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33:1-33 (32-37장)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세 친구들과 욥의 팽팽한 설전이 세 번 오고 간 후 새로운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는 엘리후라는 젊은이입니다. 그는 앞에 등장한 세 친구들보다 인간의 고난과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 좀 더 참신하면서 심오한 것처럼 여겨지는 주장을 합니다. 엘리후는 욥에게 자기도 똑같은 인간이기 때문에 지금부터 하는 말들 때문에 자기를 너무 두려워하거나 압도될 필요는 없다고 말합니다(33:7). 그렇게 그는 처음에 자기 이야기를 들어달라는 부탁을 하며 조심스러운 말로 시작하고 욥의 고난에 가장 공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자기가 말하는 것에 대한 확신이 어느 친구들보다 강해서 자기가 마치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선지자인 것처럼, 말하지 않으면 폭발할 것 같다는 심정을 드러내기까지 합니다. 이제 32장부터 37장까지 걸쳐 나타나는 엘리후의 말들을 요약해보면 이렇습니다.
엘리후는 다른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먼저 욥이 자기를 의롭다고 여기고, 자기에게 응답하시지 않는 하나님을 비난한 것에 대해 지적합니다. 그는 욥에게 하나님이 사람의 요청에 반드시 응하시고 대답하셔야 할 의무가 없으시고, 또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이미 항상 말씀하고 계시는데 인간이 그 말씀을 무시하고 있다고 말합니다(33:13-24).
엘리후는 앞에서 세 친구들이 주장한 인과응보론에서 벗어나 고난이 그 사람의 죄 때문이 아니라 성숙과 관계를 위한 것일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 무관심한 채로 살아가는 인간이 하나님을 찾게 하시고 대화하시려고 고난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즉 인과응보론이 고난의 원인인 과거에 집중한다면 엘리후는 고난을 통해 얻게 될 유익이라는 미래의 가치에 집중합니다. 고난에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죄 때문이 아니어도 고난을 통해 사람이 하나님께로 시선을 고정하고, 고난과 죽음에서 빠져나와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경험하면서 하나님께 엎드리게 하는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고난을 겪고, 죽음의 문턱까지 가게 하셨다가도 구원하셔서 자기를 돌아보게 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33:16-30). 엘리후는 고난에 대한 탁월한 설명을 했습니다.
그런데 34장에 가서 엘리후는 욥을 조롱하듯 비난합니다. 엘리후는 하나님이 악인들을 다 아시기 때문에 반드시 응징하시는데, 악인들이 잘 되고, 때로는 높은 자리에도 앉히시는 것은 그들을 통해 고집스럽고 악한 백성들을 다루시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욥이 그런 하나님을 모르고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고, 자기에게는 이유 없는 고난을 주시면서 악한 자들은 내버려두시는 하나님이 불공정하시다고 원망한 것은 착각이라고 그는 말합니다. 엘리후는 욥이 하나님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하나님을 판단하고, 악한 말을 하고, 하나님께 반역행위를 한 것이라면서 욥의 친구들의 동조를 이끌어내 자기와 한편으로 만들고, 욥은 고립시키려는 듯한 태도를 보입니다. 결국 36절에서 “나는 욥이 끝까지 시험 받기를 원하노니 이는 그 대답이 악인과 같음이라”라면서 욥이 계속 벌 받기를 바란다고 말합니다.
35장-36장에서 엘리후는 욥이 인간의 선함과 악함에 대해 하나님이 무관심하다고 항변한 것은 잘못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삶과 행위에 무관심하신 것 같지만 반드시 선한 자들을 보상하시고, 악한 자들을 징벌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착한 자에게 당장 보상하지 않으시고, 악한 자를 당장 벌주지 않는 것은 그들에게 기회를 주시고 참으시고 경고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은 불만을 갖지 말고 인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식으로 일하시는 것에 불만을 품거나 낙심하지 말고 짐승들이 폭풍이 다가오는 것을 직감하듯, 심판의 때가 오는 것을 알아차리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37장에서 엘리후는 하늘의 구름과 바람과 번개와 비를 통해 사람이 설명할 수 없는 하늘의 현상들로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보이시고, 자신을 경외하게 만드시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굴복하라고 말합니다. 이는 마치 다음 38장에서 하나님이 등장하셔서 욥에게 피조세계를 보이시면서 질문하시는 일을 미리 준비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러한 엘리후의 조언이 과연 욥에게 위안과 격려가 되었을까요? 욥에게 나타나타나신 하나님은 세 친구에 대해서는 말씀하시지만 엘리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으십니다. 엘리후가 흠 잡을 것이 없기 때문일 수도 있고, 언급할 가치가 없어서 그러셨을 수도 있습니다.
