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하 19-20장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오늘 본문은 어떤 영화 제목처럼 “왕의 귀환”을 다루고 있습니다. 아들의 반란을 피해 왕궁을 떠났던 다윗이 이제 예루살렘성으로 돌아오는 길입니다. 그런데 그 길에서 여러 사람들이 등장하여 다윗과 이야기합니다. 본문이 왜 그런 사람들을 일일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을까요?
먼저 우리가 아는 요압이 등장합니다. 그는 불만이 가득했습니다. 요압은 다윗이 죽은 아들에 집착하며 슬퍼하는 것을 지적합니다. 반역자가 죽은 것은 기쁜 일인데도 다윗의 슬픔 때문에 군사들은 패잔병처럼 조용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요압은 차라리 우리가 다 죽고 압살롬이 살았더라면 다윗이 기뻐했을 것 같다면서, 자신들의 수고를 허탈하게 만드는 다윗의 잘못을 비판했습니다.
요압이 준 그런 자극은 다윗이 마음을 추스르고 왕으로서의 자세를 가다듬는 일에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다윗이 요압을 대신할 사람을 세워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동안 요압이 제멋대로 행동하며 다윗을 힘들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아마사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합니다. 아마사는 반역한 아들 압살롬을 따랐던 사람입니다.
다윗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기 위해 유다족속의 도움을 받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나머지 열 지파들이 그 사실을 알고는 다윗이 보는 앞에서 유다지파에게 시비를 걸었습니다. 그 이유는 왜 우리와 상의 없이 너희들만 다윗 왕의 귀환을 도와서 다윗에게 잘 보이냐는 것입니다. 알력 다툼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스라엘의 지파들은 다윗을 버리고 반란자 압살롬을 따르던 자들 아닙니까? 그런데 이제 와서 압살롬이 죽고 다윗이 재등장하니까 불안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압살롬의 반란 이전에도 다윗을 반대하고 사울의 정통성을 주장하면서 상황에 따라 눈치를 보는 자들이었습니다. 간사함이 일상화 되어버린 자들입니다. 다윗이 얼마나 기가 막혔겠습니까?
이번에는 다윗의 피난길에 저주를 퍼부었던 시므이가 찾아와 자신이 했던 악한 일을 잊어달라고 했습니다. 게다가 자기 지파에서 자신이 가장 먼저 달려 나와서 다윗을 맞이하는 것만큼이나 자기의 진정성을 알아달라는 말도 했습니다. 이에 요압의 형제 아비새가 시므이를 죽여야 하지 않겠냐고 하자 다윗은 시므이가 자신을 저주할 때 살려두겠다고 말한 것을 재확인시켰습니다.
이어서 요나단의 아들 절뚝발이 므비보셋이 등장합니다. 다윗은 므비보셋에 대해 배신감을 느끼고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윗의 피난길에 므비보셋의 종 시바가 음식을 가지고 나와서 므비보셋이 사울가문의 부활을 꿈꾼다고 거짓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당사자인 므비보셋을 만나면서 그것이 거짓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뒤통수 맞은 다윗이 얼마나 황당했겠습니까? 므비보셋의 행색이나 정황이 그의 진실을 증명하는 듯 했지만 다윗은 도저히 누구도 믿을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시바에게 전부 위임했던 재산을 므비보셋이 직접 소유하도록 절반만 떼어주었던 것 같습니다. 만약 므비보셋의 말을 절대적으로 신뢰했다면 시바에게 허락했던 재산을 모두 므비보셋에게 넘겼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역이 일어난지 얼마 안 되었는데 이번에는 세바라는 자가 또 반역을 일으키려 했습니다. 다윗은 이 문제 해결을 위해 요압 대신 앞에서 새로 임명한 아마사에게 반란 주도자 세바를 제압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요압은 중요 임무에 자기를 다윗이 제외시킨 것을 눈치 채고 화가 났는지 임무를 맡은 아마사를 제멋대로 죽였습니다. 그리고 요압은 어떤 지혜로운 여인의 개입으로 큰 희생 없이 반란 주동자 세바를 제거하게 됩니다. 다윗은 아마사에게 일을 맡겼는데 요압이 아마사를 죽이고 보란 듯이 세바까지 제거하고 자기 앞에 나타났을 때 다윗은 기분이 어떠했겠습니까? 아주 끔찍했을 것입니다. 요압은 다윗이 아끼고, 기대하는 사람들을 계속 죽여 왔습니다. 그렇게 다윗의 아들 압살롬을 죽여 놓고도 여전히 무지막지한 존재감을 드러내며 자기 자리를 지킨 요압을 보며 다윗은 얼마나 치를 떨었겠습니까?
