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5:1-6:11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오늘 본문에는 베드로가 예수님 말씀대로 순종해서 많은 물고기를 잡은 일, 나병환자와 중풍병자가 회복된 일, 예수님이 세리 마태의 집에서 음식을 드시며 교제하신 일, 안식 일에 제자들과 밀밭을 걸어가시다가 밀을 손으로 비벼 껍질을 날리고 드신 일, 손이 마비된 사람이 회복된 일이 나옵니다. 이 사건들을 각각 자세히 살피는 것도 필요하지만 이 시간에는 이 사건들을 죽 나열한 누가의 의도를 생각해보면서 일관된 주제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보겠습니다.
본문의 사건들 속에서 예수님은 지켜야 할 어떤 선, 규칙들을 건드리는 일을 행하셨습니다. 먼저 예수님이 바닷가에 가셨을 때 어부들은 이미 밤새도록 물고기를 잡다 허탕을 치고 사용한 그물을 씻어서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갈릴리 호수의 전문가들인데 그날 밤 허탕을 쳐서 더 피곤하고 실망스러웠을 것입니다. 어떤 일을 본업으로 하는 전문가들이 자기 일에 실패를 맛봤을 때 아마추어는 그 앞에서 조용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배를 움직이라고 하셨고, 또 그물을 다시 깊은 데로 던지라고 하셨습니다. 그들 중 어떤 자는 불만과 황당한 기색을 드러내거나 애써 숨겼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한 말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라는 말에는 그런 불만을 누르고 억지로라도 순종한 감정이 담겨 있습니다. 나중에 물고기가 많이 잡힌 후 베드로가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떠나십시오.’라고 말할 만큼 예수님의 지시는 베드로와 어부들의 자존심을 건드렸던 것입니다.
다음으로 예수님은 심한 피부병을 앓는 나병환자를 치료하실 때 그의 몸에 손을 대셨습니다. 유대인들은 나병환자를 가까이 하지 않았습니다. 나병이 옮길 위험도 있지만 누구든지 나병환자를 접촉하면 부정하게 되고, 더러워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병에 걸리면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가 끊어졌습니다. 사회적으로 고립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저 말로도 얼마든지 사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분이신데, 일부러 나병환자의 몸에 손을 대신 것입니다. 나병환자는 자기 때문에 부정해질 수 있는 예수님의 적극적이고도 자비로운 손길에 충격을 받았을 것이고, 그것을 본 사람들은 예수님도 더러워졌다고 생각하며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다음으로 예수님은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중풍병자를 고쳐서 일어나 걷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의 몸을 고치기 전 ‘이 사람아 너의 죄가 용서를 받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을 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죄용서를 예수님이 자기 마음대로 선포한 것이 선을 넘은 일이라고, 하나님을 모독한 것이라고 비난했습니다. 사실 하나님이 아닌 인간 제사장은 제사 후에 백성의 죄가 하나님께 용서받았음을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제사장도 아니고, 거기서 제사를 드린 것도 아닌데 그 사람의 죄를 용서한다고 말한 것은 예수님 자신이 죄를 용서하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암시하신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이 하신 그 말의 의미를 알아차리고 ‘감히 네가 뭔데’ 하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당시 유대인들이 아주 나쁜 죄인으로 여겼던 세리, 즉 세금 걷는 관리인 레위 마태와 친하게 지내셨습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싫어하고, 혐오하는 세리와 예수님이 친하다는 사실은 사람들에게 충격이었습니다.
다음으로 예수님은 안식일에 하지 않아야 하는 일들을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들에 있는 곡식을 손으로 따서 손으로 비벼 껍질을 날리고 먹는 것을 추수하는 일이라고 여겼습니다. 안식일에 절대 하면 안 되는 그 일을 예수님이 제자들과 행하신 것을 안 바리새인들이 충격을 받고 예수님을 비난했습니다.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님이 손이 마비된 사람을 고쳐주시기까지 하자 예수님이 안식일을 어겼다고 생각해서 죽이려고 모의했습니다.
