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1-31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창세기 1~3장은 창조과학자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과학적 자료들로 의도된 내용이 아닙니다. 역사 속에서 과학이 발전하면서 성경의 기적들을 부인하는 일들이 계속되자 기독교인들 중의 한 부류는 성경의 내용 중 특별히 창세기의 내용을 가지고 과학과 맞서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창세기는 우주와 지구의 나이가 얼마나 되는지 계산할 증거나, 사람이 육식을 하지 말고 채식을 해야 하는 당위성이나, 천동설이 맞는지 지동설이 맞는지를 판단할 자료들을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과학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잠깐 언급하고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과학이 발견하고 다루는 세상의 일반적인 질서와 법칙들을 존중하고 이용해야 합니다. 그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과학만을 신봉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한 채 오로지 물질과 물리법칙만을 인간이 신뢰해야 할 유일한 근거로 두는 것을 우리는 따를 수 없습니다. 과학이 아무리 발전할지라도 멸망을 피할 수 없습니다. 진화론에 근거한 인류의 진보, 발전이 사실이라고 쳐도 인간이 지구생태계를 파괴하는 속도와 서로의 갈등과 다툼이 커지는 속도는 훨씬 빨라서 멸망의 길을 피할 수 없습니다. 즉 인간들이 기대하는 인간 진화와 과학발전의 속도보다 죄와 파급속도가 더 빠릅니다. 우리는 성경을 과학과 싸우는 도구로 사용할 이유가 없습니다. 성경은 과학보다 더 높은 위치에서 온 우주와 우리의 근본적인 문제를 정확하고 실제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에 성도인 우리는 성경이 의도한 내용을 잘 깨달아 과학과 인간들의 고민과 상상과 철학이 결코 줄 수 없는 답을 얻어야 합니다.
창세기는 성경의 첫 책으로써 예수님을 믿는 우리 모두를 위한 책이지만 창세기를 처음 읽은 1차 독자는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종살이 하던 이집트에서 탈출해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 가나안을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집트에서 노예로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냥 불쌍해서 갑자기 나타나셔서 구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처럼, 자신의 영광을 위해 자신을 알리시려고 죄인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택하시고 구원하시고 광야에서 인도하셔서 가나안으로 가게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창세기 내용을 통해 자신들에게 구원을 베풀어준 여호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분과 동일한 분이심을 분명히 알아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기 위해, 관계를 맺기 위해 그들이 목격하지 못한, 본적이 없는 창조를 자신이 행하셨다고 설명하셨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보이지 않는 것과 보이는 우주의 모든 것을 만드신 하나님 자신을 사람에게 알려주시는 행위, 세상의 주인이신 분이 만들어진 피조물인 우리들에게 자기를 드러내시는 사실 자체가 언약적입니다. 우리가 가난하고 천박한 상황에 살고 있는데 엄청난 재력을 가진 사람이 우리의 후견인이 되어 모든 것을 보장해준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명예롭고 영광스럽게 해야 한다는 당연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 사람이 나에게 아무런 부담도 조건도 제시하지 않을지라도 나에게 발생하는 최소한의 암묵적인 언약이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상숭배로 가득한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을 불러내셨고, 그 과정에서 이스라엘은 여호와가 세상 신들의 중의 하나가 아니라 세상을 창조한 유일하신 하나님임을 알아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적 관계를 맺기 위해 자신이 누구이신지를 창세기를 통해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 지음받아 생명을 얻은 이 세계가 자동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해야 하는 언약관계에 들어가게 된 것처럼, 유월절과 홍해를 통과해서 새생명을 얻은 이스라엘도 그 언약관계 들어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창조주 하나님과의 언약관계 속에 들어있음을 창세기를 통해 알게 됩니다.
