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하 17장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다윗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 아들 압살롬은 아히도벨의 도움을 받아 중요한 결정들을 내렸습니다. 예루살렘 궁에 남겨진 다윗의 후궁들과 동침하라고 제안한 것도 아히도벨이었습니다. 이어서 본문 17장에서 우리는 아히도벨의 또 다른 계략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다윗이 더 멀리 피하기 전에 급습해서 없애자는 것입니다. 아히도벨의 그 제안에 대해 압살롬과 이스라엘 장로들이 모두 동의했습니다. 그런데 압살롬은 후새를 불러서 그의 의견도 묻습니다. 후새는 누구입니까? 그는 다윗이 보낸 첩자입니다. 그는 피난을 떠나는 다윗과 함께 하려한 친구이지만 다윗은 자기를 따르기보다 압살롬 편인 것처럼 속여서 아히도벨의 모략을 방해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압살롬의 신임을 얻은 후새는 아히도벨과 다른 의견을 내놓습니다. 그의 생각은 다윗 왕이 전쟁을 치른 경험이 많기 때문에 어디 숨어있는지도 모르고 어설프게 추격했다가 전투에 지기라도 하면 군사들의 결집이 흔들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후새는 아직 주도권이 압살롬에게 있으니 더 많은 군사를 모아 막강한 상태가 되면 그 때 가서 압살롬이 직전 이끌고 다윗을 공격해야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다윗을 없앨 수 있고, 강력한 군대를 이끌고 직접 지휘한 압살롬의 모습을 사람들이 보게 되어 정치적으로도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결국 압살롬은 후새의 의견을 채택합니다. 결국 후새의 목적대로 다윗이 안전하게 피신할 시간을 벌었습니다. 후새는 다윗에게 빨리 강을 건너라는 첩보를 보내는데,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의 아들들이 그 소식을 들고 갑니다. 누군가가 예루살렘을 빠져나갔다는 사실을 압살롬이 알게 되고 군사들이 그 둘을 쫓습니다. 그런데 바후림이라는 곳에서 한 여자가 후새가 보낸 두 사람을 숨겨주고 뒤쫓는 군사들을 따돌리게 되어 중요한 소식이 다윗에게 무사히 도착할 수 있게 됩니다.
아히도벨은 자신의 모략이 선택되지 않자 고향으로 돌아가 자살을 합니다. 이는 단지 자존심 때문이 아니라 그의 뛰어난 지혜로 앞으로의 일을 예상할 때 압살롬의 반란이 실패하게 될 것과 다윗의 왕권이 다시 회복될 때 자신이 처벌될 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아히도벨은 어떤 사람입니까? 아히도벨은 우리가 잘 아는 밧세바의 할아버지였습니다. 원래 아히도벨은 다윗왕의 자문 역할을 했습니다. 그가 얼마나 뛰어난 전략가였는가 하면, 16:23에서 “아히도벨이 베푸는 계략은 사람이 하나님께 물어서 받은 말씀과 같은 것이라 아히도벨의 모든 계략은 다윗에게나 압살롬에게나 그와 같이 여겨졌더라”라고 말합니다. 아히도벨의 모략은 다윗에게 있어서나 압살롬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으로 여겨질 만큼 그는 판단력과 지혜가 뛰어난 인물이었습니다.
그토록 지혜로운 아히도벨이 왜 다윗을 배신했을까요? 그것은 그가 다윗의 권력이 약화되고 있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다윗의 도덕적 추락과 압살롬에 대한 지지 여론을 그는 감지했던 것입니다. 그는 더 이상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 하시지 않는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런 인식은 아히도벨 뿐만 아니라 압살롬 편에 선 자들이 공통적으로 가진 생각이었습니다. 시편 3편은 다윗이 압살롬을 피할 때 쓴 것인데, 2절에서 다윗은 "많은 사람이 나를 대적하여 말하기를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얻지 못한다 하나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윗도 자신이 어떻게 여겨지고 있는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아히도벨은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나님이 말씀하신 약속을 근거로 다윗을 판단하지 않고, 반대로 다윗의 행위와 상황 변화를 근거로 하나님을 판단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말씀들, 함께 하신 증거들도 모두 의심해버린 것입니다. 그러니 다윗이 넘어지고, 사람이 보기에 탐탁하지 못하고, 사람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니까 하나님도 버리셨다고 판단하게 된 것입니다.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다윗을 용서하셨다고 말씀하신 하나님을 믿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아히도벨은 지혜와 판단력이 뛰어난 사람이었지만 의리나 충성심이 없었습니다. 그는 자기 능력을 자기 이익과 명예를 위해 사용할 뿐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가 압살롬에게 내놓은 모략이 무시되고, 다윗이 유리한 상황이 되자 그의 선견지명은 다윗의 왕권이 회복될 것을 전망할 수밖에 없었고 다윗이 돌아오면 배신자인 자기가 어떻게 될지 알기 때문에 미리 죽은 것입니다.
