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욥기강해 (7) 욥기 11, 20장

따뜻한 진리 2021. 6. 13. 21:33

욥기 11:1-20 ,20장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욥이 자신의 고난에 대해 책임이 없다고 계속 주장하자 친구 엘리바스와 빌닷이 거칠게 비판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이유 없이, 사람이 잘못이 없는데 고난을 주시는 분이 아니시기에 욥이 하나님께 원망과 억울함을 쏟아내는 일을 그만두고, 아무것도 숨길 수 없는 하나님 앞에서 회개해야 한다고 재촉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매우 잘 안다는 듯 교만한 태도를 보였고, 욥이 끝까지 회개하지 않으면 회복을 얻지 못하고 악인들이 당할 저주를 똑같이 겪게 될 것이라고 위협했습니다.

 

    이어서 오늘 본문에 등장한 세 번째 친구 소발도 앞의 친구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단지 그가 추가 한 논리는 하나님의 생각과 판단은 심오해서 사람이 다 이해할 수 없는데, 욥이 마치 하나님의 뜻을 잘 아는 것처럼 자기 결백을 변호하는 것이 역겹다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욥이 당해야 할 재난의 일부만 내리셔서 욥이 아직도 깨닫지 못하는 것 같다고 비아냥거립니다(6-7절). 그는 욥이 신속히 회개하는 것이 은혜를 얻을 수 있는 기회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욥이 굴복하지 않자 20장에 가서 욥에게 저주를 퍼붓습니다. 소발은 악인의 안전함과 기쁨은 잠시고, 악인이 꿀처럼 여긴 죄는 독사의 독이 되어 그를 죽일 것이고, 진노의 날에 하나님께서 그를 비참하게 하시고 모든 것을 빼앗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욥에게 충고하는 세 친구들의 말은 옳은 내용이긴 하지만 그것은 부분적인 지식이고 하나님에 대한 편견을 담고 있고, 욥의 고난이 어떻게 일어난 것인지를 모르면서 한 말들입니다. 그런데 욥기는 그것을 지루할 정도로 길게 담아내고 있습니다. 이 친구들의 충고가 욥에게 적절하지 않고, 유익과 위로를 주지도 못했지만 성경이 그 긴 대화를 담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첫째, 친구들의 경고가 누군가에게는 사실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끝까지 부인하는 자들에게는 친구들의 주장이 진리가 됩니다. 먼저 엘리바스가 주장한대로 악인들은 자신들의 행위대로, 인과응보의 원칙대로 저주와 영원한 지옥의 비참함을 당할 것입니다. 또 빌닷이 말한 하나님의 주권과 위엄, 그리고 소발이 말한 하나님의 지혜는 이 세상 사람들에게 무시되고 있습니다. 정말로 이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신을 죽이는 죄를 달콤하게 여기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친구들이 말한대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분 앞에서 회개하고 은혜를 구하는 것뿐입니다. 그런 점에서 친구들이 말한 것은 사실입니다.

 

    두 번째로 욥에게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친구들의 길고도 공격적인 조언을 욥기가 담아내는 이유는 욥이 친구들에게 당한 부당한 비방이 예수 그리스도가 비방당한 것을 예표하기 때문입니다. 욥이 인생의 고통을 겪고 있는 중에 친구들의 비난과 조롱과 저주까지 당한 것은 예수님이 당하신 말도 안 되는 공격과 비방과 조롱을 예고합니다. 예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죄를 가까이 하실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런 분이 죄인들을 사랑하셔서 죄인들 가운데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성육신과 공생애는 그 자체로도 괴로운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겪으신 그 고난은 자신의 잘못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삶과 십자가는 인과응보의 원칙에 따른 고난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욥은 고난당할 이유 없이 고난당하신 예수님을 예고합니다. 욥이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듯 욥의 친구들은 예수님을 핍박한 바리새인과 종교지도자들을 생각나게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지만 예수님에 대해 무지했고, 사람들의 현실과 고난에 해결책이나 위로를 주는 일에 무능했습니다.

 

    욥의 친구들이나 복음서의 종교지도자들은 무지했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하나님의 주권과 지혜와 능력을 알았고, 악인의 끝이 얼마나 비참한지,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무서운지도 잘 알고 있었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회개가 사람의 회복에 반드시 필요한 것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과 욥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몰랐습니다. 그들은 욥의 고난이 하나님께서 사탄의 비방과 활동을 허용하셔서 일어난 일인 것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정작 그 자신들의 판단과 말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며 욥에게 고통을 더욱 가중시키는 일이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욥의 친구들이 욥에 대해 무지한 채로 말을 쏟아낸 것처럼 바리새인과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모르면서 판단했습니다. 예수님의 고통을 가중시켰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자들을 향해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모르고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모르는 무지한 상태로 죄를 지었습니다.

