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4:1-35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예수님께서 한 바리새인의 집에 식사 초대를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거기 모인 사람들이 다들 높은 자리, 상석에 앉으려는 것을 보시고 앞으로 잔치에 참여할 일이 생기면 낮은 자리, 끝자리에 앉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높은 자리에 앉았다가 나중에 자기보다 높은 사람이 오면 비켜주면서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니까, 차라리 낮은 자리에 앉아 있다가 집주인이 높은 자리로 불러주면 그때 옮기는 것이 존경받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자기를 스스로 높이는 것은 영광이 아닌 교만이고, 다른 사람들이 높여 주어야 진짜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식사를 대접할 일이 생기면 가까운 사람, 힘 있고 돈 있는 사람들 초대하지 말고,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초대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주로 자기에게 유익하고, 이익이 될 사람들과 식사를 하면서 친해지려고 합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밥을 얻어먹게 되면 나중에는 내가 식사를 대접하거나 호의를 베풀면서 상대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해야 하는 의무감을 갖습니다. 그냥 잊어버리면 되는 공짜 식사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얻어 먹었으면 대단한 것으로 갚지는 못해도 최소한 그 사람이 문제를 일으켰을 때 비방하지 못하게 되고, 편들어 줘야하는 의무를 지게 됩니다. 그렇게 대접받는 것은 되갚음의 의무를 암묵적으로 지게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가난하고 병들었기 때문에 내가 대접을 해도 나중에 나한테 고마움을 표현하기 어려운 사람들을 대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옛날로 갈수록 명예와 칭찬에 목숨을 거는 사회였습니다. 유대사회도 그랬습니다. 자신을 과시하고 자랑하는 것은 눈꼴사나운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이고 부러운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차를 타는 것을 더 이상 욕하지 않는 것처럼 그 때도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런 서로의 명예로움과 잘남을 서로 인정해주면서 맞장구 쳐줄 수 있는 계층에 속하고, 그 관계를 계속 누리고자 서로 대접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짓 하지 말고 소외된 자들에게 베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은 되갚을 능력이 거의 없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에게 대접하면 나중에 하나님께서 갚아주신다는 것입니다.
12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그 말씀을 자기를 초대한 그 집주인 바리새인 지도자에게 하셨습니다. 그 바리새인이 자기와 비슷한 종교지도자들을 초대한 행동이 예수님께 지적받은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앞에서 함께 초대받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에 앉으려 한 행동을 지적받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아마도 집주인과 거기 초대받은 사람들 모두 기분이 안 좋았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그 말씀을 듣던 자 중 하나가 분위기를 바꾸려고 하나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가 복되다는 말을 하면서 뭔가 긍정적인 주제로 돌리려 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실제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자들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다음과 같은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주인이 큰 잔치를 준비하고 여러 사람을 초대했지만 어떤 사람은 자기가 밭을 샀기 때문에 할 일이 많아서 안 된다고, 어떤 사람은 소를 새로 샀기 때문에 잔치에 가지 못하겠다고, 어떤 사람은 결혼한지 얼마 안 되기 때문에 못가겠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잔치를 준비한 주인은 길거리에서 사람들을 데려다가 자리를 채우라고 종에게 시켜서 사람들을 불러 모았지만 그래도 부족해서 산과 들로 나가서 사람을 찾기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주인은 처음에 초대를 받았던 사람들 중에는 잔치에 참여할 수 있는 자가 없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처음 초대받은 자들은 선물로 주어진, 참석만 하면 되는 큰 잔치를 우습게 여겼습니다. 사람들은 거저 주어지는 하나님 나라보다 내 눈앞에 보이는 것, 내가 선택하고, 내가 공들인 것을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사람들은 가장 중요한 구원, 하나님 나라를 은혜로 거저 주시니까 우습게 알았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제자가 되려면 가족들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해야 한다고, 큰 대가를 치를 것을 각오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망대를 건설할 때 비용을 계산해야 하는 것처럼, 전쟁을 치를 때 적을 이길 수 있는지 판단을 하고, 전쟁을 치르든지 항복을 하든지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는데 그 의미는 계산적으로 따져보고, 능력이 되면 예수님을 따르라는 것이 아닙니다. 