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언약으로 보는 성경(7)- 홍수심판

따뜻한 진리 2021. 3. 7. 22:14

 

창세기 6:1-7:24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먹고 범죄한 후 에덴에서 쫓겨나게 되었고, 가인과 아벨을 낳습니다. 그 두 사람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고,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만 받으시자 가인은 동생 아벨을 죽입니다. 하나님이 가인에게 동생 아벨이 어디 있냐고 물으시자 그는 ‘모릅니다. 제가 동생을 책임져야 하는 자입니까?’라고 하나님께 따지듯 묻습니다. 그것은 가인의 아버지 아담이 하나님께 ‘당신이 주신 여자가 선악과를 줘서 먹었습니다.’라며 책임을 회피하고 떠넘긴 것을 그대로 닮은 것이었습니다. 살인자 가인이 회개하기보다 죄책감 때문에 생기는 불안감을 호소하면서 자기를 보호해달라며 권리를 주장하는 뻔뻔함을 보여도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셨고, 가인의 후손들은 그런 가인을 닮아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는 문화를 발전시켜 갔습니다.

 

    타락 후 아담과 하와에게 구속은혜언약과 일반은혜언약을 주신 하나님은 살인을 저지른 후 두려워했던 가인 역시 일반은혜 안에서 보호받으며 살아갈 수 있게 약속해주셨습니다. 일반은혜에 의해 자연의 질서가 유지되고, 사람들의 죄성도 통제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과 상관없이 모두에게 베풀어지는 이 일반은혜는 구원받는 성도들이 더 풍성한 감사와 찬양을 하게 만듭니다. 우리에게 구속은혜언약만으로도 너무나 감사하지만 창조세계에서 누리는 일반은혜에서도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이 풍성하게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지 못하는 자들에게 있어서 일반은혜는 하나님을 부인하고 자기 마음대로 살게 하는 이유가 됩니다. 일반은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순종하느냐와 상관없이 모든 피조물에게 베풀어지는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인의 후손들은 자신들의 하나님을 적대하는 삶이 괜찮은 줄 착각하고, 하나님과 상관없는 자신들의 세상을 만드는데 열심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세상은 하나님을 신실하게 찾는 자들의 영역을 점점 압박해서 믿음을 찾아보기 어려운 절망적인 곳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기억하고 예배하는 사람은 거의 멸절되는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세상을 심판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노아를 통해 심판을 준비하게 하셨습니다. 아벨이 죽은 후 아담과 하와는 셋이라는 아들을 낳았는데 노아는 그 셋의 후손이었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큰 배, 방주를 만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 방주에는 노아의 가족, 그리고 하나님이 방주로 보내주신 동물들만 탈 수 있었습니다. 방주 문이 닫힌 후 40일 동안 물이 쏟아졌고, 150일 동안 땅이 물에 덮여있었고, 물이 빠지는데 150일이 걸렸습니다. 이 물 심판으로 땅에서 호흡하는 모든 것들이 죽었습니다. 방주 밖은 지옥과 같았습니다.

 

    베드로후서 2장 5절에서 베드로는 “옛 세상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라고 말합니다. 노아 시대의 홍수는 창조 이후로 지속된 세계, 즉 옛 세계의 종말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완전한 종말 심판이 아니라 아직 임하지 않은, 앞으로 올 진짜 심판을 예고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최종 심판 때 있을 일처럼 그 홍수 심판 가운데에는 노아의 가족처럼 은혜로 구원받는 그룹이 있었고, 반대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 구원의 은혜는 물론 일상적으로 누려온 일반은혜까지 모두 빼앗기는 무시무시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 홍수 사건은 최후 심판만 예고하지 않고 심판으로 완성되는 하나님 나라와 구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모형도 보여줍니다.

