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19:1-29 (16, 17장)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우리에게는 사는 동안 많은 위로가 필요합니다. 위로는 괴로움이나 슬픔을 달래 주려고 따뜻한 말이나 행동을 베푸는 것입니다. 위로가 필요하다는 것은 그만큼 당장 해결해 줄 수 없는 고통이 많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 세상에는 사람이 해결해 줄 수 없는 문제들이 많기 때문에 우리가 깊은 슬픔에 빠지지 않고 인내할 수 있도록 위로가 필요합니다. 욥은 자신의 고통이 사람의 노력으로 해결될 수없는 문제이기에 친구들에게 위로를 받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욥은 친구들에게 위로를 얻기보다 고통만 커졌습니다. 친구들은 욥이 고통을 겪는 것이 욥의 탓이라고 주장했지만 욥은 자신을 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고 말했습니다(16:10-11). 하지만 하나님이 자신을 이유 없이 적대시 하신다는 사실에 누구도 공감해 주지 않았고, 위로를 얻지 못했습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적대시 하신다는 것을 무섭게 느꼈습니다. 하나님이 진정 사람을 위하시는 분이신지, 혹시라도 하나님이 사람을 심술궂게 다루시면서 즐거워하시는 분은 아니신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사람을 정말 사랑하신다면 지금 겪는 고난이 어떤 이유인지, 목적이 무엇인지라도 듣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7절). 욥은 마치 자신이 강도에게 폭행을 당하는 것 같아서 ‘강도다 사람 살려’라고 외치지만 그 강도가 바로 하나님이시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치신다고 말합니다. 나무는 가지가 잘려도 다시 살 수 있지만 욥은 자기가 하나님께 뿌리 채 뽑힌 것 같다고 말합니다(10절). 욥은 포위당한 성 같아서 도망갈 수 있는 곳은 아무데도 없고(12절), 자신을 도와주는 이가 아무도 없고, 가족과 친구마저 자신을 떠나고 무시하고, 어린 아이들까지 자기를 비웃는다고 말합니다(13-19절). 그는 뼈와 살이 말라붙는 것 같은 지옥의 외로움과 괴로움을 호소합니다.
욥은 하나님이 부당하게 자신을 치신다고 일관되게 말합니다. 물론 욥은 자신이 완전히 죄가 없다는 것을 주장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자신이 하나님이 제시하신 방법으로 죄를 주의해서 다루었고, 희생제사를 통해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해주시는 것을 알았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여김 받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신을 인격적으로 상대해주시고,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설명해주셔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욥은 자신의 고통이 부당한 것이고,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리고 싶었습니다. 억울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믿었던 친구들이 그런 자신의 억울함과 부당함을 들어주지 않았고, 결국 모든 사람들이 그 친구들처럼 자기에게 등을 돌릴 것을 알았기에 욥은 자신의 처지를 대변해줄 자를 찾습니다. 본문 19장 25-27절을 쉬운성경으로 보면 욥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 구세주께서 살아 계신다는 것을 내가 이미 알고 있으니, 결국 그가 땅에 서실 것이네. 내 가죽이 썩은 후에라도, 이 몸이 썩은 후에라도 내가 하나님을 뵐 것이네. 내가 그분을 내 두 눈으로 바라볼 걸세. 내 심장이 기대감으로 두근거리네.” 여기서 구세주, 구속자는 히브리어 원문으로 ‘고엘’이라는 단어인데, 망해가는 한 가정의 재산과 가족을 가까운 친척이 대신 부담하고 책임지는 히브리인들의 제도입니다. 이것은 룻기에서 중요하게 다뤄집니다. 엘리멜렉과 아들들이 모두 죽자 과부가 된 아내 나오미와 며느리 룻은 열악한 형편을 감수하고 예루살렘에 왔는데, 보아스가 신실한 며느리 룻을 사랑해서 엘리멜렉 가문을 책임지게 됩니다. 여기서 고엘, 즉 기업무름의 의미가 잘 드러납니다. 그래서 욥은 자신의 형편, 누구도 알아주지 못하는 억울함과 답답함을 대신 부담지시고, 해결해주실 고엘, 구속자를 기다린 것입니다. 욥은 해결될 수 없는 극한 고통과 친구들의 공격 속에서 자신의 구속자를 찾았습니다. 자신을 해방시켜줄 구원자를 찾았습니다. 욥은 자신이 죽어서 몸이 썩게 된 후에라도 그분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욥이 이렇게 아직 알지 못한 구속자를 찾은 것은 본문 19장 뿐 아니라 앞에서도 나타납니다. 