또 하나님 나라를 얻기 위해서는 망대의 건설비용을 치르듯, 전쟁 승리를 위해 군사들의 희생을 각오하듯 사람의 투자와 공로가 필요하다는 의미도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거저 선물로 주시는 것, 초대받아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나라에 들어가는데 사람의 어떤 공로도 필요 없으나 이 땅에서 자기가 중요하게 여겼던 것들을 포기하는, 버리는 일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자기가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더 나은 것을 얻기 위해 비용과 희생을 치르는데, 예수 믿는 자는 선물로 주신 하나님 나라로의 초대에 응하기 위해 자기가 중요하게 여겼던 것들을 내려놓고 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 처음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대로 우리는 자기 스스로를 높이려는 어리석음을 버리고 또 사람들 사이에서 칭찬받고, 인정받아 높아지려는 것을 넘어 하나님께 인정받아야 합니다. 나를 인정해줄 만한 사람들에게만 잘 하지 않고, 내가 누군지 몰라주고, 나의 선행을 잊어버리고, 나를 칭찬해주고 높여 줄 가능성이 없는 자들에게도 잘 해야 합니다. 그 모든 것들을 지켜보시고 칭찬하실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태도입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 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면서 달려가는 자들의 삶입니다. 그렇게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인정받으려는 삶을 사는 자, 세상 무엇을 얻는 것보다 거저 초대받아 들어가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되는 것이 가장 가치 있는 것임을 아는 자는 이 땅에서 당장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을 받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26절에서 가족들을 미워한다는 것은 그렇게 하나님께 인정받기 위한 삶,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이 가족들에게 인정받지 못해도 주저하지 않고 제자의 길을 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 자가 주님의 제자이지 스스로 높아지려는 교만을 품은 자, 눈에 보이는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고 자기의 자원을 사용하는 자는 맛을 잃은 소금처럼 길에 버려질 것입니다. 신약시대 이스라엘은 소금을 얻기 위해 암염, 즉 소금성분이 많이 들어 있는 돌멩이를 사용했습니다. 그런 암염을 물에 담가놓아서 소금성분이 녹아 나온 물을 음식에 사용한 것입니다. 그런데 소금기가 다 빠진 암염은 길거리에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짠맛을 잃어버린 돌멩이는 겉으로는 암염처럼 보여도 버려지는 것처럼 종교지도자들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자신들을 하나님을 섬기는 제자요 백성이라고 자랑해도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 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한다면, 여전히 세상 가치에 의지해서 인정받고 구원받고자 한다면 버려질 것임을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이 존경받고, 중요한 존재로 여김받기 위해 안간힘을 씁니다. 가족 안에서, 직장에서, 학교에서, 자신이 자발적으로 들어간 여러 집단에서 인정받고자 합니다. 열심히 공부하고, 땀 흘려 일하고, 가족들을 위해 희생합니다. 그런 성실한 수고와 노력이 필요하긴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것이 진정 나의 가치를 알게 해주고, 참 생명을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달려있습니다. 우리의 노력이 아닌 하나님이 은혜로, 선물로 거저 주시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자존심을 버리고 하나님 나라를 겸손하게 선물로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선물이 공짜라는 사실 때문에 우습게 여길지도 모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나는 내가 대단하다는 것을 계속 확인할거야’라는 생각을 가지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본문에 등장한 높은 자리에 앉으려는 사람, 나를 인정해줄 만한 자들에게 대접하는 사람, 잔치 초대를 우습게 여긴 사람들처럼 나의 가진 것과 나의 노력으로 인정 받으면서 ‘나는 이럴만한 가치가 있어’라는 느낌을 즐기려는 사람들처럼 행동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내가 쌓아온 것을 중요시하고, 구원과 하나님 나라는 싸구려 취급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구원을 대가 없이 거저 주시는 것은 그것이 하찮은 것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것을 얻을 자격도 없고, 그 대가를 지불할 능력이 없음을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겸손하게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 구원이 우리에게 거저 주어지지만 이 세상 모든 것을 포기한다 해도 아깝지 않은 가치를 담고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아들의 핏값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이 선물의 가치를 아는 자는 내게 주어진 이 세상의 것들을 희생하는 것을 아깝게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누가복음 강해 (26) 누가복음 16:1-18 (0) | 2022.01.23 |
---|---|
누가복음 강해 (25) 누가복음 15:1-32 (0) | 2022.01.16 |
누가복음 강해 (23) 누가복음 13:1-14:6 (0) | 2022.01.02 |
누가복음 강해 (22) 누가복음 12:35-59 (0) | 2021.12.26 |
누가복음 강해 (21) 누가복음 12:1-34 (0) | 2021.12.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