 

    먼저 홍수 심판 가운데 하나님 나라의 모형이 나타났는데 그것은 바로 방주입니다. 노아의 가족에게 방주는 심판 가운데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방주 안은 하나님 나라, 즉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신정제도의 특별 공간이었습니다. 그래서 방주 안은 바깥세상과 구별되어야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방주에 태울 짐승을 데려오셨을 때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을 구별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홍수가 끝나서 노아의 가족이 방주에서 나갔을 때 하나님께서는 정결한 동물과 부정한 동물을 구분하지 말고 다 먹어도 된다고 허락하셨는데 이것은 방주가 하나님나라의 모형 역할을 더 이상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구별을 통해 방주 안과 밖이 다른 세상임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과 유사하게 하나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에게 정결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의 구별을 요구하신 것은 이스라엘이 방주처럼 하나님 나라의 모형역할을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예수님께서 오셔서 새언약의 공동체, 교회를 시작하시면서 이스라엘의 모형역할이 끝나자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에 대한 구분을 없애신 것이고, 그것이 베드로의 환상을 통해 계시된 것입니다. 즉 방주나 이스라엘이나 하나님 나라를 예고하는 임시적인 모델 역할을 한 것입니다. 즉 방주는 일시적이고 임시적인 하나님 나라의 모형역할을 했습니다.

 

    마태복음 24장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때 자신이 오셔서 심판하시고, 하나님나라가 이뤄지는 것을 설명하시면서 노아시대의 홍수심판을 배경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즉 노아시대의 홍수는 하나님 나라와 사탄의 나라의 운명을 가시적으로 보여주신 것이었고, 방주는 은혜를 입은 언약공동체만이 하나님 나라에 속하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다음으로 홍수 심판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 나타났는데 그는 바로 노아입니다. 6장 9절을 보면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라고 말합니다. 그는 악한 세대 속에서도 하나님을 알고 교제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인간의 본분이 하나님을 높이고 영광을 드러내는 제사장의 역할임을 잘 알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노아는 홍수가 끝난 후 방주에서 나갔을 때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노아가 방주를 만드는 과정에서 그가 보여준 태도에 대해 본문 6장 22절과 7장 5절은 반복해서 노아가 여호와께서 명하신 대로 다 준행했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노아의 신실한 순종은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과 보혈의 공로를 예고하는 모형이었습니다.

 

    6장 9절에서 노아가 완전한 자였다라고 말하는 것, 또 7장 1절에서 내가 네 앞에서 의로움을 보았다는 하나님의 칭찬은 노아가 스스로 행위가 완전한 자였다는 뜻이 아닙니다. 6장 8절이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라고 말하듯 하나님께서 노아가 순종할 수 있도록 은혜를 주셔서 완전한 순종으로 공로를 얻으신 예수님의 모형이 될 수 있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로 노아의 행위가 그리스도의 공로를 가리키게 하셨습니다. 많은 수고와 순종을 통해 방주라는 구원과 안식의 공간을 예비한 노아는 하나님 나라를 예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 되었습니다. 노아는 비록 모형이었지만 노아가 가리킨 실체이신 예수님은 자신의 공로로 심판 가운데서 우리를 살리시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자신과 함께 들어가게 하실 것입니다. 노아의 가족이 노아의 신실함 때문에 함께 방주에 들어간 것처럼 우리는 예수님의 공로 덕분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갑니다.

 

    이렇게 노아시대의 홍수심판은 죄인들에게는 두렵고 비참한 순간이었지만 성도들에게는 구원의 순간,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는 순간이었습니다. 홍수 심판은 이 인류 역사상 가장 두려운 일이었지만, 하나님께서 진짜 마지막 심판을 미리 경고하시는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것을 교훈삼지 않고 있습니다. 많은 영화들이 보여주듯 인간은 종말을 예상합니다. 그러나 그냥 이 순간을 소중히 즐기겠다고 자기 실존을 미화하거나, 극복할 수 있다고 믿거나, 점점 무뎌지면서 하나님이 주신 해결책을 붙잡지 않는 고집스러움과 교만을 드러냅니다. 사람들은 ‘한 번 죽지 두 번 죽냐!’라는 말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를 보이지만 죽음에 대한 용감함이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못합니다. 그런 용기는 어쩌면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 비참함이 있다는 것을 모르거나 애써 피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과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여러 모형들을 역사 속에 주시고 성경에 기록하셨듯, 이 땅에서 겪는 육체적인 죽음도 모형입니다. 이 몸의 죽음이 보여주는 차가움과 어둠과 두려움과 비참함은 그 이후의 진짜 겪을 비참함과 두려움을 예고하는 모형입니다. 우리는 주께서 결국 눈에 보이게 오셔서 심판하실 그 때를 준비하고 하나님 나라에 속하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구원의 길을 겸손하게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노아의 식구들이 노아를 따라 방주로 들어갔듯,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해서 하나님 나라에 속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