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누가복음 강해 (10) 누가복음 7:36-8:3

따뜻한 진리 2021. 10. 3. 18:48

누가복음 7:36-8:3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시몬이라는 이름의 한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자기 집에 초대했습니다. 예수님이 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 그 동네의 한 여자가 그 집에 들어와 예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 여자는 창녀였습니다. 이 여자는 그 자리에 오기 전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거나 자신의 눈으로 목격하며 예수님에 대해 알고 있었고, 아마도 예수님을 마주한 자리에서 자기 죄를 용서해주신다는 말을 들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자 그 집에 찾아왔을 것입니다. 여자는 울면서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고,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었습니다. 그 여자는 자신의 몸과 마음, 소유를 다 예수님께 드리는 행위를 했습니다. 그때 그 집 주인인 바리새인은 그 장면을 보면서 ‘예수가 최소한 선지자만큼의 신비한 능력이 있다면 자기 앞에 있는 저 여자가 더러운 창녀라는 것을 꿰뚫어 보고 피할 텐데 어쩜 저럴 수 있지’라고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그 바리새인을 부르셨습니다. ‘시몬아 오십 데나리온 빚 진 사람과 오백 데나리온 빚 진 사람이 있는데 둘 다 빚을 갚지 못하자 돈 빌려 준 사람이 그 두 사람의 빚을 모두 없던 걸로, 갚지 않아도 되는 걸로 해주었다, 그러면 두 빚진 사람 중 누가 더 기뻐하겠냐?’라고 물으셨습니다. 바리새인 시몬은 당연히 많이 빚 진 사람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옳다. 시몬아 너는 나한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고, 입맞춤 인사도 하지 않았는데,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머리털로 씻고, 감람유도 부었다. 이 여자가 그렇게 한 것은 자신의 많은 죄가 용서받았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자가 한 일의 의미를 설명해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시몬의 판단이 어리석은 것임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의 생각과 달리 예수님은 이 여자가 어떤 여자인지 이미 알고 계셨고, 시몬이 예수님을 판단하는 줄도 다 알고 계셨다는 것을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여자에게 죄를 용서받았다고 확인시켜 주시고, 믿음을 칭찬하시고, 보내주셨습니다.

 

    우리는 앞에서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자기 생각과 기대를 가지고 판단만 할 뿐 자기 죄에 대해 슬퍼하지도 않고, 구원하시는 예수님을 기뻐하지도 않는 상태를 살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렇게 예수님에 대해 전혀 다른 반응을 한 두 사람의 사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바리새인 시몬은 자기가 알고 있는 율법, 남녀 사이의 규칙, 선지자의 능력에 대한 지식들을 가지고 예수님도 판단하고, 그 여자도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앞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는 몰랐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시몬은 예수님이 자신의 모든 것, 자신 안에 있는 생각과 마음과 모든 죄를 다 아시는 분이심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예수님이 자신의 모든 것을 아시는 분임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삶과 부끄러운 죄들을 이미 잘 알고 계신 분임을 알았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이 그런 자신의 죄를 용서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이 용서하시고 받아주시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이 여자는 예수님 앞에서 슬픔과 기쁨을 모두 드러냅니다.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에 대한 슬픔과 비참함, 그리고 예수님이 그 죄를 용서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으로 인한 구원의 기쁨이 그 여자의 행동에서 드러났습니다. 그래서 이 여자는 예수님 앞에서 울기도 하고, 기쁨으로 향유를 부어드리며 감사와 사랑을 표현한 것입니다.

