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누가복음 강해 (9) 누가복음 7:18-35

따뜻한 진리 2021. 9. 26. 23:29

누가복음 7:18-35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우리는 누가복음 초반에 세례요한의 출생과 사역에 대해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는 백성들의 죄를 지적하며 회개를 요구하고, 세례를 주는 사역을 하는 중에 당시 유대 왕인 헤롯 안티파스의 잘못을 지적했습니다. 그러자 헤롯왕은 세례요한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3장 18-29절이 그 내용을 말합니다. 세레요한은 감옥에서 자기 제자들을 통해 예수님의 사역에 대해 전해 들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하시는 일들에 대해 들을수록 자신이 기대한 메시아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고, 결국 제자들을 보내서 예수님께 질문했습니다. ‘예수님 당신이 구약에서 약속된 바로 그분입니까? 당신이 아니라면 다른 분이 오실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까?’ 예수님은 세례요한의 질문에 대해 ‘내가 하는 일 즉 맹인이 보고, 나병환자가 낫고, 죽은 자가 살아나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보고 내가 누구인지 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례요한을 무척 칭찬하셨지만 그가 예수님을 약속된 그분으로 신뢰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부족하게 여기셨습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 예수님이 백부장의 종을 치료해 주시고,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것이 우리에게 엘리야와 엘리사를 생각하게 하면서 진정한 선지자이시고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알아보게 하려는 사건이라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오면 자신들을 로마의 점령에서 해방시켜 주고, 악한 자들을 심판해서 억울한 자들을 풀어주시고 영적으로 회복시키실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마치 선지자 엘리야가 아합왕과 이세벨이 섬기던 바알과 아세라의 제사장들과 대결하고 그들을 죽인 것처럼, 또 엘리사가 하나님과 선지자를 욕되게 했던 이들을 곰을 통해 죽였던 것처럼 메시아가 정의와 심판을 이루실 것이라고 기대한 것입니다.

 

    세례요한의 기대도 그것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감옥에 갇혀 사형을 기다리고 있던 그는 자기를 가둔 악한 헤롯을 예수님이 혼내주시고, 자신은 풀어주실 것이라고 기대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혁명과 개혁, 가시적인 심판을 일으키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엘리야와 엘리사를 생각나게 하는 일을 하시긴 했지만 그들이 했던 죄를 꾸짖고 심판하는 일보다는,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고, 주린 자들을 먹이는 일을 재현하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두 선지자가 보여준 사역 중 은혜를 베푸는 사역을 주로 행하셨습니다. 세례요한은 하나님 나라가 심판을 통해 곧 시작될 것이라고 생각해서 백성들에게 회개하라고 선포했고, 자신의 그런 사역을 예수님이 연속해서 완성하실 것이라 생각했지만 예수님의 가르침과 활동은 세레요한의 기대와 달랐습니다. 요한복음 1장을 보면 세례요한은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인 줄 알았고, 예수님보다 자기가 먼저 태어나기는 했지만 예수님이 자기 이전에 계셨던 분이심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예수님이 심판을 실행하지 않으시고, 그래서 헤롯과 같은 악한 세력들이 여전히 힘을 쓰고 있어서 자신이 죽게 될 것 때문에 예수님에게 실족, 실망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준비하는 사역에 잘 순종했지만(27절) 예수님에 대한 이해와 믿음은 부족하다고(28절) 말씀하셨습니다. 세례요한의 사역은 예수님이 베푸시는 구원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역할이었습니다. 참된 구원에는 사람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죄인임을 발견하고 절망하는 일과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의지하고 믿는 기쁜 일이 함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즉 구원에는 회개와 믿음이 함께 있어야 한다는 원리를 세례요한과 예수님이 잘 보여줍니다. 세례요한은 그렇게 죄인이 절망하고 예수님께로 가게 하는 그 사명대로 잘 쓰임 받았지만 그러나 그는 자신의 사역과는 달라야 했던 예수님의 사역을 이해하지는 못했습니다. 세례요한은 자신이 예고했던 임박한 심판을 예수님이 실행하지 않으시고 회복과 용서와 자비와 친밀한 교제를 주도하시는 것에 대해 당황했습니다.

