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언약으로 맺어진 관계에 충성함 (사무엘하 21장)

따뜻한 진리 2021. 1. 10. 20:26

사무엘하 21장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다윗이 다스리는 이스라엘에 삼 년 간 흉년이 있었습니다. 다윗이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했는데 사울이 기브온 사람들을 죽인 사건이 이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브온 족속은 여호수아가 정복전쟁을 하던 당시에 전멸시켜야 했던 부족인데, 그들은 살기 위해 자신들이 멀리 다른 지역에서 온 것처럼 정체를 숨기고 이스라엘과 화친조약을 맺었습니다. 나중에 기브온 족속의 거짓말이 드러났지만 여호와 앞에서 세운 약속이기 때문에 그들을 살려두는 대신 나무를 패고 물을 긷는 종이 되게 했습니다(9). 그런데 사울왕은 그 기브온 족속의 상당수를 죽였다는 것입니다.

 

    사울이 그들을 왜 죽였을까요? 본문 3절에서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위하여 열심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 열심이 어떤 것인지를 알기 위해, 먼저 우리는 사무엘상 28장에서 사울이 찾아간 엔돌의 신접한 여인이 한 말 사울이 신접한 자와 박수를 이 땅에서 멸절했는데 왜 나를 찾아와서 위험한 일을 요구하냐라고 물은 것을 생각해봐야 합니다. 또 사울이 통치기간 동안 여호와 하나님을 무시했으면서도 겉으로는 자신의 통치에 종교적 정당성을 부여하려고 노력했던 여러 가지 일들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마치 히틀러가 게르만 우월주의로 국민들을 결집시킨 것처럼 사울은 히브리인들이 선택받은 특별한 민족이라는 선민사상을 일으켜 왕권을 강화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의 언약 때문에 보호받아야 할 기브온 족속을 말살하려 했던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응답을 듣고 사울이 저지른 죄를 자신이 처리해야겠다고 생각을 했는지 사울에게 피해를 입은 기브온 족속에게 어떻게 속죄해야 할지를 물었습니다. 기브온 사람들은 사울의 자손 일곱을 매달아야 한다고 제안했고 다윗은 그것을 받아들여서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은 남겨두고 다른 사울의 후손 일곱을 기브온에 넘겨주었습니다. 다윗이 죽은 사울의 후손 일곱과 사울과 요나단의 유골을 사울의 아비 기스의 묘에 장사한 후에 하나님께서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이상한 것은 이 사건은 시간상 압살롬의 반란 이전에 있었던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 일을 왜 여기서 다루고 있을까요? 그리고 사울이 저지른 일을 왜 그의 후손들과 다윗의 때에 책임져야 했을까요?

 

    먼저 사울이 지은 죄 때문에 그의 후손들과 다윗이 곤란하게 된 것을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선조의 죄 때문에 후손들을 저주하시는 분입니까? 34:7에 따르면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라고 나와 있고, 18:20에는 반대로 아들은 아버지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할 것이요 아버지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하리니라고 나와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지은 구체적인 죄들에 대해 항상 상응하는 징계나 저주를 후손이나 주변사람에게 내리시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분명히 한 사람의 죄가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쳐서 가족과 주변 공동체 전체에 영향을 줍니다. 또 역사를 보면 어떤 사람의 범죄를 지나치게 주변인들까지 연루시켜서 처벌하는 연좌제라는 것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모두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징계는 아닙니다.

 

    반대로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이 책임질 이유가 없는데 책임을 지우시는 일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처럼 하나님께서 물리적, 시간적, 관계적으로 떨어진, 책임이 없는 사람에게 책임을 지게 하시거나 일의 마무리를 짓게도 하십니다. 그러므로 누구가가 겪는 고난이 하나님께서 당사자를 직접 저주하신 것인지 그냥 일반적인 세상 죄의 영향으로 인한 피해를 입는 것인지 쉽게 단정 지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일이 아무 원칙도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서로 무관한 자들을 그런 책임관계로 묶으시는 것은 구원하시는 역사 안으로 불러들이는 것이 목적입니다. 최종적으로 그리스도와 묶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있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원리를 깨닫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내 잘못이 아닌데 내가 그 고통을 치르는 것처럼 내 공로가 아닌데 구원 얻는 것 말입니다.

 