 

    머리와 발은 우리 몸에서 모두 중요한 부분이지만 사회적으로는 크게 대조되는 위치를 상징합니다. 머리는 중요하고 높은 위치를, 발은 낮고 비천한 위치를 의미합니다. 이 여자는 예수님의 발아래 자신의 머리를 두는 행동을 했습니다. 마치 종이 주인에게 행하는 것으로 보이는 이 행동은 이 여자가 살아온 밑바닥 삶의 괴로움과 비천함을 담아내면서 예수님에 대한 최선의 감사와 존경을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우리가 상대를 높이려면 자신의 현재 모습에서 낮춰야 하는데, 이 여자는 이미 세상에서 천하게 취급되고 벌레 같은 존재로 여김 받는 상태였기에 예수님의 발에 자신의 머리를 갖다 대는 그런 행동으로 밖에는 더 낮아지는 모습을 표현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죄와 세상의 정죄 속에서 살던 이 여자는 예수님을 자신의 전부를 드려도 아쉽지 않은 감사의 대상, 경배의 대상으로 여긴 것입니다. 이 여자는 시몬의 집에서 한 자신의 행동 때문에 사람들의 냉혹한 시선, 오해와 비난, 손가락질을 더 받는 것에 대해 전혀 개의치 않는 것처럼 대담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예수님께 대한 감사와 경배를 쏟아내고 고백할 수만 있다면 자기가 어떻게 여겨지든 상관없다는 듯 보입니다. 세례요한이 ‘나는 감히 예수님의 신발끈 풀기도 할 수 없다’라고 예수님이 얼마나 높으신 분인지를 말로 표현한 것을 이 여자는 행동으로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죄의 문제를 깊고 무겁게 다뤄야 합니다. 그래야 은혜의 가치도 정당하게 감격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많이 용서받고, 많은 은혜를 깨달은 자가 기쁨과 사랑을 그만큼 표현하게 되어 있습니다. 너무나 갚기 어려운 엄청난 빚 때문에 죽도록 고생하고, 언제 빚 독촉을 받을까 울고 두려워하며 사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되는 죄의 짐을 지고 살아가는 것이 우리입니다. 세상 무엇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 내 존재의 가장 무거운 문제, 영원히 괴로워할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분에게 한없는 감사와 찬양을 돌려야 마땅합니다. 이 여인이 보여준 것처럼 우리는 나의 모든 가치를 완전히 쏟아내어 예수님이 높임을 받으시기에 마땅하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세상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위해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높여 주시지만 그것을 기대하면서 우리가 스스로를 높일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내 멋진 모습을 봐 내가 믿는 하나님은 이렇게 대단한 분이야’라는 자랑보다는 주님 앞에서 한없이 낮아지는 것으로 주님이 높은 분이심을 표현해야 합니다. 주님이 드러나실 수 있다면 그런 나의 낮아짐을 기뻐해야 합니다.

 

    진정 거듭나 회개한 자는 하나님의 높으심을 발견하며 자신의 낮아짐을 기쁘게 여깁니다. 거듭난 자는 창조의 본래 목적대로 하나님이 높아지시도록 자신의 낮은 위치를 즐거워하는 태도를 갖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은 거짓 회개는 이상하게도 자기를 더 높입니다. 바리새인들처럼 우리의 회개마저도 나의 자존심을 지키고, 공로로 만들기 위해,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한 것으로 둔갑하기 쉽습니다. 그런 사람은 온통 사람의 시선에 묶여 있습니다. 자신의 시선과 타인의 시선 말입니다. 그런 자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모릅니다. 자신의 낮아짐으로 하나님을 높이는 예배에서 기쁨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거듭난 자가 세상이 기뻐하지 않는 낮아짐으로 기뻐하게 만듭니다. 이 세상은 자신이 높아질 때 기쁨을 경험하지만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생명을 얻은 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한없이 낮은 자임을 확인하는 것으로 기뻐합니다. 누가는 힘을 가진 자, 부유한 자, 종교적으로 존경받는 자들 그런 예수님의 기쁨을 누린 것이 아니라 자신이 아무 권리도 없고, 부끄러운 죄인인 것을 아는 자들, 백부장처럼 이 여인처럼 ‘어찌 감히 나 같은 자가 주님 앞에 떳떳이 설 수 있을까’라는 자세를 드러낸 자들이 예수님의 기쁨에 동참한 것을 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