엘리후는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고, 답답하게 했지만 신비하게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합니다. 33장 24절에서 그는 하나님이 고난의 끝자락에서 사람을 구원하고 회복하실 때 “그를 살려줘라 내가 대속물을 얻었다”라고 천사에게 명령하신다고 말합니다. 또 35장 2절에서 엘리후는 욥을 비난하면서 “그대는 그대의 의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말이냐”라고 말했습니다. 죄인 대신 죽임당하는, 죄를 대속하는 것이 소나 양과 같은 제물의 역할이었는데 동물들은 사람의 죄를 진정으로 완전하게 해결할 수 없어서 참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진노하실 우리의 죄를 예수님이 대신 지셨고, 우리는 하나님이 옳다고 여기시는 의를 입게 되었습니다. 욥은 하나님이 요구하신 제사에 충실했지만 하나님이 그를 의롭다고 여기실 수 있는 참된 근거는 욥의 시대에 아직 일어나지 않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었습니다. 엘리후는 욥을 비난하기 위해 우리에게 대속물이 필요하다는 것, 사람을 의롭게 하는 것이 하나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말했지만, 죄 없고 의로운 예수님의 부당한 고난을 예표한 욥, 하나님께 의로운 자로 여김 받은 욥이 엘리후의 그런 비난을 받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엘리후는 세 친구들의 한계를 넘어 그들이 주지 못하는 답변을 욥에게 주려했고, 욥의 입장에서 진심으로 위로하려 했고, 욥의 친구들을 꾸짖었고, 욥에게는 겸손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다시 인과응보의 한계 속에서 욥을 비난했고, 친구들과 한편이 되는 듯 했고, 거만하게 보이는 태도를 드러냈습니다. 그래서 엘리후에 대한 평가가 상반됩니다. 많은 욥기 설명들, 주석가들은 엘리후에 대해 회의적이고 비판적입니다. 그것에 대한 반론으로 엘리후를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그가 단점이 있지만 이사야나 세례요한과 같이 하나님의 등장을 준비하는 역할을 한다고 긍정적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물론 엘리후는 고난에 대해,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 긍정적인 설명을 한 것이 있지만 결국 우리에게 답답함을 안겨주고, 진짜 해답이신 하나님의 오심, 하나님의 설명을 듣고 싶은 갈증을 유발합니다. 하나님과 사탄 사이에서 일어난 일, 즉 욥이 겪는 일의 배후를 알고 있는 독자들, 우리에게는 세 친구들의 말이 안타깝고도 답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등장한 엘리후는 사람들이 잔뜩 기대를 품었다가 오히려 더 실망하고 더 답답하게 만드는 역할을 합니다. 앞의 세 친구들보다 더 어이가 없게 만듦으로써 다음 장면에서 하나님이 욥에게 나타나심을 더 속 시원하게 만드는 효과를 주는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그는 하나님의 등장을 준비시키는 것 같습니다.
친구들의 해석대로 우리가 겪는 고난은 인과응보적일 수도 있고, 자신의 내적 성찰을 위한 기회가 되기도 하고, 하나님이 책망하시고 경고하시는 일이 되기도 하고, 식어진 하나님과 관계를 불붙이는 계기가 될 수 있고, 인생을 진지하고 새로운 시각으로 살게 만들기도 하고, 우리가 당장 알 수 없는 목적이 거기 숨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 세상도 고통의 의미에 대해 설명하고, 노래하고, 아름답게 포장하려고 애씁니다. 고난을 숭고하게 포장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고통당한 자들을 성자로, 열사로 추앙하고 높이기도 합니다. 또 성도인 우리는 때로 자기가 당하는 고난을 잘 이겨내려고 하나님이 의도하셨을 법한 의미를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런 해석과 적용이 우리에게 필요하긴 하지만 때로 고난을 경험한 나에 대한 자기만족을 위한 도구가 될 위험이 있습니다. 그것이 욥의 친구들의 한계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지 고난을 극복하는 유익을 얻는 것과 고난의 의미를 알아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고난을 통해 곧 우리 앞에 오실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친구들을 비롯해 엘리후 마저 욥에게 하나님을 뵙고자 하는 열망을 더욱 증폭시켰던 것처럼 우리는 고난을 통해 그날을 더욱 준비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가 고난 속에서 겪는 세상의 헛됨과 상실감과 인생의 무너짐과 죽음 이후 심판대 앞에 설 두려움 속에서 희망을 얻게 합니다. 우리는 고난이 더할수록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을 가장 큰 위로와 기쁨으로 소유하게 됩니다.
'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욥기강해 (12) 욥기 39-41장 (0) | 2021.07.18 |
---|---|
욥기강해 (11) 욥기 38장 (0) | 2021.07.11 |
욥기강해 (9) 욥기 28장 (0) | 2021.06.27 |
욥기강해 (8) 욥기 16, 17, 19장 (0) | 2021.06.20 |
욥기강해 (7) 욥기 11, 20장 (0) | 2021.06.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