 상대에 대한 어떤 기대를 해도 실망하게 됩니다. 또 우리는 누군가가 희생당하고 고통당하는 것으로 우리 자신이 이익을 얻고 생존하는 굴레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 비참함에서 벗어날 길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나와 타인이 새롭게 될 것을 기대하고 소망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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