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1:14-36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예수님께서 어떤 사람을 말 못하게 만드는 귀신 하나를 내쫓으셨습니다. 그 일을 보고 사람들이 놀랐지만,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사탄의 힘을 빌려 그런 일을 행하는 것이라고 비방하고 조롱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말대로 자신이 사탄의 힘을 빌려서 귀신을 쫓아내면 사탄의 나라에 내분이 일어난 것인데, 어떻게 그 나라가 계속 될 수 있겠는지를 물으셨습니다.
19절에서 예수님은 ‘내가 바알세불, 즉 사탄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라고 물으셨는데, 여기서 ‘너희 아들들’은 유대인들 중에서 귀신을 다루는 자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9장을 보면 마술하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이용해 귀신을 쫓아내려고 시도하다가 도리어 귀신에게 혼쭐이 나는 일이 있었고, 또 16장을 보면 귀신들린 사람을 이용해 점을 치는 자들도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당시 사회에도 귀신 다루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마치 우리나라에 점집이나 무당이 있는 것처럼, 유대인들 가운데에도 그렇게 귀신들을 의지해서 이용하는 일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그런 것들은 그냥 놔두면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적을 행하시는 것은 귀신의 힘을 의지한 것이라고 공격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저희가 너희 재판관이 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너희들이야 말로 귀신들을 내버려두고 귀신과 한편인 자들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 와중에 어떤 자들은 예수님께 더 신비하고 확실한 이적을 보여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비유로 어떤 사람이 귀신에서 해방되었는데, 그 귀신이 더 악한 귀신들을 데리고 와서 그 사람을 이전보다 더 괴롭게 했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이적을 경험하는 것, 귀신을 쫓아내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 다가 아니라 다른 존재의 다스림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단지 호기심과 자기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에 불과합니다.
사람들이 신기한 기적을 보고자, 혜택을 얻고자, 문제해결을 경험하고자 하지만 예수님을 세상의 주인, 죄인의 구속자, 누구보다 우리를 사랑하는 분, 내가 순종해야 할 분으로 여기지 않으면 진정한 유익을 얻지 못합니다. 상당수의 사람들은 그저 자신의 괴로운 현실만 해결받기를 바랄 뿐이지 자신이 이전부터 추구해온 자신의 삶, 자기만족의 삶을 내려놓고 주님을 따르려 하지 않습니다. 여전히 자신과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자들은 귀신을 쫓아내줘도, 문제를 해결해줘도 결국 이전의 삶으로 돌아갑니다. 자기 힘으로 안 되는 여러 문제를 해결 받으려고 예수를 이용하고는 시간 지나면 슬그머니 예수를 버릴 기회, 예수에게서 도망칠 기회만 노립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이 베푼 모든 이적, 문제해결이 끝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예수님이 그 사람의 주인이 되셔서 다스리시는 것이 진정한 복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사람이 사탄의 다스림에서 하나님의 다스림, 하나님 나라 안으로 옮겨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표면적인 문제 해결보다 예수님을 알아보고 사랑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때마침 어떤 여자가 큰소리로 “당신을 낳아서 기른 분은 참 행복합니다.”라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자기 어머니가 복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가 진짜 행복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앞에서 말한대로 예수님과 그 어머니 마리아의 관계처럼 어느 누구보다 예수님과 친하고, 가깝고, 예수님의 능력을 가까이서 많이 경험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순종하는 것이 진짜 복이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기적을 요구하는 자들에게 요나의 표적 밖에 보일 것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나의 표적은 물고기에 삼켜졌다가 삼일 만에 밖으로 나온 요나를 말합니다. 이 요나의 표적은 죽었다가 부활할 예수님 자신을 가리킵니다. 즉 예수님은 사람들이 여러 이적을 보여달라고 요구하지만 자신이 이 땅에 보여줄 궁극적인 이적은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할 예수님 자신이라고 예고하신 것입니다. 