다윗은 다시 왕권을 회복한 후 압살롬 편에 섰던 자들과 어떻게 다시 융합을 이룰지 고민이 많았을 것입니다. 또 반역자 아들로 인해 슬픔이 가시지 않았을 다윗이 계속 겪은 일은 무엇입니까? 그는 인간이 얼마나 기회주의적인지를 너무나 혼란스러울 정도로 경험했습니다. 그동안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이 어떤 자들이었는지를 더욱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왕에게 일관된 충심을 보여준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은 소수였습니다. 다윗은 다시 왕권을 회복하였지만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깊은 상심, 배신감, 허망함 속에서도 다윗은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그냥 내버려두었습니다. 세상 역사를 보면 왕 된 자들은 자기를 반대했던 자들을 숙청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다윗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다윗의 주변에는 그를 대적하는 자들이 항상 있었습니다. 다윗에게 은혜를 입었으면서도 그를 비방하고 저주하고 적에게 넘겨주는 배은망덕한 자들, 기회만 되면 제 멋대로 행하면서 다윗을 곤란에 처하게 한 자들이 주변에 늘 있었습니다. 요압이 그랬고, 세바가 그랬고, 시바가 그랬고, 시므이가 그랬고, 압살롬이 그랬고, 아히도벨이 그랬고, 미갈이 그랬고, 시글락 백성들이 그랬고, 나발이 그랬고, 그일라 사람들이 그랬고, 사울이 그랬고, 이방 나라들이 그랬고, 이스라엘이 그랬습니다. 다윗은 항상 자신에게 대적하는 자들과 공존해야 하는 일에 익숙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늘 그랬듯이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그가 그런 것은 자기 죄로 인해 그 누구도 정죄할 자격이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겠지만 단지 그것만으로 가능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을 중심으로 다양한 사람들의 일치를 이룰 수 없음을 진작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자기를 반대하는 사람들, 고통을 주는 사람들을 자기가 어떻게 하는 것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자기에게 그럴 권한이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당장 눈에 보이는 문제를 해결한다고 해서 자신을 괴롭히는 적들을 지금 손쉽게 없앤다고 해서 자신의 평안, 자신의 안전, 자신의 권력이 유지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은 것입니다. 사람의 노력으로 눈에 보이는 이스라엘이 완전해질 수 없는 것을 다윗은 알았기 때문입니다.
인간왕은 결국 진정한 왕이 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완전한 통치를 이룰 수 없습니다. 한 가지 이유는 지도자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인간 지도자는 권력을 얻고 지속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선한 방법들을 취하기보다 얼마나 악랄하게 견제하고 통제하는지 우리는 압니다. 또 세상의 많은 지도자들이 지도력이 아무리 대단했어도 죄인으로서의 개인적인 죄가 무너지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다윗도 여러 면에서 거의 완벽한 왕이었지만 죄인의 문제를 당연히 드러냈습니다. 지도자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다스리는 것이 완전할 수 없는 또 다른 이유는 다스림을 받는 백성들이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각자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고, 생각하는 것이 다르고 이기적인 죄인이니 늘 깨어지기 쉽고, 분란이 일어나기 쉽습니다. 인간이 다른 인간을 다스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자기 파괴적인 일입니까? 죄인이 다른 죄인을 이끈다는 것은 가망이 없는 일입니다. 그러니 다윗이 수많은 적들을 그냥 내버려두고, 은혜를 베풀면서도 왕으로 건재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다스리는 일을 사람에게 맡기셨지만 그것을 가능케 하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이 세상을 사람이 다스리는 것 같지만 하나님이 주관하고 계시기 때문에 이렇게 지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맡기신 그 다스림의 위치가 주는 막중한 책임감과 고통스런 대가를 겪으면서 깨달았을 것입니다. ‘사람이 진정한 왕이 될 수 없구나! 하나님만이 죄인인 사람들을 인도하실 수 있구나!’하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윗이 깨달았지만 행할 수 없었던 참된 왕의 모습, 이룰 수 없는 하나님의 나라를 분명히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왕의 통치를 받을 수 있는 백성들을 만드는 일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즐거워하는 새 피조물들을 만드셨습니다. 그 일을 십자가의 죽음으로 하셨습니다. 자신의 죽음을 통해 우리를 ‘용서받은 죄인들’이라는 정체성으로 묶으셨습니다. 참된 왕의 다스림을 받을 백성들을 만드셨습니다.
다윗은 좋은 백성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경험했을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왕이 있어도 백성들이 악하면 좋은 나라를 이룰 수 없습니다. 사무엘서는 이스라엘이 이미 계신 왕이신 하나님을 무시하고 인간 왕을 구한 것을 말합니다. 인간 왕도 여러 문제가 있지만 그 아래 있는 부하나 백성들도 만만치 않은 죄인들임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사무엘서를 통해 참 왕을 갈망해야 하고, 진정한 왕의 다스림을 즐거워하고 누리는 참 백성들도 필요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다윗은 자신이 왕이 되었고, 그럴듯한 나라도 세웠지만 자신의 통치를 기뻐할 백성들을 만들어내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만들어내십니다. 우리 같은 반역자들을 자신의 피로 사셔서 자기 백성이 되게 하십니다. 이전에는 그분의 다스림을 거역하던 자들로 이제는 그분의 다스림을 기뻐하는 자들이 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자신의 아들로 자기 나라의 왕으로 세우시고, 용서받은 우리로 백성 삼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정한 왕이신 예수님을 갈망해야하고, 동시에 우리 자신도 하나님 나라에 걸맞은 백성으로서의 삶을 이 땅에서부터 살아가야 합니다. 참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여기에서부터 누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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