16장 19절을 보면 “지금 나의 증인이 하늘에 계시고 나의 중보자가 높은 데 계시니라”라고 말합니다. 또 17장 3절을 보면 “청하건대 나에게 담보물을 주소서 나의 손을 잡아 줄 자가 누구리이까”라고 욥이 말합니다. 담보, 보증은 나의 권리를 손해보고, 희생하면서 다른 누군가가 떳떳하게 권리를 행사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욥은 자신의 결백함, 억울함, 고난의 부당함을 변호해 줄 중보자, 보증인을 찾았습니다. 그분을 만날 것을 확신했습니다. 욥은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계신 그분에게 유일한 소망을 두었습니다.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다른 누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욥의 구속자, 중보자, 보증인이 되시기 위해 욥처럼 부당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욥보다 더한 하나님의 진노와 적대감을 겪으셨습니다. 16장 10-13절에서 “무리들은 나를 향하여 입을 크게 벌리며 나를 모욕하여 뺨을 치며 함께 모여 나를 대적하는구나 하나님이 나를 악인에게 넘기시며 행악자의 손에 던지셨구나 내가 평안하더니 그가 나를 꺾으시며 내 목을 잡아 나를 부숴뜨리시며 나를 세워 과녁을 삼으시고 그의 화살들이 사방에서 날아와 사정 없이 나를 쏨으로 그는 내 콩팥들을 꿰뚫고 그는 내 쓸개가 땅에 흘러나오게 하시는구나”라는 욥 자신의 고통에 대한 비유는 예수님이 실제로 조롱당하고 십자가에 넘겨진 고난을 예표합니다(마 27:27-31).
욥이 누구에게도 지지와 위로를 받지 못하고 철저히 고립되었듯 예수님은 머리 둘 곳 하나 없으셨고, 가족들도 예수님을 믿지 않았고, 제자들도 대부분 예수님을 떠났고, 처참한 모습으로 외롭게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죄 없는 욥을 죄로 여기시고, 적대시 하셨듯이 하나님께서는 죄 없으신 예수님을 죄인으로 여기셔서 적대시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죄인들을 향한 거룩한 증오를 대신 겪으셨습니다.
이렇게 욥은 세상 어떤 것도 위로가 되지 않는 순간에 아직 본 적이 없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로로 삼았습니다. 욥이 원한 그 순간에는 하나님이 나타나지는 않으셨고, 어떤 말씀도 하지 않으셨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욥과 함께 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욥이 느끼지 못했지만 하나님은 함께 하셨습니다. 그래서 욥은 친구들과의 대화가 거듭될수록 자신이 스스로 알 수 없는 분을 갈망하게 되었고, 그 분이 자신의 억울함을 해결해주실 것을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분명 성령께서 욥에게 초월적인 지식을 불어넣어주셨을 것입니다. 욥은 고난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예언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무고하고 부당한 고난을 당한 욥의 중보자요 구속자요 위로자가 되기 위해 예수님은 욥과 비교할 수 없는 부당한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죄 없이 고난당하신 것은 부당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부당하게 고난당하신 것은 구원의 은혜가 결코 어울리지 않는 우리들에게 은혜가 베풀어지는 이 부당한 일을 가능하게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겪는 고난에 대해서만 부당하다고 여기지만 우리가 하나님께 얻는 은혜도 우리 죄인들에게 부당한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 속에서 이해할 수 없고, 억울하고 부당한 고난과 사고를 겪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 어떤 것도 누구도 그 문제 해결을 위해 도움이 되지 않는 순간에 부딪힐 수 있습니다. 그 때 우리에게 유일한 위로가 되는 것은 욥이 바라보았던 그분,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의 부당한 고난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은혜를 받았으니 이유를 알 수 없는 고통도 감당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깁니다. 그 은혜를 주시기 위해 주님이 부당한 고난을 당하셨다는 사실을 알 때에 우리는 위로를 얻을 수 있고, 이 고난을 통해 욥처럼 예수 그리스도께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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