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하 18장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다윗의 군대와 압살롬의 군대가 싸우게 되었습니다. 다윗이 자기도 전쟁에 나가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밧세바와 관련된 지난 잘못이 왕으로서 군대를 지휘하지 않고 직무유기를 하다가 발생한 일이기 때문에 자신의 과오를 만회하고자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부하들은 다윗을 전쟁터에 나가지 못하도록 말렸습니다. 이 전쟁은 군대를 쓰러뜨려서 정복하기 위한 전쟁이 아니라 상대의 우두머리를 죽이기 위한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압살롬의 군대도 그것을 노릴 것이 틀림없기 때문에 다윗의 위치가 드러나면 그 쪽으로 적들이 집중되어서 수적으로 불리한 다윗의 군대가 위기에 처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게다가 다윗이 전쟁터에 함께 있다면 다윗의 신하들은 적장 압살롬을 죽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신하들은 “왕은 우리 만 명보다 중하시오니”라는 말로 다윗을 지키는 것이 전투의 이유라는 것을 말했습니다. 그들은 다윗이 다시 다스리는 나라가 되게 하려고 자신들의 목숨도 내놓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전쟁터로 가는 군사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위하여 젊은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우하라” 그 말을 모든 자들이 다 들었습니다. 다윗의 이 말은 군사들을 혼란케 하는, 사기를 떨어지게 하는 말이었습니다. 그 전쟁에서는 빠른 시간 내에 압살롬을 죽여야만 합니다. 전쟁만 이기고, 압살롬은 살려두라는 다윗의 말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압살롬이 빨리 제거 될수록 피흘림이 적고, 다윗 자신도 살 수 있습니다. 다윗도 그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도 다윗의 입에서는 아버지의 심정이 우선 표출되었습니다.
다윗의 군대가 수적으로 불리했지만 하나님이 도우셨습니다. 8절을 보면 압살롬의 군사들이 수풀에서 많이 죽었다고 하는데 원문상 ‘칼이 죽인 백성보다 숲이 죽인 백성이 더 많았다’라는 뜻입니다. 아마도 다윗의 군대가 숲의 지형을 이용해 압살롬의 군대를 괴멸했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런데 사무엘서의 저자는 그것을 숲, 즉 나무들이 죽인 것이라고 묘사함으로써 하나님의 개입하심을 떠올리게 합니다. 압살롬의 군사들이 나무들에 의해 죽임 당하듯 압살롬도 다윗의 부하들과 마주쳐 달아나다가 나무에 머리가 매달리게 됩니다. 9절에 압살롬의 머리가 상수리나무에 결렸다고 하는데, 이것이 그의 길고 아름다운 머리카락이 결렸다는 것인지 목이 걸린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14장에서 압살롬에 대해 칭찬한 그의 대단했던 외모가 죽음을 가져오는 구실이 된 것입니다.
압살롬이 나무에 매달려 있다는 것을 전해들은 요압은 그 병사에게 ‘왜 압살롬을 곧 바로 쳐 죽이지 않았느냐 그랬다면 상을 내렸을 것인데’라고 말했지만 그 병사는 지혜로운 자였습니다. 만약 그 병사가 압살롬을 죽였다면 다윗의 부탁을 따르지 않은 책임을 자기가 져야 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압은 압살롬을 죽여야 하지만 그 곤란한 일을 누군가가 저질러버리기를 바랐는데, 그 마음을 들킨 것입니다. 그래서 요압은 ‘나는 너랑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다.’라고 회피하고는 자기가 압살롬을 창으로 찔러 죽였습니다.
압살롬이 죽었으니 이제 그 소식을 다윗에게 전해야 합니다. 그런데 요압은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알린 자가 맞이했던 안 좋은 결과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압은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가 승전소식을 전하겠다고 했을 때 말렸습니다. 대신 구스 사람을 보내겠다고 했는데도 아히마아스가 계속 조르자 요압은 결국 허락했고, 아히마아스는 구스 사람보다 빠른 길로 가서 다윗에게 먼저 도착합니다. 그가 다윗에게 승리의 소식을 알리자 다윗은 하나님께 감사하면서도 압살롬의 안부를 물었습니다. 그런데 아히마아스는 자신이 떠날 때 어떤 큰 소동이 있었다고 말함으로써 다윗이 마음의 준비를 하게 합니다. 그리고는 구스 사람이 도착했을 때 다윗은 압살롬의 죽음을 알게 됩니다. 다윗이 통곡하고 슬퍼하자 다윗을 위해 싸운 백성들은 상심에 빠졌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왕과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는데 정작 왕 다윗은 압살롬의 죽음을 슬퍼하니 허망했던 것입니다. 요압이 그 문제를 다윗에게 지적했습니다.
