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3:1-38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온 세계가 힘겨워한 문제들이 서서히 해결되고 있고, 이전에 없던 대단한 일들이 계속 일어나고 있으니 갈수록 좋은 세상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질 만 하지만 그러나 이 세상에는 소망이 없습니다. 유일한 소망은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오시고, 우리의 삶에 개입하셔서 새롭게 하시는 길밖에 없습니다. 누가는 본문에서 하늘에서 임한 음성을 말합니다. 한 번은 세례요한에게, 또 다른 한 번은 예수님에게 임한 하늘의 음성입니다. 누가는 그 하나님의 말씀이 들린 것을 말하기 전 예수님 당시의 통치자들에 대해 말합니다. 그 때는 디베료가 로마의 황제가 된 지 15년이 되었던 때이고, 유대지역은 총독 본디오 빌라도가 관리했고, 헤롯이 분봉왕으로 갈릴리를 다스렸고,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였습니다. 누가가 그것을 말한 이유는 누구나 알법한 역사적 사실들을 나열함으로써 세례요한과 예수님의 등장이 같은 시간 속에서 일어난 사실임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런 대단한 정치적, 종교적 인물들에게 소망이 없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통치자들의 목소리가 아닌 하나님의 음성이 죄인들에게 소망이 된다는 것을 부각시킨 것입니다.
구약의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이 본격적인 사역을 시작하기 전 준비하는 자가 먼저 활동할 것을 예언했는데, 세례요한이 바로 그 사람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 이전에 유대인들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던 종교지도자였습니다. 사람들은 세례요한이 메시아가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유대 헤롯왕은 자기 권력을 지키기 위해 세례요한을 경계했고, 결국 감옥에 가두었다가 죽입니다. 사람들이 많이 사는 도시가 아닌 빈들, 광야에서 활동하던 세례요한에게 하늘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요한은 죄사함을 위한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이지 않습니까? 그들은 아브라함의 혈통이라는 사실이 심판 때에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고 구원을 받게 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사람이 육신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죄를 뉘우치고, 선한 열매를 나타내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세례요한은 자기에게 나와 세례를 받으려는 사람들에게 독사의 자식들, 즉 사탄의 자식들이라고 비판했습니다. ‘너희들은 아브라함의 후손,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사탄의 자식들’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깊은 죄인됨을 알지 못하고, 진정 회개하지 않고, 그저 자기에게 임할 심판만 피하기 위해 세례를 받으려 한다는 것을 세례요한은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세례요한은 그런 인간의 깊은 죄성을 꿰뚫어 보았지만 그런 죄인을 새사람이 되게 바꿀 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선지자 시므온이 아기 예수님을 안고 예언한대로 예수님은 사람들의 마음을 드러내셔서 구원하기도 하시고, 심판하기도 하실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사람의 겉을 형식적으로 지적하고 씻는 세례를 주었지만 예수님은 속사람을 진정 건드리시고 새롭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자기 능력의 한계, 즉 물세례의 한계를 알았고, 예수님이 주시는 성령과 불세례가 탁월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놀라운 분인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게 나와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 때 하늘에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라는 음성이 들렸고, 성령이 임했습니다. 하늘에서 들린 그 음성은 먼저 예수님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인지를 분명하게 말해줍니다. 앞의 2장에서 예수님은 어린 시절 성전에서 자기를 애타게 찾은 부모에게 ‘제가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하는 줄 알지 못하셨나이까’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암시하신 것인데, 세례 때 하늘에서 들린 음성은 그것이 증명되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주인의 아들이 인간 세례요한에게 회개의 세례를 받으신 장면은 예수님이 앞으로 하실 일을 암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회개할 이유, 죄가 없으시지만 죄인으로 취급되시고 십자가에서 죽임 당하실 것이기에 죄인들이 받아야 하는 회개의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인처럼 십자가에서 죽임당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부활시키셔서 사람들에게 배척당한 그가 옳으심을, 자신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리실 것입니다. 