성경은 삼위 하나님이 창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셨음을 말합니다. 먼저 성부하나님은 ‘있으라. 되라’ 같은 명령의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성부께서 말씀으로 창조하셨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자신의 능력을 사람처럼 묘사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말하는대로 다 이뤄지는 마법사 같은 초월적 능력을 갖는 것을 상상하곤 하지만 그런 말의 능력은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창조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어떤 방해를 받거나 능력의 한계 없이 원하시는대로 이 세상을 창조하셨음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 것도 없는 데서 보이지 않는 것들과 우주의 모든 것을 말씀으로 있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창조 때 뿐 아니라 앞으로도 영원히 하나님의 말씀은 그대로 다 이뤄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부하나님이 말씀으로 창조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생각대로 말씀대로 이루시는 무한한 능력을 가지신 분이라는 의미를 넘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 성부의 말씀이 예수님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그 말씀은 단순히 입으로 나온 생각의 표현이나 명령을 넘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 말은 이런 특징을 갖습니다. 첫째 말은 그것을 내뱉는, 발화하는 존재의 성격과 능력을 드러냅니다. 두 번째로 말은 말 한 대로 실행, 실천해야 하는 일치의 책임, 의무를 갖게 합니다. 그런데 성자 예수님은 성부가 어떤 분이신지를 완전하게 드러내실 뿐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일치된 실행이 일어나도록 일하시고 순종하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이시고, 창조의 실행자였습니다. 즉 창조사역에서도 성자 예수님이 참여하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1장 1절에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니라”라고 말합니다. 즉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이미 계셨던 말씀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골로새서 1장 16절을 보면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고 말합니다. 히브리서 1장 1절에서 4절을 보면 그 아들로 말미암아 성부 하나님이 모든 세계를 지으셨다고 말합니다. 계시록 4장 11절에서는 보좌에 않으신 예수님이 우리 주 하나님이시고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다음으로 창조 사역에 성령 하나님이 함께 하셨습니다. 2절을 보면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를 운행”하셨다고 말합니다. “운행하다”에 해당하는 동사는 신명기 32장에 등장하는데, 그 단어는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행동을 독수리가 자기 새끼 위에서 새끼를 보호하고, 새끼가 위험할 때 날개를 펴서 받는 모습에 비유하는데 사용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미 독수리처럼 실제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이스라엘보다 앞서 가시고, 그들을 덮는 보호막이 되어주셨습니다. 창세기 1장 2절이 말하는 창조 때의 어둡고 두려운 깊은 수면 위를 바람처럼 구름처럼 덮으신 성령의 활동이 이스라엘의 출애굽 과정에서 재현되었습니다. 죽음의 홍해를 건널 때 물을 가른 바람, 위험이 도사리는 광야에서 낮에는 인도자가 된 구름기둥이 밤에는 불기둥이 되어 빛과 열기를 제공하면서 자신들을 보호해주는 것을 이스라엘은 경험한 것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광을 퍼뜨리고 확산시키는 자신의 역할을 빛의 성질로 묘사해서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첫째 날 생겨난 빛은 우주 천체의 어떤 빛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영광의 빛,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참 형상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확산시키는 성령의 빛이 세상에 비춰진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영인 성령은 창조의 넷째 날 해, 달, 별들이 만들어지기 전에 계셨던 신적인 빛으로서 천체들에 의해 생겨난 시간으로 지구의 낮과 밤이 구분되기 이전에 영적 밝음과 어둠을 구분 짓는 원천이 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뵙고 온 모세의 얼굴의 광채와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얼굴의 광채는 그들이 세상을 창조하신 분의 지시를 받은 자라는 증거로 나타난 것입니다. 성령은 창조 때에 빛과 구름과 바람으로 등장하셔서 피조세계를 덮으시고, 품으셨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모세를 통해 주신 창세기 첫 부분에 등장하는 태초의 빛과 수면을 운행하는 영을 추상적으로 멀리 느끼지 않고, 자신들의 출애굽 여정에서 인도하시고 함께 계시는 그 빛과 구름과 바람이 그분임을 알아야 했습니다. 이렇게 성부, 성자, 성령이 창조 사역에 함께 하셨는데, 특별히 26절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에서도 삼위 하나님이 나타나십니다. 창세기 1~3장은 우리가 아는 이 온 우주와 지구가 존재하기 전에 하나님이 계셨다고 말합니다. 그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고, 창조 이전에도 삼위일체로 항상 계셨기에 당연히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도 함께 하셨습니다.
이러한 삼위 하나님의 창조는 언약적입니다. 창조가 하나님께서 자신의 피조물과 언약을 맺으시는 과정이라고 예레미야 선지자가 말합니다. 예레이먀 33:19절을 새번역 성경을 참고해서 보면 “주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 주가 말한다. 낮에 대한 나의 언약과 밤에 대한 나의 언약을 너희가 깨뜨려서, 낮과 밤이 제시간에 오지 못하게 할 수 있겠느냐?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다면, 나의 종 다윗에게 세운 나의 언약도 깨지는 일이 없고, 다윗에게도 그의 왕좌에 앉아서 다스릴 자손이 끊어지는 일이 없고, 나를 섬기는 레위 지파의 제사장들에게 세운 나의 언약도 깨지는 일이 없을 것이다” 이렇듯 하나님은 자신의 창조행위가 언약적 행위임을 확증하십니다. 그래서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 속에 태어나면서 언약적 요구를 받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만들었는데 내가 부여한 이 시공 속에서 나의 질서와 법도에 순종하면서 나의 영광을 위해 살라고 하나님은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있게 하신 하나님의 언약적 요구에 대답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삼위 하나님은 창조사역을 통해 피조물인 우리에게 질문, 요구만 하시지 않고 본을 먼저 보이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부의 뜻대로 행하는 완전한 말씀인 성자의 순종과 성령의 피조물을 품으심과 인도하심입니다. 이렇게 창조는 하나님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창조사역 속에서 우리에게 언약적 요구를 하시는 동시에 모범을 보여주신 사건입니다. 사랑과 신뢰와 믿음과 충성의 본을 삼위 하나님 안에서 먼저 보이시면서 우리에게 요구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 안에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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