아히도벨이 다윗을 배반하고 압살롬에게 간 것은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고 예수님을 죽이려는 대제사장들에게 간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 둘은 스스로 목숨을 끊은 마지막 모습도 유사합니다. 유다는 오랫동안 예수님과 동고동락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여러 이적으로 확인했습니다. 그러나 유다에게는 그 이적들이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믿는 계기가 아니라 자신이 생각한 메시아로서 활약할 능력이 될 만하다고 여기는 근거가 되었을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자기 입으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시고, 그 일을 위해 마지막 일들을 행하실 때 유다는 더 이상 자신이 기대한 예수가 아니라고 결정 내린 것입니다. 유다는 예수에게서 하나님의 뜻을 찾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뜻이 그 위에 머물러 있는 자라면 이러이러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사람의 판단이 예수를 버리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구약의 말씀들을 증거로 자신이 누구이신지, 왜 십자가의 길을 가야하는 지를 가르쳐주셨는데도 그것이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갖게 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죽이려는 상황이 압박해오고, 예수님은 그 위협에 저항하며 메시아로서 능력을 나타내기보다는 죽겠다고 하시니 유다는 함께 할 이유를 발견하지 못한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유다에게는 하나님의 뜻이 떠난 자처럼 보이게 했던 것입니다.
아히도벨이 다윗을 배반하였지만 후새는 끝까지 다윗을 따랐습니다. 그저 수동적으로 따랐을 뿐만 아니라 위기에 처한 다윗을 위해 목숨을 걸고 압살롬 아래로 들어가 아히도벨의 계략을 무너뜨렸습니다. 후새는 하나님의 뜻을 신뢰했던 것입니다. 다윗이 비록 실패한 죄인이지만,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하신 말씀, 다윗에게 은혜 베푸시는 것을 신뢰한 것입니다. 그래서 후새는 아히도벨처럼 그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윗 곁에 머물렀던 자가 아니라 다윗을 진정 사랑하는 친구였던 것입니다. 아히도벨이나 후새나 다윗을 가까이서 도왔던 자들이지만 15:37에서 성경은 후새만을 “다윗의 친구”라고 소개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15:13)라고 말씀하시면서 자신을 진정으로 믿고 헌신하는 관계를 친구로 비유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가룟유다가 병정들과 함께 예수님을 잡으러 왔을 때 예수님께서 유다에게 일부러 ‘친구’라고 칭하신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마지막까지 유다가 예수님과 어떤 태도로 관계를 유지해왔는지를 반성하게 하신 것입니다.
사람의 생각과 판단은 하나님을 아는 것,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 아래에서만 지혜가 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세상 물정을 많이 알고, 민심을 잘 알고, 탁월한 통찰이 있어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방향과 무관한 자기 길을 모색하는 자의 지혜는 세상이 놀랄만한 선견지명과 판단력이어도 무용지물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탁월한 지혜는 하나님의 주권 아래 머무르는 겸손입니다. 아히도벨처럼 나의 이익과 안전과 명예를 추구하는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을 더 알기 위한 자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자세를 잃지 않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14절을 보면 “이는 여호와께서 압살롬에게 화를 내리려 하사 아히도벨의 좋은 계략을 물리치라고 명령하셨음이더라”라고 말합니다. 후새의 의견이 압살롬에게 받아들여지고, 그것이 성공한 이유는 후새가 아히도벨보다 똑똑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후새를 통해 일하셨기 때문입니다. 압살롬이 후새가 자기편이 되겠다고 왔을 때 믿었던 것, 또 아히도벨의 전략만 듣지 않고 후새의 의견도 들어볼 마음이 있었던 것, 다윗이 신속히 피신해야 한다는 소식을 전하러 간 제사장의 아들들이 한 여인의 도움으로 무사히 다윗에게 도착한 일, 그리고 다윗이 안전하게 피신할 수 있게 된 것 모두가 하나님이 역사하신 일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끝까지 사랑하신 것을 보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신뢰했던 후새를 통해 하나님이 일하신 것입니다.
다윗의 진정한 친구는 누구입니까? 후새입니다. 그러나 더 높은 차원에서 다윗의 친구는 누구입니까?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진정한 친구는 이익이나 정당성보다 관계성, 의리를 우선시합니다. 그래서 때로 친구를 잘못 사귀면 망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비록 중대한 실수를 했지만 그래도 그의 중심을 아시면서 용서해주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다윗과의 약속을 끝까지 실행하시는 진정한 의리를 하나님께서 보여주고 계십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실망시키지만 하나님은 다윗을 끝까지 붙잡고 인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자기를 팔아서 넘긴 제자와의 마지막 대면에서도 예수님은 그를 ‘친구’라고 부르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그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우리 같은 죄인을 친구로 삼으셨기 때문에 주님은 고통과 죽음을 당하셨고, 우리가 은혜를 입게 된 것입니다.
사탄은 에덴에서부터 이 친밀한 관계에 불신을 불어넣어왔습니다. 거룩하고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이기적인 왕으로 속였습니다. 결국 사탄은 인간들을 자기 종이 되게 했고 비참함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우리에 대한 구원의 계획을 이루고 계십니다. 사탄은 그런 하나님의 은혜마저 우리가 불신하게 하는데 주로 현재의 고통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이 과연 나를 구원하시는 것이 분명할지 불신하게 합니다. 마치 욥이 육체적인 고난 때문에 하나님을 저주하고 떠나게 유혹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고통은 오히려 그 관계를 증명하는 과정이 됩니다. 하나님 편에서나 우리 편에서나 신뢰와 충성을 확인하는 기회가 됩니다. 그리고 사람이 하나님을 실망시킬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끝까지 붙잡고 인도하십니다. 우리 주님은 그런 변치 않는 친구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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