 

    욥의 친구들과 종교지도자들은 무능했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욥의 고난 앞에 무력했고, 욥의 고통을 지켜보는 것조차도 감당할 수 없었고, 고통당하는 욥의 말을 계속 듣는 것도 괴로워했습니다. 그들이 욥에게 회개를 요청한 것은 욥의 고난 앞에 해 줄 것이 없는 자신들의 무력함을 드러내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욥 네가 스스로 해결할 문제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욥이 반론을 하면 자신들의 한계가 드러날까봐 더욱 짜증을 내었을 뿐입니다. 욥의 친구들은 지식과 경험은 있었지만 그것으로 욥의 문제를 해결해줄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욥의 괴로움을 가중시켰습니다. 예수님을 괴롭게 했던 종교지도자들도 많은 가르치는 일과 종교행위들을 했지만 정작 사람을 바꾸지 못한 무능함을 드러냈습니다.

 

    무지하고 무능한 친구들이 보기에는 욥이 괴로움 때문에 허튼 소리를 하는 것 같았지만 오히려 욥이 근본적인 문제를 알고 있었고, 그것이 해결되기를 바랐습니다. 친구들이 욥을 설득해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게 만들려고, 죄인이 당할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했지만 그것은 당장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한 답이었지 하나님이 진정 어떤 분이신지를 깨달아 만족할 수 있는 답이 아니었습니다. 욥은 자신의 고난이 정말 자기 죄 때문이고, 회개해서 해결될 문제라 해도, 자신의 문제 해결로 ‘과연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는 없음을 알았습니다. 친구들의 주장은 ‘하나님이 죄를 심판하시는 분이시니까 얼른 회개해서 고난과 심판을 피해야겠구나’라는 생각을 갖게는 하지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기에 피조물의 죄를 다루시며, 고난을 주시며, 회개를 요구하시는지, 하나님의 다루심을 받는 인간이 도대체 하나님께 어떤 의미가 있는지, 또 이런 고난이 지나간 후에도 하나님을 계속 신뢰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대답을 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욥은 자신의 고난을 통해 죽음을 바라봤습니다. 죽음에 소망을 둔 것입니다. 그 죽음은 삶을 끝내고 싶다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을 넘어선 그 곳에서 하나님을 뵙기를 바란 것입니다. 욥기는 그것을 말합니다. 그저 어떻게 우리의 고난을 이겨낼 수 있는가가 아니라 인간은 고난을 허락하시는 하나님께 답을 들어야 하고, 하나님을 만나길 바라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인생의 문제는 우리를 지으신 주인에게로 가야 해결될 문제라는 것을 욥은 알았습니다.

 

    친구들은 그저 욥이 가진 현재의 고통이라는 문제에만 묶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욥이 가진 하나님에 대한 갈망에 공감하지 못했고, 욥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었고, 욥 대신 고난을 당해 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사람을 지으시고 고난의 문제에 대한 열쇠를 쥐고 계신 하나님을 욥에게 보여 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욥기는 우리가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갈망하게 합니다.

 

    예수님은 욥이 예표한 바로 그분이시고, 욥이 만나고자 했던 분이며, 또한 욥의 친구들의 한계, 무지와 무능을 넘으신 진정한 친구이기도 합니다. 욥이 죄 없이 고난을 겪었듯 예수님은 자기 죄가 아닌 무고한 고난을 당하셨을 뿐 아니라 욥의 친구들이 해결해주지 못한 고난당하는 자들의 해결책과 위로가 되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욥이 원하던대로 예수님은 마침내 이 땅 여기에 사람들에게 오셨고, 죄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욥의 친구들처럼 죄인들에게 ‘네 잘못이니까 네가 회개해서 해결하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예수님 자신이 그 문제를 해결해주셨습니다. 그들의 육신적 문제를 고쳐 주셨고, 죄도 용서해주셨습니다. 욥이 원했던 대로 예수님은 고난 당하는 자에게 찾아오신 하나님,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지으신 분이 피조물들을 만나주신 순간이었습니다. 욥의 친구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답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 답이 주어졌습니다. 우리는 인생 속에서 단지 슬픔을 잊고, 질병을 치료하고, 사건을 해결하는 것으로 그칠 수 없습니다. 이 모든 일들이 왜 일어나는지에 대한 질문을 하나님께 해야 하고 답을 예수님에게서 찾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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