    성경에는 다윗이 자신의 죄 때문에 갓난 아들의 죽음을 경험했던 것처럼 죄 때문에 가까운 사람이 자기 책임으로 죽는 일도 있고, 반대로 요나가 자기와 상관도 없는 원수나라 니느웨에 하나님 말씀을 전할 책임을 부여받는 일도 있습니다. 누가 죄의 대가를 치르게 될지 누구를 통해 생명의 은혜를 깨닫게 할지의 관계 설정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책임지는 자와 책임져야 할 대상을 연결시키는 이유는 죄를 깨닫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나의 죄와 무관한 자가 나 때문에 고통당할 때 우리의 죄가 극악함을 깨닫게 되며, 또 무관한 자가 희생을 치르면서 나의 죄 문제를 해결할 때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원리로 아담과 우리를 연결하셨고, 또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연결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책임과 은혜의 관계가 서로 큰 관련이 없어 보이는 둘 사이에 이뤄지는 일이지만, 하나님께서 갑작스럽게 책임이나 은혜를 주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하시는 일이지만 전혀 말씀이 없으시다가 일방적으로 하신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언약을 통해 그 관계를 설정하셨습니다. 가장 먼저는 아담과 그 관계를 설정하셨고, 노아, 아브라함, 야곱, 모세, 다윗 등 성경의 여러 인물들에게 오셔서 그들이 알지도 못했고, 원하지도 않았던 일들을 이루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언약관계를 바탕으로 많은 사람들을 혈연이라는 태생적 혈연관계나 직무에 의한 사회적 관계로 서로를 연결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의 사울의 후손들과 다윗에게 굳이 책임이 있다고 설명하자면 사울과 사울의 후손들은 혈연으로, 그리고 사울과 다윗은 같은 민족인 것과 왕의 직무로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자기를 사랑하고 잘해준 사람이든지 사울처럼 고통을 안겨 준 자들이든지, 그런 인간들과의 관계 속에 의도치 않게 살아갔고, 오늘 본문도 그런 사건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그런 관계 속에 집어넣지 않으셨다면 다윗은 하나님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 일이 우리에게도 일어납니다. 하나님과 관련 없이 살아오던 자들에게 하나님은 먼저 찾아오셔서 그런 관계를 이루십니다. 하나님 편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으셨다면 인간은 하나님과 전혀 무관한 존재로 있을 것인데, 죄 때문에 더욱 그럴 것인데, 하나님께서 약속을 통해 하나님 자신과의 관계를 시작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뿐만 아니라, 아담과 우리 사이를, 아브라함과 우리 사이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를 그렇게 관계가 있게, 연관 되게, 묶이게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점점 그 언약 가운데 구원할 자들을 부르시고 하나님 나라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존재하지도 않았던 자들을 창조하셔서 인격적인 관계 속으로 불러주신 것입니다. 그 관계가 시작되지 않았다면 죄도 몰랐을 것이고 은혜도 얻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무관했던 둘 사이의 관계가 언약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우리 존재만 말씀으로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도 언약으로 창조해주신 것입니다.

 

    기브온 족속은 비록 이방족속이었지만 여호수아 때 하나님의 언약 백성 안에 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기브온에 관한 하나님의 언약을 무시하였고 그저 정치적으로 그들의 생명을 이용하였을 뿐입니다. 사울이 그렇게 하게 된 것은 그 자신이 하나님의 언약의 가치를 아는 자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자신이 세워져 사용되었다는 것, 언약을 맺으신 분이 하나님이시니 그분이 이스라엘을 책임지시고 이끌어 가실 것이고, 그 일을 위해 인간왕인 자신도 책임지실 것이라는 분명한 인식이 없으니까 스스로 왕권을 유지하려고 했고, 함께 그 언약 안에 있는 기브온 사람들을 아끼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저 정치적 도구였습니다.

 

    다윗은 어떻습니까? 그 언약의 가치를 생명처럼 여긴 자입니다. 왕이 된 자신과 맡겨진 백성과 나라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 약속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니 하나님이 책임지신다는 것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는 자신의 정체성을 인식했습니다. 아무 의미 없는 자들이 하나님의 다가오심, 찾아오심, 개입하심으로 언약 안에 들게 된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지를 알았던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스스로 왕이 되려 하지 않았고, 원수 같은 사울을 참을 수 있었고, 왕이 되어서도 사람의 힘으로 권력을 지키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도 하나님이 세우신 언약 때문에 하나님이 자기 백성으로 붙잡으시는 것이지 기브온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스라엘이나 기브온이 하나님 앞에서 같은 처지입니다. 약속 때문입니다.

 

    다윗은 그 약속 안에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일이니 사울이 저지른 문제를 정리할 책임감을 느끼고 기브온 족속들도 바르게 대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요나단과 하나님의 이름으로 약속한 것 때문에 므비보셋을 지킨 것입니다. 다윗은 그렇게 하나님의 언약을 신뢰했고, 언약의 주체이신 하나님을 높이기 위해 그 언약 안에서 종으로서 의무감을 가지고 약속들을 실행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는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종으로 약속을 지키는 모습을 보여준 것입니다. 본문은 그것을 말하기 위해 지난 일을 여기서 말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사울의 잘못을 이스라엘과 다윗이 책임진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대로 다윗의 죄에도 불구하고 그의 왕권과 나라를 지키신 것처럼, 다윗도 그 약속 안에서 하나님이 자기와 연관시키신 일들에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은 원래 우리를 위해 고난당하실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무관하신 신적인 존재로서 그냥 자신의 영광을 버리지 않으시고 그대로 영원히 계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와 죄인인 우리와의 관계를 연결하셔서 구원하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아들 예수님은 그 언약의 관계 속에 순종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그 분이 피조물을 책임지신다는 자기 약속에 순종하시고, 헌신하신 것입니다.

 

    이 언약의 고귀함과 그것을 실행하시는 하나님의 주도면밀함은 우리에게 놀라운 사랑을 깨닫게 합니다. 눈에 보이는 관계보다 하나님이 설정하신 관계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함을 알게 됩니다. 그 관계 안에서 우리는 죄를 알게 되고 생명을 얻게 됩니다. 또 인간적으로는 나와 관계없는 자를 위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헌신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얼마든지 무시하고 지나갈 수 있는, 나와 관계없는 고통과 저주스런 상황 속에 하나님 때문에 책임감을 느끼고 뛰어들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나와 전혀 관계없던 것들이 하나님의 시선과 의도 때문에 나와 관련이 되는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전혀 관계없던 나를 이토록 놀랍게 책임져주시는 하나님께서 그 언약 안에서 나를 다른 것들과 또 연결시키시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