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6:12-49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예수님은 산에서 기도하신 후 자기를 따르던 제자들을 불러 그 중 열둘을 사도로 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은 평지로 내려와서 병든 자들과 귀신 때문에 고통당하는 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열 두 사도와 많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가난한 자, 배고픔에 주리는 자, 우는 자, 미움 받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런 어려움을 겪는 모든 자들이 복되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22절에 나온대로 인자, 즉 예수님을 따르기 때문에 이 땅에서 그런 고난을 겪는 자들이 복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자들을 하나님께서 위로하시고 갚아주실 것이니 낙심 말고 기뻐하라고, 참 선지자들도 그런 고난을 당해왔으니 놀랄 일이 아니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반대로 이 땅에서 부유한 자, 배부른 자, 웃는 자, 많은 사람에게 칭찬 받는 자는 화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 역시 이 땅에서 그런 복을 겪는 자가 모두 재앙을 당할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바로 인자이신 예수님을 부인하면서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자들이 그런 화를 당한다는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백성들의 죄를 꾸짖고 회개를 촉구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도록 만들기보다 사람들이 듣기 좋아하는 말을 하면서 인기를 얻고 편안한 살 길을 찾았습니다. 하나님 편에 선 자들은 환영받기보다 미움 받을 것을 예상해야 합니다. 때로 사람들이 좋아하고 지지하는 것 같아도 오래지 않아 변질되는 것을 볼 것입니다. 예수님이 무리들의 그런 변덕스런 반응을 겪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세상 사람들과 같을 수 없고, 불의와 헛된 삶에 동조할 수 없고, 어떤 인간도 아닌 하나님만이 주인되심을 드러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 땅에서 많은 곤란함과 고독과 어려움을 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이 그런 고통을 주는 원수 같은 세상, 악한 사람들을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비웃고 저주하는 자를 위해서 복을 빌며 기도하고, 이 뺨을 치거든 저쪽 뺨도 내밀고, 겉옷을 빼앗으면 속옷까지 내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보여주신 사랑과 용서였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도 자기와 같기를 요구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27절에서 35절은 내가 상대방에게 잘 해준 대로 돌려받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지 말고, 원통한 고난을 당해도, 조건 없이 사랑과 자비를 베풀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31절을 보면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것은 상대방이 나에게 잘 해줄 것을 기대하면서 잘할 것을 말하는 계산적인 태도를 지지하는 내용처럼 해석되기 쉽습니다. 그런데 그런 해석은 전후에 나오는 무조건적인 용서와 사랑이라는 문맥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31절은 우리가 남에게 대접받고, 이해받고자 하는 바람이 끝이 없는 것처럼 그 입장을 뒤집어서 남한테 그렇게 한계를 두지 말고 은혜를 베풀어보라고 예수님이 도전하신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자신의 제자들이 이 세상에 선한 의도로 복음을 전할지라도 악한 반응과 핍박이 돌아올 수 있음을 예고하셨고, 제자들 자신이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과 자비를 누리고 있으니 그런 사랑을 세상 사람들에게 베풀다가 희생될 각오를 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제자로서의 삶을 살 때 겪는 일들을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고 보응과 보상으로 갚으실 것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계속해서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이 부딪히게 될 사람들의 죄에 대한 태도를 가르치셨습니다. 그것은 죄를 인간적인 지혜로 상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핍박하는 자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기 위해, 자신들이 전하는 복음에 굴복하게 만들기 위해 날카로운 안목으로 죄를 지적하고 고쳐놓고 싶겠지만 그렇게 하면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는 꼴이고 결국 둘 다 망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히려 선생이신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처럼 제자들도 그런 방법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셨습니다(40절). 제자는 하나님의 용서가 필요한 자기 안에 있는 더 큰 죄를 볼 수 있어야 상대방의 죄를 바른 태도로 다룰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자기 죄를 하나님 앞에서 먼저 다루지 않게 되면 우리는 외식하게 됩니다. 외식이 무엇입니까? 자기 모습을 겉으로만 그럴듯하게 포장해서 남 앞에서 존경받고, 가르치고, 지적할 자격이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나무의 상태가 열매로 드러나듯, 자기 안에 쌓아온 생각과 마음이 말로 나오듯 실체가 드러나기 때문에 누구도 속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말로만 주님이라고 부른다면 무너질 기초위에 집을 짓는 것입니다. 단단히 굳은 진흙이 반석인 줄 알고 그 위에 집을 지으면 비가 많이 올 때 결국 무너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이유는 먼저 자신이 세우신 열두 제자들이 앞으로의 고난을 예상하고 그 속에서도 소망을 갖도록 준비시키신 것입니다. 열두 제자는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처럼 도덕적인 우위에 있으면서 존경을 받고 군림하게 하려고 세워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가시는 십자가의 길을 따르게 하려는 것임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동시에 자기를 따르는 수많은 무리들에게는 자신들이 과연 무엇을 위해 예수에게 몰려나왔는지를 생각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저 자신이 얻을 이익에만 관심을 가진 자는 자기 문제만 해결되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내용들에는 부담을 느끼고 슬며시 자리를 뜰 것입니다.
그런 자들은 오직 자신에게 관심이 있지 그런 기적을 통해 은혜를 베푸시는 그분이 누구이신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이 죄인인 자신의 인생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분, 하나님 앞에서 영생을 얻도록 하시는 구속자임을 알지 못합니다. 자신도 발견하지 못하고,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도 알지 못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는 영적 맹인으로 남아 자기 의를 위해 살고, 자신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고 남들에게 지적받지 않기 위해 애쓸 뿐입니다. 그런 자에게 도덕은 자기가 남들보다 좀 낫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수단이고, 그의 겸손은 비난받지 않기 위한 방어책에서 나오는 위선이고, 불의에 대한 분노도 자신의 양심이 살아있다는 자랑에 불과하며, 자신의 죄책감을 덜기 위해 타인의 잘못을 속으로 음미하는 수준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요구하신 윤리는 그런 것을 뛰어넘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윤리는 내가 좀 착하다고, 기준을 좀 지켰다고 만족하는 태도, 착함과 자기 공로로 구원을 얻겠다는 기대를 꺾는 윤리입니다. 세상의 윤리는 자기를 드러내는 윤리이지만 예수님이 가르치신 윤리는 하나님을 드러내는 윤리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동기로 선한 삶을 사셨고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를 닮은 사랑과 자비를 나태내시다가 죽으셨듯, 구원받은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해서 자신의 전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고 드러낼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내시는 하나님을 닮을 것입니다. 성도는 36절이 말하는대로 아버지의 자비로우심을 닮을 것이고, 나무와 열매 비유대로 자신이 누구에게 속했는지 누구를 닮았는지, 누구와 같은지를 드러낼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선한 삶이 도저히 불가능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내 힘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더욱 예수를 의지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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