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3:1-14:6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지난 시간에 살핀 12장의 주제는 이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불신하는 이 세상 악한 자들은 주님이 오시는 때가 지체되는 것을 핑계로 자신이 주인인 것처럼 행세하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은 언제 오실지 모르는 세상의 주인을 진심으로 기다리는 태도를 가지고 주님이 원하시는 일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이미 아시는 주님이 오셔서 판단하시고, 심판하실 것입니다. 이 주제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연결됩니다.
앞에서는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세상을 심판 하실 것을 말씀하셨다면 여기서는 이스라엘의 심판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구약시대 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을 사용하셔서 자신이 누구이시고, 자신이 베풀 구원과 하나님 나라가 어떤 것인지 이 땅에 보여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쓰임 받았지만 정작 그중에 구원받고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될 자들은 적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혈통상, 육체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에 중대한 죄를 짓지 않는 이상 다 구원 받고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믿고 회개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른 어떤 민족들보다 특별하고, 구원에 있어서 특권을 얻었다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본문은 예수님이 그런 이스라엘이 당할 일들을 예상하게 하시면서도 안타까워하시고, 자신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까지 어떻게든 이스라엘 중에 깨닫고 믿는 자들이 더 있기를 바라셨음을 보여줍니다.
마침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께 두 가지 사건에 대해 전했습니다. 하나는 로마에서 세운 총독 빌라도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 드리던 갈릴리인들을 살해한 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실로암 지역의 망대, 즉 성벽 일부분이 무너져서 사람들이 죽은 사건입니다. 사람들은 그런 사고를 당한 사람들이 뭔가 잘못이 있어서 벌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너희’ 즉 이스라엘도 회개하지 않으면 그와 같이 망할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그것은 나중에 로마의 디도 군대에 의해 예루살렘 성이 함락되고 예루살렘 성전도 파괴될 것을 암시합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사람들과 실로암 사람들의 육신적 죽음보다 진짜 비참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하지 않아서 받는 심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상태가 얼마나 비참한지를 무화과나무 비유를 통해 묘사하셨습니다. 어떤 농장 주인이 무화과나무를 심고 때가 되어 열매를 기대했지만 첫 해에도, 둘째 해에도, 셋째 해에도 열매를 얻지 못해서 잘라버리려 했습니다. 그런데 농장 일꾼이 자기가 잘 가꾸어 볼 테니 1년만 더 기다려보고 그래도 열매를 맺지 않으면 그때 가서 잘라버리자고 의견을 냈다는 것입니다.
이 무과화나무는 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은 헛된 종교만 추구했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앙의 열매를 내는 일에 계속 실패해왔습니다. 그런 열매 없는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잘라내 심판하시고자 하지만 예수님 자신이 그런 이스라엘에게 기회가 되어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이스라엘이 예수님의 오심으로 그런 마지막 기회를 얻은 중대한 시점에 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슬프게도 이스라엘은 안타까운 상태였습니다.
그런 이스라엘의 상태를 드러내는 사례 중 하나가 10절에서 소개됩니다. 20년 가까이 허리가 구부러진 채로 살았던 여자를 예수님께서 고쳐주셨습니다. 육체적 고통의 짐, 속박에 있는 사람을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날이 안식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지도자인 회당장이 사람들 앞에서 ‘아니 일할 수 있는 육일을 놔두고 안식하는 날 사람 고치는 일을 해서 되겠냐’고 사람들 앞에서 화를 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들이 안식일에 짐승이 먹이를 먹을 수 있도록 풀어주는데, 하물며 아브라함의 딸, 사람을 자유롭게 풀어줘야 하지 않겠냐’고 물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율법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들을 사랑하라고 주신 것인데, 이스라엘이 율법을 다루는 태도는 마치 이렇습니다. ‘하나님 당신은 우리가 율법에 실패했다고 망하게 하시고, 포로로 끌려가게 하셨습니다. 두고 보십시오. 우리가 이렇게 당신의 기준대로 살아내겠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태도가 아니라 당당하겠다고, 떳떳하겠다고 다짐하고, 칼을 가는듯한 태도였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과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그대로 드러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열매가 나올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안식일과 같은 율법을 바르게 적용해서 사랑을 베푸시려 하면 그들은 도리어 화를 냈습니다.