다윗이 범죄 한 이후 있었던 일들이 무엇입니까? 밧세바가 나은 아이의 죽음, 암논의 추행과 죽음, 그리고 아버지에 대해 불만을 압살롬의 반역과 죽음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징계가 실행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이 다윗을 도우려고 목숨을 걸고 많은 희생을 치렀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인 요압을 생각해보십시오. 다윗이 압살롬을 그리워할 때 압살롬을 데려오게 한 사람이 누굽니까? 요압입니다. 그런데 그 압살롬이 반역을 해서 다윗이 큰 고통을 당하지 않습니까? 또 반역으로 위기에 처한 다윗을 보호하겠다고 오늘 본문에서 압살롬은 죽인 것도 요압입니다. 요압은 다윗을 위했지만 결국 하나님께서 다윗을 징계하시는 도구, 다윗이 큰 슬픔을 당하게 하시는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징계하시겠다고 하신 것을 사람이 막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죄로 인한 고통스러운 징계를 받는 중에도 다윗을 진정 위할 수 있는 존재는 하나님이셨고, 백성들이 지지를 잃은 다윗 대신 압살롬을 세워서 자기 나라 이스라엘을 위한다고 했지만 이스라엘의 앞날을 책임지는 것도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래서 고난을 허락하신 분도 다윗이 살아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도록 인도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다윗과 끝까지 함께 했던 사람들이 다윗을 위하고, 다윗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려고 목숨을 바쳐 충성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결정적인 순간들에 하나님의 손길과 신비로운 개입들이 있었음을 본문은 강조합니다. 압살롬이 후새의 의견에 귀 기울이게 된 것, 후새의 첩보를 들고 간 제사장의 아들들을 보호해준 한 여자, 오늘 본문에서 숲의 나무들이 압살롬과 그의 군대를 멸하게 된 것 등이 그것입니다. 비록 다윗의 죄로 다윗 개인과 이스라엘이 큰 고통과 손실을 입었지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좀 더 깨닫게 되는 과정이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다윗의 깊은 심적 고통과 갈등을 엿보게 하는 행동들을 본문이 강조합니다. 다윗이 저지른 죄 때문에 아들은 적이 되었고, 그로부터 다윗을 지키려는 자들의 희생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압살롬이 죽어야 하는데 한 편으로는 아들을 죽이지 말아달라고 했던 다윗의 모순된 행동은 그의 내면이 얼마나 복잡하고, 극심한 갈등을 겪었을지 짐작케 합니다. 그리고 결국 피할 수 없는 결말이 벌어졌을 때 다윗은 엉엉 울면서 “내 아들아 내 아들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라면”하면서 슬퍼했습니다. 압살롬은 다윗에게 위험한 적이었지만 상황이 끝났을 때 다윗에게 압살롬은 그저 자기 아들이었을 뿐이었습니다. 자신의 죄 때문에 죽은 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전투 중에 압살롬을 죽이지 말라고 명령한 것과 승리를 즐거워 할 순간에 자기 아들의 죽음을 슬퍼한 것은 그를 위해 헌신한 백성들에게 좌절을 주는 일이었습니다.
아들을 잃은 다윗은 아들을 내어 주신 하나님을 생각하게 합니다. 다윗은 자기 죄 때문에 아들을 잃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죄 없는 아들을 우리를 위해 죽게 하셨습니다. 다윗은 반역자인 아들을 위해 백성들에게 희생을 요구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반역자인 우리를 위해 아들에게 희생을 요구하셨습니다. 다윗은 자기 아들을 더 아끼면서 자기를 위해 희생한 백성들을 실망시키고 소외시켰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을 소외시키시면서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비록 다윗은 나단 선지자를 통해 들었듯 죄사함을 받았지만, 자녀들과 백성들이 비참함을 겪었습니다. 아담 한 사람의 범죄가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가 다윗을 통해서도 반복 증명되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의 고난과 죽음으로 많은 사람들을 살리게 된 것을 대조시킵니다. 로마서에서 바울이 말 한대로 한 사람의 범죄로 많은 사람이 죽었으나,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더욱더 넘쳐나게 된 것을 부각시킵니다. 아담의 죄나 다윗의 죄처럼 우리의 죄가 큰 고통을 일으키며 파급되고, 퍼지지 않는다 해서 우리의 죄를 과소평가 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의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대신 고난 당하셨기에 우리의 죄가 숨겨지고 덮여지는 것임을 알고,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 다운 거룩을 추구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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