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8:1-22 (18, 25장)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우리는 지난 시간 엘리바스를 통해 하나님을 인과관계, 권선징악의 원리에 묶여 계신 분으로 제한하는 것의 한계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런 세계관을 가지고 있으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좋은 결과를 얻는 것이 우리의 행위에 달려 있다는 것을 가르칠 수밖에 없습니다.
엘리바스에 이어 또 다른 욥의 친구 빌닷이 욥의 고난에 대해 설명하려 합니다. 빌닷의 말은 우리가 읽은 8장과 18장과 25장에 나옵니다. 욥이 고통 때문에 하나님께 따지듯 묻고, 자신의 무죄에 대해 주장하자 빌닷은 욥에게 언제까지 울분을 터뜨리고 불평과 원망을 쏟아놓겠냐면서 욥의 입을 막으려고 합니다. 빌닷의 기본적인 논리는 엘리바스와 동일합니다. 바로 하나님이 권선징악, 인과응보의 원리에 충실하시다는 것을 바탕에 둡니다. 욥이 분명 죄가 있기 때문에 고통을 겪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욥이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고 잠잠하면, 즉 하나님께 복 받을 조건을 잘 갖추면 회복될 것이라고 좋은 결과를 얻을 것이라고 그는 주장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잘 아는 8장 7절의 내용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라고 빌닷은 말합니다. 사람이 착하고, 하나님께 겸손해야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우상 수준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빌닷은 엘리바스와 유사한 주장을 하지만 그것을 뒷받침할 다른 근거를 제시합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들이 오랜 시간 검증하며 쌓아온 전통적 지혜의 권위입니다. 9-10절을 보면 빌닷은 “우리는 다만 갓 태어난 사람과 같아서, 아는 것이 없으며, 땅 위에 사는 우리의 나날도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조상들이 네게 가르쳐 주며 일러주지 않았느냐? 조상들이 마음에 깨달은 바를 말하지 않았느냐?”라고 말했습니다. 한 사람이 인생 속에서 경험하고 깨닫는 것은 제한되기 때문에 오랜 시간 속에서 쌓여온 지혜, 검증된 원리를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전통적 지혜의 권위에 따라 욥 너의 고난은 너의 죄 때문이니 조용히 반성하고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가 되도록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빌닷은 전통적 지혜의 권위 말고 또 다른 권위를 말하는 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권위입니다. 25장 2절을 보면 그는 하나님은 절대적인 주권과 엄격한 권위를 말합니다. 빌닷은 욥에게 하나님의 주권과 권위에 순종하라고 말합니다.
갈대 같은 식물의 생명이 흙에 의존하고 있는 것처럼, 또 집의 기초가 땅에 의존하고 있는 것처럼, 인간의 기초는 하나님이라고 빌닷은 말합니다. 즉 빌닷이 말하는 오랜 시간과 전통 속에서 확인된 지혜라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께 의존해 있으니 하나님께 대항하지 말고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빌닷의 말은 사실입니다. 진리입니다. 그런데 빌닷은 18장에 가서 욥에게 회개할 것을 요구하면서 그에게 들으라고 회개하지 않는 자가 당할 저주 받는 운명에 대해 쏟아냅니다. 그는 악한 자가 결국 어둠과 함정에 빠지고, 덫에 걸리고, 무서운 것이 덮칠 것이고, 재앙과 질병에 사로잡히고 뺏기고, 잊혀지고, 대가 끊기고, 참혹해지고, 죽음이 있을 것이라고 무섭게 저주를 퍼붓습니다. 마지막으로 25장에서 빌닷은 구더기 같고 벌레 같은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깨끗하다고 의롭다고 말할 수 있겠냐고 겸손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는 욥을 아주 냉혹하게 비판합니다.
