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누가복음 강해 (25) 누가복음 15:1-32

따뜻한 진리 2022. 1. 16. 20:23

누가복음 15:1-32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당시 유대인들의 미움을 받던 세리들과 여러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왔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을 받아주셨고 함께 식사도 하시면서 어울리셨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과 종교지도자들이 그런 예수님을 안 좋게 여기며 비방하자 예수님이 세 가지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첫 번째는 양을 잃은 목자 비유입니다. 백 마리의 양을 기르는 목자가 한 마리를 잃어버린다면 아흔아홉 마리를 놔두고, 잃어버린 그 한 마리를 찾으러 온갖 곳을 찾아다닐 것입니다. 그러다가 드디어 그 양을 찾으면 목자는 너무나 기뻐서 그 양을 어깨에 메고 돌아와 이웃들과 잔치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비유는 드라크마 동전 열 개중 한 개를 잃어버린 여인 비유입니다. 한 드라크마는 당시 노동자의 하루 일당 정도 되는 가치의 동전입니다. 적지 않은 금액이긴 하지만 그것을 찾았다고 기뻐서 이웃들에게 알릴 만큼은 아니라고 우리는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 비유를 들었던 사람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열 개의 드라크마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바로 알아들었을 것입니다. 드라크마는 열 개로 묶여서 주로 결혼할 때 여자의 결혼지참금이나 약혼 증표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금액을 떠나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 것입니다. 그래서 그중 하나를 잃어버린 여인은 온 집을 청소하듯이, 등불을 켜고 샅샅이 찾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찾았을 때 너무나 기뻐서 친구들과 이웃에게까지 알린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첫 번째와 두 번째 비유의 마지막에서 공통적으로 회개할 것이 없는 자들보다 회개한 한 사람 때문에 하늘에서 기뻐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진짜 죄가 없어서 회개할 필요가 없는 거룩한 자를 의미하기보다 자신들이 세리와 죄인들처럼 회개해야 하는 죄인인 줄 모르는 종교지도자들을 가리킬 가능성이 높습니다.

 

    세 번째 비유는 아주 유명한 방탕한 아들, 탕자 비유입니다. 어떤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둘째가 아버지에게 유산을 먼저 나눠달라고 하자 아버지는 재산을 두 아들에게 각각 나누어주었고, 둘째는 그것을 가지고 집을 떠났습니다. 그는 먼 외국으로 가서 방탕한 생활을 하면서 그 재산을 다 낭비했습니다. 그리고 그 나라에서 노숙자가 되었고, 유대인으로서 가까이하면 안 되는 돼지를 키우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굶주렸지만 돼지들이나 먹는 쥐엄열매조차 얻어먹지 못했습니다. 그는 자기 아버지 집에 있는 종들보다 못한 자신의 비참한 상태를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아버지에게 돌아가 잘못을 고백하고, 아들로 인정받는 것은 바랄 수도 없으니, 아버지의 종이 되어서라도 살아야겠다고 다짐을 했습니다. 그리고 고향으로 향했습니다.

 

    그 아들은 거지꼴로 고향에 돌아와 저 멀리 집이 보이는 곳에 도착했습니다. 아직 거리가 먼데도 아버지는 그 아들을 알아보고는 달려와 끌어안고, 입을 맞췄습니다. 그 아들은 자신의 죄를 뉘우치며 아버지의 아들이 될 자격이 없다고 말했지만 아버지는 종들에게 시켜서 그 아들에게 가장 좋은 옷을 꺼내다가 입히고, 손에는 반지를, 발에는 신을 신겼습니다. 아버지는 죽은 줄 알았던 아들이 살아 돌아왔다고 기뻐하면서 살진 송아지를 잡아 마을잔치를 할 준비를 했습니다. 그때 큰 아들이 일하러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면서 자기 집 주변에서 시끌벅적한 일이 있자 무슨 일이냐고 종에게 물었습니다. 자초지종을 들은 큰 아들은 아버지에게 화를 내며 말했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늘 아버지 곁에서 아버지의 말을 잘 듣고 일을 했는데, 저를 위해서는 친구들과 먹으라고 염소 한 마리도 잡아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를 거역하고, 욕되게 하고, 재산을 다 날리고 돌아온 동생에게 이렇게 잘 해주실 수 있는 겁니까!’ 그 큰 아들은 불만이 가득해서 집에 들어가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아들아 너는 늘 나와 함께 있었고, 나의 것은 다 네 것이다. 죽은 줄 알았던 동생을 내가 다시 찾았으니 함께 기뻐하자’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큰 아들이 어떤 변화를 보였는지는 말씀하시지 않은 채 비유를 마치셨습니다. 비유 속 큰 아들은 바로 죄인들을 받아주신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긴 종교지도자들을 가리킨 것이었으니 이 비유의 결말은 그들이 스스로 마무리해야 했습니다.