그것이 세례 때 예고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죽이게 될 예수님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들이었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음성은 이제 본격적으로 자신의 사역을 시작하실, 앞으로 죄인들에게 하나님의 진리와 사랑을 드러내시다가 온갖 고난을 겪게 될 예수님께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피를 물려받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생각했지만 진짜 하나님의 아들이 눈 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누가가 소개한 예수님의 족보는 그것을 말해줍니다. 23절을 보면 누가는 예수님을 요셉의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혈통적으로는 요셉의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마리아의 몸을 빌려 아담의 죄와 무관하게 성령으로 잉태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요셉의 아들로 태어나게 하신 것은 아담에게 약속하신 그 여자의 후손, 아브라함이 기적으로 낳게 된 그 아들, 또 하나님께 재물로 바쳐진 그 이삭이 바로 예수님을 가리킨 것임을 나타내시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는 예수님이 약속된 그분임을 말하려고 족보를 거꾸로 거슬러 하나님께로 갑니다. 누가는 유대인들이 중요시한 족보를 활용해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 하나님의 약속, 예고대로 오신 분이심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이 아브라함의 후손, 하나님의 후손, 아들이심을 말합니다. 그 아들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누가가 보여준 족보의 의미 중 또 다른 것은 유대인의 혈통만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누가가 예수님의 족보를 이전 시간으로, 위로 자꾸 거슬러 올라가 아담에게 이르고 또 그 위에 하나님이 계신 것을 말한 것은 모든 인류의 대표가 아담이고, 그 위에는 하나님이 계신 것을 말함으로써 하나님이 이루시려는 구원이 이스라엘과 유대인들에게만 미칠 은혜가 아니라 모든 민족에게 차별 없이 임할 은혜임을 말합니다. 결국 거슬러 올라가면 세상 민족은 하나님 아래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세례요한은 유대인들에게 혈통상 육체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니까 특별하다고 착각하거나, 하나님의 언약 속에서 쓰임 받았다 해서 구원이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을 불신하고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인임을 깨닫고 진정 마음으로부터 달라져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그런 변화를 위한 회개를 가르쳤고, 그런 변화 없이 하나님 백성 되려는 이기심과 간사함을 지적했고, 진정한 회개는 윤리적 변화를 가져온다는 것을 설명했지만 실상 그 자신은 사람들에게 그런 변화를 가져다줄 수, 일으킬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변화를 주십니다. 그 변화의 능력, 구원의 능력,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일은 민족이나 혈통에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진짜 하나님의 아들,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 사랑받는 아들이지만 우리 때문에 죽임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그렇게 구원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입니다. 그 사랑이 진정한 회개와 변화를 가져옵니다.
진정한 변화는 사랑을 알 때 가능합니다. 세례요한의 지적대로 심판과 징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잘못을 시인하고, 고백하는 것은 참된 변화가 아닙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그런 식으로 두려움을 피하려고 자기에게 나와 세례를 피하려는 자들을 비판했습니다. 사랑 자체이신 예수님이 죄인들을 위해 하늘로부터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사람의 죄 때문에 고난 당하시고 죽으신 것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봅니다. 또한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가 그 사랑을 알고 믿도록,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죄와 싸우도록 일하시기 때문에 그 사랑은 사람을 변화시키고, 참회하게 하고, 변하게 하고,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게 합니다. 어떤 영화에서 한 남자가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에게 사랑을 고백하면서 한 말 “당신이 나를 더 좋은 남자가 되게 한다.”라는 대사처럼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인간의 사랑이 상대에게 잘 보이기 위해, 또 사랑 때문에 많은 것이 긍정적으로 바뀌어 그 사람을 변하게 하는 것 그 이상으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예수께서 세례받으실 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이 땅에 들려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음성은 예수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들이라는 뜻인 동시에 그런 아들을 우리 죄인들에게 주실만큼 우리도 사랑하신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누가복음 강해 (5) 누가복음 4:14-44 (0) | 2021.08.29 |
---|---|
누가복음 강해 (4) 누가복음 4:1-13 (0) | 2021.08.22 |
누가복음 강해 (2) 누가복음 2:1-52 (0) | 2021.08.08 |
누가복음 강해 (1) 누가복음 1:1-80 (0) | 2021.08.01 |
욥기강해 (13) 욥기 42장 (0) | 2021.07.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