 

    예수님은 세례요한의 그런 한계를 말씀하시고 나서,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문제도 말씀하셨습니다. 세례요한이 예수님에 대해 잘못된 기대를 했다면 그 종교지도들은 세례요한과 예수님 모두를 잘못 이해했습니다. 그들은 세례요한을 통해 자신이 회개해야 할 죄인이라는 것으로 절망하지 않았고,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 회복과 용서의 은혜를 기쁘게 누리지도 않았습니다. 32절이 말하듯 그들은 피리를 불어도 함께 춤추지 않고, 슬프게 울어도 함께 울지 않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들은 세례요한도 비판하고, 예수님도 비판했습니다. 그들은 세례요한을 통해서나 예수님을 통해서 유익을 얻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불만을 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례요한의 심판 예고와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로운 사역 둘 다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이 실망하고, 종교지도자들이 하나님의 일하심에 불만을 품은 이유는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보다 자기들의 어려운 상황이 해결되는 것을 우선시했기 때문입니다. 메시아, 우리를 위하는 구원자라면 이런 일을 해주셔야 한다는 기대를 고집했기 때문입니다. 현대 국가의 국민들이 자기가 원하는 스타일의 사람,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해주겠다는 사람을 정치인, 대통령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처럼 부패한 인간의 종교심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아가 아닌 자신들이 원하는 메시아를 계속 기다립니다.

 

    사람들은 내가 괴로워하고 있는 문제들을 해결해 줄 구원자를 기대합니다. 또 하나님의 공의가 아닌 자신의 정의심을 기준으로 해서 악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악한 나라로 생각되는 들을 적들을 심판해 주기를 기다립니다. 그래서 만약 우리 시대에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나라를 괴롭게 하는 주변국가들에 대한 심판, 계층 간 불평등, 환경 문제 등에는 아무런 개입을 하지 않으시면서 그저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시고, 우리가 역겹게 여기는 죄인들과 친하게 지내신다면 많은 교인들은 세례요한처럼 흔들리고 종교지도자들처럼 예수님을 적대시할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세례요한이 원하고 기다렸던 그 심판을 분명 실행하실 것입니다. 이미 그분의 심판이 보이지 않게 진행 중이고, 또한 마지막에 두려운 최종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세례요한처럼 하나님 편에 서서 순종하다가 억울하게 고난 당하던 자들의 결백을 변호하시고, 결국 믿음이 옳은 것이었음을 증명하시고, 공의를 완전히 드러내실 심판을 반드시 실행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전까지 예수님은 많은 죄인들을 부르시려고 세상의 많은 불의를 허용하십니다. 그 속에서 고난 당하는 우리는 세례요한이 느꼈을 갈등인 ‘주님은 왜 나의 현실에는 개입하지 않으시는가! 나를 괴롭게 하는 것들을 왜 그냥 방치하시는가?’하는 질문을 안고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그런 질문을 통해 예수님께 실망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누구보다 그런 버림당함을 혹독하게 겪으신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여러 질병을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신 자신의 사역을 보고 알라고 말씀하신 대로 예수님이 능력이 없으셔서 우리를 돕지 못하신 것이 아닙니다. 세례요한이 실망하고, 종교지도자들이 반감을 가질 만큼 사람의 기대와 다른 방식으로 예수님이 일하신 의도는 하나님 나라가 사람의 뜻과 생각과 판단과 노력으로, 인간들을 중심으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세워지는 나라임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례요한은 비록 자신이 빛을 보지 못하고, 불의에 희생당하지만 죽어가면서도 예수님의 능력이 드러나는 일, 죄인들이 바뀌어 예수님을 높이는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듣는 것만으로도 기뻐하고 만족할 수 있어야 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예수님이 세상 가운데 높아지시는 것을 함께 기뻐할 수 있게 되는 것, 예수님이 어떻게 여김을 받으시는가로 함께 울고 웃는 것 그것이 진정한 은혜를 입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