이스라엘이 그렇게 비관적이고 암울한 영적 상태인데 과연 하나님 나라가 세워질 수 있는가, 확장될 수 있는가 의문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19절에서 하나님 나라가 겨자씨와 누룩 같다고 비유하셨습니다. 작은 점과 같은 겨자씨가 자라면 키가 2m 이상 되듯, 또 밀가루 반죽에 누룩 즉 발효종을 넣으면 크게 부풀 듯 하나님 나라는 분명 실체를 드러내고, 확장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즉 인간의 나라에 달린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달린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육신적 이스라엘이 실패할지라도 이방인들을 예수님 믿게 하셔서, 영적인 이스라엘 삼으셔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십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 구원 받는 사람의 수가 적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사람들이 선호하는 넓은 길이 아니라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에게서 나왔고, 선택하신 백성이라고 자부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이 어디서 왔는지, 어디에 속했는지 모른다고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히려 이방인들 중에서 세상의 어떤 것에 의지하지 않고 예수님과의 관계를 생명처럼 여기고 아브라함, 이삭, 야곱처럼 하나님을 아는 자들이 하나님 나라에 참여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먼저 부르심을 받았지만 쫓겨나고, 나중에 부름 받은 이방 여러 나라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를 이룰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먼저 부름받은 자와 나중에 부름 받은 자의 순서가 뒤바뀔 수 있습니다.
어떤 바리새인들이 헤롯 왕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니 예루살렘으로 가면 안 된다고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진짜 위하는 친구 같은 자들인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못 오게 막으려는 자들인지 알 수 없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말을 거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예루살렘에 가서 맡겨진 일을 하다가 죽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을 위해 보냄을 받았지만 이스라엘에게 죽임당한 선지자들처럼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죽음 당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새끼를 모으려는 암탉처럼 예수님은 오래 전부터 이스라엘을 사랑하시고 자녀처럼 품고 구원의 기회를 주셨지만 이스라엘이 결국 거절하고, 자신을 죽일 것을 아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 누구도 멸망하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사탄의 본성을 닮아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불신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거절합니다. 복을 발로 찹니다. 다른 민족들보다 먼저 부르심을 받아 쓰임 받은 이스라엘은 먼저 많은 사랑을 받았으면서도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났고, 가장 좋은 구원의 기회인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을 보고도 거절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이스라엘을 너무나 안타깝게 여기셨습니다. 주께서 자기를 부인한 이스라엘을 안타까워하신 이유는 그들이 당할 일이 비참한 심판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갈릴리 사람들의 죽음과 실로암 망대 사고보다 더 비참한 일, 열매 맺지 않는 무화과나무가 결국 겪게 될 일, 주님을 아는 체했지만 밖으로 쫓겨날 자들이 겪게 될 일,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들을 죽였던 이스라엘이 겪게 될 일은 모두 두려운 심판과 지옥을 예상하게 합니다.
주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많은 기회를 부어주셨듯 세상 모든 민족들에게도 기회를 주시고, 우리 각 사람에게도 인생 중에 수많은 구원의 기회를 주고 계십니다. 구원인 예수님 자신을 주시려 합니다. 우리에게 구원이 필요한 이유는 구원이 아니라면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향한 긍휼과 안타까움을 드러내신 이유는 그들이 당할 참혹한 심판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유들 속에서 그 심판을 암시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는 동시에 두려운 심판도 봅니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동시에 자기 아들을 비참한 십자가에 죽게 하신 하나님은 주저하지 않고 죄인들을 비참한 지옥에 던져 넣으실 것입니다. 우리는 심판과 지옥이 사실임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곳으로 향하는 자들에 대한 주님의 사랑과 안타까움을 생각해야 합니다. 구원의 길을 오직 예수님께 있으니, 우리가 진정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알고, 믿고, 의지하고, 순종하고 있는지 항상 점검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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