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1:37-54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바리새인 한 사람이 자기 집으로 예수님을 초대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식사 때 꼭 손을 씻었는데 그것은 단지 깨끗하게 하는 위생 개념을 넘어 종교적인 규칙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손을 씻지 않으시자 그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그의 생각을 아시는 예수님은 ‘지금 너희 바리새파 사람들은 잔과 그릇의 겉은 깨끗하게 하지만,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다. 어리석은 사람들아, 겉을 만드신 분이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의 종교적 지식은 사랑과 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고 통제하면서 자신들이 존경받고 힘을 갖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겉만 깨끗이 씻은 것으로 깨끗해진 것이 아니라 가진 것을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것으로 마음 속 욕심을 씻어야 한다고, 온갖 채소를 수확한 것까지 십일조를 내야 한다고 가르치면서 윤리와 사랑에 소홀한 것은 재앙을 당할 일이라고 꾸짖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마치 땅에 평평하게 만들어 놓은 무덤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죽은 자를 묻어 놓은 무덤을 밟는 것을 누구도 좋아하지 않을 것입니다. 특히 유대인들은 시신을 만지거나 무덤에 가까이 가면 부정해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무덤이라고 표현하신 것은 그들이 주장하는 것들이 사람들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부정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비판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만 더러울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 더럽게 하기 때문에 존경하고 따라야 할 자들이 아니라 피해야 하는 혐오스런 무덤이라는 것입니다.
그 때 율법교사 중 하나가 바리새인들에 대한 그런 비판을 듣고는 자신들도 모욕하시는 것이라고 말하자 예수님은 ‘옳다 너희들도 재앙을 당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비판하면서 사용하신 무덤의 이미지를 사용하셔서 율법교사들도 비판하셨습니다. 율법교사들은 율법을 가르치는 자들이었기 때문에 구약에서 율법과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한 선지자들을 존경하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구약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을 죽였듯이 율법교사들은 그 선지자들의 무덤을 그럴듯하게 꾸며서 자신들의 이익과 권력을 위해 사용하고 있다고 지적하셨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당시의 죽은 예배 형식을 지적하고,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마음을 찢으라고,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껍데기 의식을 버리고 고아와 과부를 돌보고 사랑하라고 백성들에게 외쳤지만 통하지 않은 것입니다. 오히려 죽임 당했습니다.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은 예수님이 틀렸다고, 자신들이 옳고 율법을 잘 지키는 것이라고 확신했겠지만 53절을 보면 예수님이 지적하신대로 선지자들을 죽인 그들의 조상들처럼 그들도 예수님을 죽일 명목을 찾았습니다. 그들의 그런 헛된 종교적 열심은 하나님과 사람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자기 백성들을 괴롭게 하고, 하나님이시자 사람이신 분을 죽이는 것임이 드러났습니다.
절대신을 섬기는 사회들이 그렇듯, 또 현대 이슬람이 보여주듯 유대사회 역시 오래 전부터 사람을 돕고 보호하는 도덕, 윤리보다 신이신 하나님의 명예를 높이는 종교의식, 부정한 것을 멀리하는 규칙들을 중요하고 엄격하게 여기는 쪽으로 변질되었습니다. 깨끗하고, 고결해 보이는 것을 하나님 앞에서 더 수준 높은 것으로 여겼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것으로 판단되면 엄격하고 잔인하게 다스렸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도록 돕는 항목들이 아니라 억누르고 통제하는 규칙들이 되었습니다. 바리새인이나 율법교사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봉사한다고 생각했겠지만 자신들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잘못 사용했습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야 하고, 겉으로 드러나는 깨끗함과 단정함과 질서도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격 때문에 나도 하나님을 닮고자 하는 태도에서 그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바르게 알고 있는지가 나의 행위에 녹아져서 드러나야 합니다. 그러므로 단순히 사람의 행동을 지적하는 것을 넘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지, 동기가 어떤지를 서로가 점검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일은 너무나 힘이 듭니다. 피곤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는 일,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일이 우리 뜻대로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상대가 하나님을 안 믿는다고 하면 마음을 다뤄줄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태도와 마음을 다루기보다 그저 겉으로 드러난 외적인 행위들만 판단하기 쉽습니다.
예를 들면 십계명의 조항들은 하나님과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할 것을 요구하는데 단지 우리는 십계명의 조항들을 겉으로 위반하지 않은 것으로 자기 할 일을 다 했다고 착각합니다. 마치 사람을 다치게 하거나 죽여도 법을 형식적으로라도 지켰으면 무죄가 될 수 있는 것처럼, 사람들이 법을 그런 식으로 이용하는 것처럼 유대인들도 자기 책임을 다했다고 만족하는 일에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사용한 것입니다. 율법을 그런 수준으로 전락시킨 것입니다. 구약 백성들은 사람의 마음을 깊이 다루는 것보다 행동을 교정하고, 여러 가지 규칙들로 종교적 만족과 성취감을 안겨주는 것이 백성과 사회를 통제하는 더 쉬운 방법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이 죄인들의 성향에 잘 맞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을 내가 진정 사랑하는가를 서로 묻고 생각하게 하는 것보다 겉으로 보이는 종교 형식을 잘 지키게 하고, 눈에 보이는 규칙들을 잘 지켜서 ‘내가 하나님 앞에서 잘 하고 있다. 나는 깨끗하다. 나는 괜찮다.’는 느낌을 주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는 것을 이미 잘 알고 그렇게 발전시킨 것입니다.
현대인들도 유사한 방법으로 사람들을 심리적으로 위로하고, 말과 행동을 교정하고, 긍정적인 동기부여를 합니다. 또 교회가 그런 율법주의적인 방법으로 성도들이 자기 행위에 근거한 성취감을 즐기며 신앙생활 하도록 부추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규칙과 행해야 할 일들의 목록을 잘 지키는 것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무를 다했다고 만족할 수 없습니다. 그런 성취로 나의 구원의 확신을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또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냐고 물은 율법교사에게 말씀하셨듯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에는 끝이 없습니다. 원수까지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은 끝까지 상대의 모든 것을 두루 돌보고 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그런 수준을 우리에게 요구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런 사랑을 우리에게 베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율법교사들은 자기들도 못 지키는 것들을 백성들에게 요구하고, 자기들이 지키면 자기만족에 빠지고, 그 교만으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율법이 요구하는 완전한 사랑과 순종의 수준에 내 힘으로 도달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예수님의 완전한 공로에 의지해서 생명을 얻은 것에 기뻐서, 누군가가 지키라고 강압하지 않아도 예수님처럼 닮고자 하는 동기에 따라 십계명과 도덕법과 양심을 따라 살고자 합니다. 또 그런 자기 삶에서 아무리 칭찬받을 만한 선한 결과들을 보게 된다 해도 예수님이 나를 위해 율법을 이루신 것, 사랑을 부으신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항상 확인함으로 겸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자기를 집어 삼키려는 교만과 크고 작은 죄들이 여전한 것을 보기 때문에 항상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구원자가 되실 수밖에 없음을 지속적으로 발견하고 고백하게 될 뿐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우리를 아무 조건 없이 거저 구원해 주십니다. 예수님의 모든 순종과 십자가 공로가 우리의 구원, 영원한 생명을 얻는 충분한 근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에 주님을 향한 선행과 순종이 있는 것은 구원이 확실하도록 우리가 무엇인가를 이뤄내야 한다는 불안이나 걱정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으로 충분하다는 것에 그저 즐겁고 감사해서 고백하는 방법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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