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세습하는 교회들의 논리들

따뜻한 진리 2009. 5. 14. 16:02

교회와 목회자는 윤리적으로 완벽할 수 없다.

그러나 성경의 십계명을 통해 하나님께 순종하고 

자신이 속한 동시대 동일 문화권의 윤리에 최대한 모범이 되도록 겸손히 순응하는 것이 성경적일 것이다.

나아가 속한 사회의 부조리를 성경적으로 비판할 수 있는데까지 나아가야만 한다.

(그리스도인의 비판은 비판을 위한 비판이 아닌 궁극적으로 완성될 하나님 나라와 대조시키기 위한 비판이며

부분적인 성경적 가치를 실현시키고, 그것도 불가능하다면 성경적인 차선책을 성취하기 위한 일환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요즘 교회엔

인간의 지혜와 윤리를 넘어서 일하시는 하나님,

인간의 선악을 초월하여 궁극적인 선을 도출하시는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에 관한 신학을

자신들의 악을 정당화하기 위해 악용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세상의 윤리로 교회의 일, 하나님의 일을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자신들이 하려는 일이 하나님의 뜻이란다.

즉 자신들이 하는 일을 함부로 판단하지 말라는 것이다.

목회자가 비윤리적인 일을 의도하거나 그리고 성도들이 노골적으로 악에 협조할 때도

그럴듯한 핑계로 그런 논리가 사용된다.

 

 

세습에서 그런 일이 분명히 나타난다.

(물론 모든 세습이 다 잘못된 것은 아니다. )

 

목회자는 교회를 위해, 지금까지 지켜온 목회철학이 붕괴되는 것을 막기 위해 세습을 하는 것이며

세습에 대해 사람의 생각과 세상의 잣대로 그것을 비판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인간이 평가하려고 하는 것이라며 방어한다.

또한 성도들은 교회의 안정을 위해 그것이 교회에 유익한 점이 많다고

스스로 위안 삼으며 정당화한다.

 

그러나 그런 교회는 반드시 죽는다.

사실 이미 그곳은 교회가 아닌, 종교집단이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미 그런 교회 집단은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부인한 것이다.

 

그리고 그런 집단은 이후 성경을 해석하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와 은혜 사이의 긴장 가운데 해석되어지고 설교되어지기 보다는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해석하고, 이성보다는 감정을,

진리와 함께 고난 받는 십자가의 도 보다는 번영을 추구할 것이다. 또 그래야만 한다.

왜냐하면 진리에 대한 분별력이 살아날 때

그들 스스로가 하나님 앞에서 한 일을 깨닫게 되면

목회자나 성도들이나 그 괴로움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교회는

신학, 특별히 하나님의 주권, 섭리, 하나님의 뜻에 관한 신학을 제멋대로 오용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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