한 개인이나 사회는 나름의 지혜, 규칙, 전통을 만들어냅니다. 그래서 그런 것을 바탕으로 다수가 유익을 누리고, 질서와 권력이 유지됩니다. 그런 방법들을 통해 자기들이 지금까지 먹고 살며 생존할 수 있었고, 공동체나 국가가 지켜질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선들을 넘으셔서 사람들이 불쾌해 하고, 당황하고, 분노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쌓아온 경험과 지식, 종교적 전통을 무시하시는 것 같은 행동들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어부의 경험과 지혜와 그의 소유에 대한 권리를 무시하는 듯했고, 유대인들이 오랫동안 목숨처럼 여긴 종교적 전통들을 무시하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떤 불만 가득한 자가 세상을 혼란스럽게 하려고 문제를 일으키는 것처럼 사고를 치고 다니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회복시키려고 그런 일들을 행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밤새도록 자기 노력으로 잡지 못한 물고기를 주시려고 불평을 살만할 요구를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물고기만 얻은 것이 아니라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사람 낚는 주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흉측하고 고통스런 나병이 생긴 사람을 만져서 예수님 자신이 더러움, 부정함에 영향을 받는 자가 아니라 반대로 그것을 없애는 거룩한 능력의 원천임을 나타내셨고, 중풍병자의 시체와 같던 몸을 다시 회복시킬 뿐 아니라 사람의 죄를 용서하시는 주권자임을 나타내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안식일의 참 뜻을 잊은 채 형식적으로만 일하지 않는 것이 헛된 것임을 알게 하셨습니다. 진정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사람을 하나님 앞에서 복되게 하는 안식일을 가르치셨습니다. 사람을 위하는 일을 안식일에 행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먹이시고, 아픈 사람을 고치셨습니다. 그 과정에서 어떤 자들은 예수님을 따르고 은혜를 입고, 시몬 베드로처럼 예수님이 하시는 일에 불만을 품은 것에 회개하며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했지만 어떤 자들은 자신들이 이익과 권력을 누리게 해준 그동안 쌓아온 방식을 고수하려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자신들의 질서를 무시하는 선을 넘는 예수님께 불만을 품었습니다.
그래서 39절에서 예수님은 새 포도주와 새 가죽부대(가죽주머니)를 비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새 포도주와 같으셔서 새 가죽부대와 같은 사람만이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있는데, 입에 맞는 오래된 포도주에 길들여진 것처럼 자신들의 익숙한 방식을 지키려는 인간들은 새 포도주이신 예수님을 거부할 것임을 비유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스스로 새 부대가 될 수 없습니다. 자신들을 그대로 두면서 예수님에게서 유익을 얻으려는 자들은 새 포도주가 발효 팽창되면서 오래된 가죽부대가 부풀어 터지듯 실망과 분노에 폭발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스스로 새 가죽부대가 될 수 없습니다. 새 포도주와 같은 예수님을 환영하고 믿고 순종할 새 가죽 부대와 같은 사람은 예수님이 만들어 내십니다. 마치 이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 생겨날 피조물들에게 명령하셨듯 예수님이 말씀하신 자들이 새 사람이 되어서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고, 예수님의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본문의 사건들은 예수님께서 창조주와 구속주로서의 권위와 능력을 가지시고 행하신 것을 보여줍니다. 그분은 일방적으로 의도하시고, 명령하시고, 말씀하십니다. 그대로 이뤄집니다. ‘깊은 데로 던지라, 물고기가 아닌 사람을 취하리라, 깨끗함을 받으라, 죄 용서를 받았다, 나를 따르라,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다, 네 손을 내밀라’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대로 이뤄졌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외적으로 변화시키실 뿐 아니라 내적으로 새롭게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지셨고, 사람을 회개하게 만드는 분이라는 사실은 중요합니다. 21절에서 바리새인들이 ‘예수 저자가 감히 제 맘대로 사람의 죄를 용서를 한다고 말해’라는 뜻으로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죄를 사하겠느냐?’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예수님은 사람의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24절에서 예수님은 자신에게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32절에서 자신이 회개시키러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회개하게 해서 새사람 되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세례요한은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외쳤지만 회개하게 만들 수는 없었습니다. 그는 지옥을 피하기 위해 형식적으로 세례 받으려는 자들을 지적했지만 회개하도록 만들지는 못했습니다. 그는 사람의 죄를 용서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인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죄를 씻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사람의 기준으로는 잘못한 자가 정직하게 잘못을 시인하고 무거운 책임감을 드러내야 용서가 가능한데 예수님은 ‘이렇게 해야만 죄용서를 해주겠다.’가 아니라 조건 없이 이미 죄를 용서해 주신 것을 알려주셨습니다.(자신의 십자가를 근거로) 예수님은 자신이 원하시는 대로 물고기도 잡게 하시고, 나병환자와 중풍병자를 치료하신 것처럼 자신이 원하시는 대로 사람을 용서하시고 회개하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죄를 일체 지적하지 않으셨음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자신의 실패와 교만을 덮으시고 오히려 많은 물고기를 잡게 하신 예수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자신의 죄를 회개했습니다. 우리 역시 그렇게 예수님의 사랑에 근거하여 예수님을 알아보고 믿고 회개하길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이렇게 아무 조건 없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예수님을 만나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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