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누가복음 강해 (18) 누가복음 11:1-13

따뜻한 진리 2021. 11. 28. 18:18

누가복음 11:1-13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주기도문은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 11장과 마태복음 6장에 등장합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산상수훈의 중간에 언급하신 기도문이 우리가 사용하는 주기도문의 근거가 되고,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의 주기도문은 그것보다 몇 구절이 생략되어 짧습니다. 우리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배우면서 주기도문의 구체적인 내용을 계속 확인하고 반복하기 때문에 이 시간에는 본문의 문맥 속에서 요점 몇 가지를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자신이 가르치신 기도문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우리는 주기도문을 암송할 때 ‘아버지’라고 말하지만 예수님이 원래 사용하신 아람어 표현은 ‘아빠’입니다. 유대인들은 구약시대부터 하나님이 그의 백성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개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빠’라는 표현으로 아버지보다 훨씬 친밀하게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하도록 기도를 가르치셨습니다. 또 예수님의 이 기도문은 하나님 나라가 세상 가운데 이뤄지기를 구합니다. 우리가 세상에 있는 어떤 모범적이고 부유한 나라의 시민이 되는 것을 바라거나, 우리나라가 힘이 강해지고 선진국이 되는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나타나는 것, 임하는 것을 바라도록 예수님은 가르치셨습니다.

 

    당시 모두가 부러워하는 가장 앞선 나라인 로마가 더 발전되고 좋아져서 세상을 평화롭게 만들거나 유대인들과 제자들의 기대처럼 자기 나라 이스라엘이 강한 나라로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를 예수님께서 기도하셨습니다. 그 나라는 사람의 지혜와 힘으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으로 주어지는 나라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의지하는 죄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서 참여하게 되는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 나라에는 아직 미숙했던 제자들처럼 백성들이 세력다툼을 하고, 특권의식을 갖는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 나라에는 오직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의존하고 찬양하는 자들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태어났으면 이 세상 무엇으로도 만들어 낼 수 없는 하나님과의 이 관계를 가장 값진 것으로 알고 누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사람들의 자기 소유와 능력을 자랑하는 나라를 원하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이 드러나는 나라를 주시려 합니다. 우리의 흥미를 끄는 어떤 무엇보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과의 관계를 즐거워하는 백성들이 있는 나라를 원하십니다. 제자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나라가 아니라 그런 하나님과의 복된 관계가 예수님으로 인해 주어지는 하나님 나라를 소망해야 했습니다. 마르다가 열심히 자기 일을 하느라 알지 못했던, 마리아가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누리고자 했던 그것을 우리가 추구해야 한다는 것을 예수님은 자신의 기도 속에서 가르치셨고, 우리가 그것을 구하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일용할 양식을 구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에게 전달해준 생명보다 비교할 수 없이 더 나은 생명, 비참함과 죽음이 없는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또한 우리가 아무리 맛있는 것을 많이 먹어서 배불렀다가도 몇 시간이 지나고 나면 또 다시 군침을 흘리게 되는 음식에 의존되어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항상 우리가 의존해야 할 분, 우리에게 만족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그것이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태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그렇게 하루하루 매 순간 의지 영원히 살아가길 원하십니다.

 

    기도는 그런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것인 동시에 그런 나라를 이미 맛보는 자의 행위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매달려서 무엇인가를 얻어내는 것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가 구한 것들의 상당 부분을 주시기는 합니다. 하지만 기도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을 찾고, 나의 상태를 고백하고, 의지하는 것이 훨씬 큰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주기도문에 이어서 열심히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비유로 가르치셨습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간절하게 매달리면 하나님께 뭐든지 다 얻어낼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 매달리는 자가 반드시 좋은 것을 얻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가장 좋은 그것이 성령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도 응답으로 얻을 수 있는 성공이나, 문제해결이나, 놀라운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친밀하게 이끄시는 하나님 자신이신 성령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려고 합니까? 성령은 창조목적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피조물이 자기를 닮은 자들이 되게 하시어 하나님을 자랑스러워하고, 만족하고, 찬양하는 것이 창조의 목적이 아닙니까! 그런데 피조물이고 죄인인 우리가 스스로 그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가 기도하는 일로 하나님을 최고의 만족으로 여기고, 감사하고, 찬양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기도는 우리를 지으신 창조의 목적이 이뤄지는 순간입니다. 달라져야 할 우리의 현실과 힘든 문제들과 고통이 여전해도 하나님을 찾는 기도, 우리의 한계를 고백하고 하나님께서 일하시기를 구하는 기도, 또 우리가 원하는 대로 주시지는 않지만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 자체로 만족하는 기도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합니다.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의 기초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감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16문은 기도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감사에서 중요한 부분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순종, 헌신. 행함이 기도보다 우선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기도가 행함보다 덜 힘들고 쉬운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도는 쉽지 않습니다. 다양한 핑계거리와 의심, 사탄의 방해로 기도는 항상 뒷전으로 밀리고, 차라리 말을 내뱉고, 자기 생각과 해 오던 방식대로 움직이는 것이 더 쉽습니다. 다른 종교에도 있는 기도처럼 신자 역시 욕심에 근거한 기도에는 열심을 낼 수 있겠지만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서 인내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하고 감사하는 바른 기도는 우리의 본성에 맞지 않습니다. 기도는 우리의 본성과 싸우는 수고로운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선배들은 기도가 행함보다 우선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기도가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높이는 일에 있어서도 으뜸이 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우리는 부지런히 선을 행해야 하지만 결국 행함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되려면 기도로 시작해야 하고, 기도로 끝마쳐야 합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탁월한 기도를 할 수는 없습니다. 기도할 때 우리가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말씀드리지 못할 내용은 없습니다. 이미 우리를 다 아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숨길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또한 우리의 기도 내용이 반복되는 것이 많을지라도 그런 기도를 하는 자신에 대해 실망할 필요도 없습니다. 내가 원하는대로 응답해주시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의 지혜를 신뢰하며 기도를 중단하지 않아야 합니다. 어찌하든지 우리는 계속해서 하나님과의 긴밀하고, 개인적인 관계를 계속해야 합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해드리고, 높여 드리고, 의존하고, 죄를 고하고, 감사합시다. 아무리 훌륭한 부모도 힘들고 지치면 자녀의 끊임없는 요구와 말을 힘들어 하지만 하나님은 지치시는 분이 아닙니다. 어린 아이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저마다 모두 어려움과 걱정과 소원을 가지고 살고 있는데 그런 현실적인 자기 문제들을 통해 하나님은 자기를 의지하라고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의 수준에 맞게 기도에 응답하시고,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구원 얻게 하시며, 나아가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기도하는 데까지 도달하도록 이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