하나님은 가장 높으시고, 감히 어떤 다른 존재도 하나님을 거스를 수 없습니다. 우리 역시 당연히 하나님의 주권을 높이고, 그 아래 순종하기를 기뻐해야 합니다. 그러나 욥의 친구들은 하나님의 주권과 공의를 높이지만 뭔가 이상합니다. 그들이 말하는 하나님의 주권은 일방적이고 억지로 복종할 것을 요구하는 것처럼 느끼게 만듭니다. 욥이 죄가 없는데도 세상의 주인이신 전능자의 주권에 그냥 순응해라 무조건 잘못했다고 빌어라, 하나님께 인간이 저항할 수 없으니 그냥 숨죽이라는 말을 하는 것 같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욥이 저지르지도 않은 죄들을 저지른 것처럼 지적하고 저주를 하기도 합니다(22장 엘리바스). 그들은 마치 하나님의 대변자인 것처럼 말합니다. 겉으로는 그들이 하나님을 높이는 것 같지만 말투는 점점 폭력적으로 변하고, 욥을 굴복시키기 위해 위협합니다. 진정 하나님의 권위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틀렸다는 것을 결코 인정할 수 없어서 하나님을 끌어들이는 것 같습니다.
신약시대의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자기 조상들인 구약의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 포로로 끌려가고 망한 이유가 율법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기 조상들보다 더 열심히 율법을 지키려고 몸부림쳤습니다. 또 하나님의 주권, 위엄을 중요시 했습니다. 하나님을 모욕하는 일을 참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이 죄인들을 사랑하시고, 안식일에 약한 자들을 돌보시고,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정직하게 드러내시면 참지 못하고 마치 자기들이 하나님의 심정을 대변한다는 듯이 분노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사랑보다 율법이 우선이었습니다.
그런 율법주의자들의 태도와 행위는 욥의 친구들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사람이 율법을 지키면, 죄를 멀리하면, 하나님을 높여드리면 복 주실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들의 조상들이 율법을 지키는 것에 실패한 것은 표면적인 원인입니다. 근본적으로는 그들이 인생의 고난 때문에 마음이 흔들리며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신앙생활 했는데도 하나님은 알 수 없는 고난을 주시더라. 하나님을 믿었는데 만사가 잘 되는 것은 아니더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실망하고 믿음을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신뢰하지 않으니까 다른 우상을 찾고, 하나님의 사랑에 만족하고 감사하지 못하니까 다른 사람들을 사랑할 동기를 얻지 못한 것입니다. 그것이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을 어기게 만들었습니다. 뱀이 하와를 속일 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의심하게 한 것처럼 이스라엘도 똑같이 하나님에 대한 불신에 넘어진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는 것을 불신해서 선악과를 먹었듯,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사랑에 만족하지 않고, 불신한 것이 율법을 어기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런데 신약의 율법주의자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한 채 율법을 더 엄격하게 지켜서 조상들의 실패를 극복하려고, 만회하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사랑하는 분이라는 것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복음 5장에서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욥의 친구들은 인과응보라는 원칙으로 간편하게 하나님을 자신의 이해 틀 안에 가두고 그 원리로 자신들을 높이고 상대를 비판하는 도구로 사용했습니다. 그런 논리를 욥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하나님의 주권과 위엄을 가지고 굴복시키려 했습니다. 그들이 그런 것은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그저 위대하고 전능한 주권자이기만 한다면 우리는 고통을 피하고 복을 얻기 위해 고통 속에서 이를 악물고 참아야 합니다. 무조건 잘못했다고 빌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두렵고, 고통이 계속될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복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친구들의 논리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이 사랑이시라고 말합니다. 정말로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진정한 성도는 이 지점에서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사랑이신 하나님, 나의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하나님 왜 나를 고통스럽게 하시는가?’하고 질문하게 되는 것입니다. 욥은 그것 때문에 괴로웠고 울부짖었고 원망했습니다. 그런데 친구들은 그런 욥의 입을 틀어막으려 한 것입니다.
욥기는 물론이고 성경은 고난을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이니 인간은 그냥 다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하나님의 주권 신앙을 설명할 때 강제적 복종을 의도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세상 모든 것을 뜻대로 하실 수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인격을 유린하시거나 힘으로 횡포를 부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욥기 마지막으로 가면서 우리가 발견하겠지만 하나님은 욥에게 자신의 주권에 무조건 순응하라고 일방적으로 억압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선과 악을 자기 감각을 기준으로 판단하는 자기중심성을 벗어나서 하나님의 사랑이 세상 곳곳에 충분하게 나타나고 있음을 확인하게 하십니다. 고통을 감당하기 어렵고 그것을 주시는 하나님을 우리가 당장에 이해할 수 없지만 우리의 안락함도 고통도 모두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주고, 확인하게 하는 과정임을 우리가 신뢰하도록, 믿음을 가지도록 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자신의 주권을 선하게 펼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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