 

    세 비유는 모두 잃어버린 한 영혼에 대한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보여주고 그 기쁨에 동참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중 세 번째 비유는 앞의 두 비유에서 반복되는 잃어버린 것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가장 풍성하게 드러납니다. 이 세 번째 비유의 제목을 흔히 ‘돌아온 탕자’라는 부르듯 방탕하게 살다가 뉘우치고 아버지께 돌아온 둘째 아들을 탕자로 보지만 사실 아버지 곁에 있었으면서도 아버지의 사랑을 알지 못했던 첫째 아들이 더 심각한 탕자, 아직 돌아와야 하는 탕자였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자신들이 겉으로 하나님과 가까운 것 같고, 하나님을 위해 일해왔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 마음에 안드는 죄인들을 예수님께서 부르시고, 용서하시고, 가까이하시고, 은혜 베푸실 때 세 번째 비유의 형처럼 시기와 실망과 불만을 드러낸 것입니다.

 

    우리는 세 번째 비유에 등장하는 두 아들 모두의 입장에 우리 자신을 대입해서 적용해야 합니다. 먼저 둘째 아들을 생각해 보면 그가 멀쩡히 살아있는 아버지에게 재산을 분배해달라고 한 것은 아버지에 대한 불만을 표출한 것이고, 아버지를 죽은 것으로 여기겠다는 것이고, 관계를 끊고 자기 길을 가겠다는 악한 결심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를 떠나 자기 멋대로 사는 것이 행복인 줄 알았지만 아버지의 재산을 모두 탕진하고 비참하게 되어서야 잘못인줄 깨달았습니다. 그는 자기 잘못이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무거운 죄인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가 용서해주지 않을지라도 그저 아버지의 종이 되어 살겠다고 다짐하고 돌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사랑과 은혜는 예상 밖으로 너무나 컸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와의 관계가 회복되기를 애타게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사랑이 많으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둘째 아들처럼 하나님께 무엇인가 필요한 것을 얻어내려고는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이 깃든 간섭과 요구는 싫어하면서 하나님을 무시하고 귀찮게 생각하고 숨거나 멀리 달아나려 하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께 아무리 많은 것을 얻어도, 하나님을 떠나서는 비참함 밖에 없습니다. 비유 속 둘째 아들이 종살이를 하더라도 아버지 곁에 있는 것이 복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이 나의 복이심을 알고 그 관계를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우리는 둘째 아들처럼 겸손하게 죄를 인정하고, 은혜로 나를 받아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잃은 양 한 마리를 찾는 목자이시고, 드라크마 하나를 찾기 위해 온 집안을 샅샅이 살피는 여인과 같고, 패륜아 같이 집을 나간 아들이라도 언제 돌아올까 기대하며 날마다 먼 곳을 응시하는 아버지와 같으십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이 세상이 사랑을 많이 말하고, 노래하기 때문에 사랑을 아는 듯하지만 그런 것들은 모두 자기 사랑, 이기심, 자기만족에 근거한 사랑으로 오염되어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진정 참사랑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사랑을 배워야 합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항상 아버지의 집에 머물러 있었던 첫째 아들을 통해서도 우리 자신을 점검해야 합니다. 첫째 아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바른 삶을 산 것처럼 보였습니다. 아버지에게 걱정을 끼쳐드리지 않는 착한 아들 같았습니다. 그는 동생이 돌아오던 순간에도 성실하게 밭에서 일하다가 돌아오던 중이었습니다. 그러나 동생에게 은혜를 베푸는 아버지의 모습 앞에서 그가 지금까지 어떤 태도로 아버지의 곁에 있었는지가 드러났습니다. 그는 아버지 곁에 있었지만 스스로를 종처럼 여긴 자였습니다. 자신이 수고한 대가를 인정받기 위해 일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자격 없는 동생을 환영하자 자신이 무시당했고 동생에게 은혜 베푼 것이 부당하다고 아버지를 원망했습니다. 첫째 아들은 아버지가 이미 자신을 사랑하는 것을 몰랐습니다. 집 나간 동생이 돼지들 틈에서 뒤늦게 깨달았던 내용 즉, 아버지의 모든 것이 자신에게 거저 주어졌던 것이었음을 형은 여전히 몰랐습니다. 아버지는 그런 큰 아들의 상태를 알았기 때문에 31절에서 이런 말을 한 것입니다. ‘얘야 너는 나와 항상 함께 있어 왔고, 나의 것이 다 내 것이지 않느냐?’ 큰 아들은 아버지가 자신을 사랑하는 것, 아버지가 자신의 것을 거저 자기에게 주었다는 사실이 어떤 의미인지 몰랐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자였지만 그는 돈 받고 일하는 일꾼의 태도를 가지고 일했습니다. 그가 진정 아버지의 사랑을 알고, 감사했다면 그는 어떤 조건 없이 아버지 곁에 머무르고, 아버지를 위해 일했을 것입니다. 그가 아버지에게 받은 은혜가 과분하다는 사실을 안다면 동생에 대한 질투와 원망보다 아버지의 감정에 공감하고 함께 기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참으로 구원을 받은 자는 공로를 인정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기꺼이 감사함으로 섬길 것이고, 내가 관심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관심이 머무는 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함께 기뻐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또한 아직 구원받지 못한 자들도 사랑하십니다. 진정 바라기는 우리 모두가 먼저는 하나님께 돌아와 구원받고, 그 다음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에 공감하며, 잃어버린 영혼들을 위해 함께 슬퍼하고, 함께 기뻐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