요나의 표적이 가진 또 다른 의미는 니느웨 성 사람들이 요나가 전한 복음을 듣고 회개했다는 것입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가 자기들 앞에서 어떤 놀라운 이적을 보여줬기 때문에 믿은 것이 아니라 그저 요나가 전한 하나님의 경고를 듣고 회개했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을 증오했던 요나가 황당하고 화가 날만큼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충실하게 반응했습니다. 이것은 이적에 연연하거나 증거를 보고 믿겠다고 핑계하지 않고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 앞에서 정당한 반응을 해야 한다는 것을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솔로몬 때의 남방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듣기 위해 온 것을 말씀하신 것도 같은 의도입니다. 남방여왕이 솔로몬한테 당신의 지혜가 훌륭한 것인지, 믿을만한 것이지 증거를 대라고, 이적으로 증명하라고 하지 않고, 그저 그의 지혜를 듣기 위해 멀리서 온 것처럼 예수님의 말씀에도 그런 반응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등불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빛이 잘 퍼지는 곳에 두지, 닫힌 방에 두거나 그릇으로 덮어두지 않습니다. 우리 몸에 있는 눈은 몸의 등불과 같은데, 눈이 건강하면 주변을 잘 살펴서 안전하게 살 수 있고, 눈이 좋지 못하면 위험을 발견하지 못해서 여기저기 다치고 건강을 잃게 됩니다. 그러니 예수님께 ‘네 속에 빛이 밝게 들어차 온 몸을 밝히고 있는지 살펴보라’는 것은 눈이 제 기능을 하고 있는지 진단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표현으로 하자면 ‘네 눈을 어디다 두었냐? 제대로 보고 있기는 하는 것이냐?’정도가 될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눈이 있지만 세상 헛된 것에만 시선이 가고, 그런 것들을 진짜라고 받아들이고 따르지만 영원한 실재이시고, 우리가 진정 받아들이고 따라야 할 예수 그리스도는 알아보지 못하는 눈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욕심에 왜곡되어 있는 우리의 눈, 우리의 생각이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고 순종하지 못하게 합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예수님이 라오디게야 교회에게 눈이 밝아지려거든 안약을 사서 눈에 바르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볼 수 있고,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이 필요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한 지식과 지혜를 습득하는 일에는 다른 사람들을 따라 맹목적으로 따라갑니다.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몰려들고 있고, 돈을 벌게 해주는 것, 성공을 가져다주는 것이라면 그것을 놓칠까봐 마구 달려듭니다. 그게 진정한 행복을 주는 것인지 검토하지 않습니다. 또 꾸며낸 선동과 광고와 댓글과 체험담들에 쉽게 휘둘립니다. 그러나 정작 진리에는 증거를 내놓으라고 요구하고, 진리를 전하는 자를 비방하면서 믿지 못하겠다고 공격하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적을 보여줘도 비방하고, 진리를 가르쳐도 어렵다고 말합니다. 어리석은 일에는 전 재산도 걸고, 자기 상관과 조직에 대한 의리를 지키려고 목숨도 내놓지만, 진짜 자기 생명의 주인이 되시는 분에게는 온갖 의심과 핑계를 들이대는 것이 인간입니다. 이것이 죄로 인해 눈이 먼 인간의 실상입니다.
문둥병자, 중풍병자, 손 마른자. 혈루병, 앉은뱅이, 눈먼 자, 말 못하는 자를 고치시고 많은 물고기를 잡게 하시고, 풍랑을 잔잔하게 하시고, 물 위를 걸으시고,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고, 오천 명을 먹이시고, 귀신으로 인한 다양한 문제들을 해결하시고, 죽은 자도 살리신 예수님은 어떤 마술사나 무당보다 강력하고 압도적인 이적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생명을 부여하신 하나님의 아들답게 놀라운 능력으로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또한 구약의 사건들과 선지자들이 가리켰던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를 부활시키심으로 예수가 누구이신지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믿을 수밖에 없는 분이고, 그 앞에 엎드리게 되고, 헌신할 수밖에 없는 분이십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은 고의적이든, 그 자신의 한계에 의해서든 다른 사람에게 실망을 안겨줄 수밖에 없습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으시기에 우리가 믿고 따르고 섬기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우리 모두가 이러한 주님을 알아보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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