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7:1-19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우리는 구원 얻기 위해 회개와 믿음을 추구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회개와 구원자이신 예수님께 의존하고 순종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회개와 믿음을 통해 구원을 누리는 성도가 하게 되는 일은 자신이 경험한 그 일 바로 회개와 믿음이 다른 사람에게도 일어나도록 돕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을 회개하고 믿도록 섬기는 일보다 실족시키는 일이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로 다른 사람을 실망시켜서 마음을 닫도록 만들기도 하고, 그 사람을 위한다고 하지만 우리의 사랑이 없는 지적과 정죄 때문에 그 사람이 버려진 자가 되게 만들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실족시키는 일이 안 일어날 수는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실족시키는 일은 우리의 행동으로 드러나는 모든 악한 말과 어리석은 행동, 욕심과 거짓과 여러 부도덕한 행위뿐만 아니라 잘못된 가르침으로 인해 상대를 하나님과 무관한 종교인으로 만드는 것까지 포함합니다. 예수님은 여러 교훈을 통해 제자들에게 종교지도자들을 경계하면서 그들을 닮지 않게 하셨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자신들만 예수님을 믿지 않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예수님을 믿지 않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신앙을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잘못된 신앙으로 다른 사람이 예수님을 바르게 믿지 못하게 할 수 있고, 우리의 도덕적 잘못으로도 다른 사람이 예수 믿지 못하게 방해할 수 있습니다.
2절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함부로 대하고, 실망시키기 쉬운 대상을 작은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작은 자는 단순히 어린 아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 소외된 자, 무시당하기 쉬운 사람들, 죄인으로 낙인 찍힌 자들이 해당됩니다.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기 쉽고, 그렇게 해도 괜찮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나보다 높아 보이는 사람들보다 나보다 뭔가 못하고, 약하고, 악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에게 함부로 하기 쉽습니다. 그런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더 높고, 훌륭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함부로 정죄하는 과정에서 죄성을 더 쉽게 드러냅니다. 아이들이나 가난한 자나 죄인들에게 쉽게 감정을 쏟아내고, 분노를 퍼붓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자들을 실족시켜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실족시킨 자는 차라리 연자맷돌, 커다란 돌덩이에 묶여서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낫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우리의 행위에 쉽게 영향을 받는 약한 자이든, 우리가 분노를 퍼부어도 마땅한 악인이든 그들은 예수를 믿어 구원 얻어야 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때문에 사람들이 마음을 더욱 닫고, 달아나고, 실족하게 하지 않고 구원으로 나오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은 우리가 서로의 죄를 잘못 다루다가 실족하게 만드는 일, 죄 때문에 또 다른 죄가 계속 영향력을 발휘하지 않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용서하는 것이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용서하기 위해서 죄를 건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다른 사람의 약함과 죄를 다룬다고 하면서 우리의 마음이 높아져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상대의 죄를 지혜롭게 경고하고, 잘못을 시인하면 용서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용서를 할 때 한두 번이 아니라 계속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죄를 다룰 때 한두 번의 지적과 용서로 달라질 것이라는 순진한 기대를 버리고, 치열하게 사랑으로 죄와 싸워야 한다는 것을 각오해야 합니다. 준비해야 합니다. 쉽게 달라지지 않을 것을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죄를 다루는 우리가 실망하고, 지쳐서 죄를 방관하거나, 냉소하거나, 분노를 쏟기만 하다가 상대를 실족시키거나 내가 실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죄에 대해 인내하시고, 사랑으로 용서하시며 다루시는 것을 기억하면서 서로의 죄를 다뤄야 합니다.
다음으로 예수님은 믿음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믿음을 더 달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이 있으면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믿음의 양이나 크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작은 믿음이라도 있으면 그것을 가지고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해서 순종하는 것이지 내가 자원처럼 쌓아놓고 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인격적으로 믿는다면, 그 믿음이 사람이 생각하기에 크거나 작을 수 있지만 어찌 되었든 예수님께 순종하고자 하는 의지를 만들어내고, 그것으로 순종하면 결국 무슨 일이든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즉 자기의 믿음이 작다면서 순종하지 않는 것은 핑계지 사실은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믿음에 대해 잘못된 이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결국 자기가 좀 순종해서 대단한 결과를 얻으면 자기 믿음을 자랑하게 됩니다. 주께서 이루시는 일에 우리의 믿음이 필요하고, 주께서도 그 믿음을 요구하시지만 우리의 믿음에 능력과 결과가 달린 것이 아니라 그런 믿음을 보시고 일하시는 예수님께 달려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7절에서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주인도 맡겨진 일을 다 한 종한테 밥상을 차려주고 와서 먹으라고 하는 일이 없고, 오히려 종한테 식사 준비까지 시키고, 주인이 식사를 마친 후에 먹으라고 명령한다는 것입니다. 종이 그렇게 잘 한다고 해서 주인이 종에게 고맙다고 하지 않듯이 제자들도 하나님께 순종한 것을 가지고 자기 공로로 여길 수 없고,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에 대해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이라고 고백해야 한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을 공로로 여기지 않도록, 믿음을 가진 자가 자신의 순종으로 대단한 결과를 보았다고 해서 자랑할 수 없고, 우리를 지으시고 구원하신 하나님께 당연한 도리를 하는 것임을 알게 하셨습니다. 믿게 해주신 하나님, 믿음을 주신 하나님, 하나님의 일에 순종할 영광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는 것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11절에서 예수님이 나병환자들을 치유하신 사건은 믿음으로 자기 공로를 자랑하고 싶은 제자들에게 교훈이 되었습니다. 10명의 나병환자는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제사장을 향해서 갔습니다. 그 열 명이 돌아가는 중에 치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중 한 명 만 예수님께 와서 엎드려서 감사를 표현했습니다. 17절에서 예수님이 자기에게 돌아와 감사를 표현한 그 사람이 이방인이었음을 일부러 밝히신 것은 나머지 아홉 명이 유대인임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나머지 9명도 각자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듣고 각자 자기가 사는 곳의 제사장을 향해 걸어가는 도중에 치료되었지만 예수님이 누구신지 믿고 예수님에 대한 합당한 태도를 드러내지는 않았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치료된 자기 몸을 제사장에게 빨리 보여서 부정한 자에서 께끗한 자로 인정받아 자유롭고 싶은 기대감에 자기 길로 갔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그저 능력 베풀어준 고마운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낫게 된 경험은 자기 자신에 대한 집착과 자랑을 더 가져올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 나병환자의 경험은 예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게 된 믿음, 19절이 말한대로 구원 얻는 믿음이었습니다. 이방인이 그런 믿음을 보여주었다는 것은 유대 종교지도자들을 비롯한 이스라엘 본 백성들과 제자들을 부끄럽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그 구원을 위해 우리에게서 일어나야할 회개와 믿음은 우리 공로가 될 수 없습니다. 창조주 하나님 앞에 우리가 부인할 수 없는 죄인이기에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향하여 회개하는 것은 마땅합니다. 또 이 세상에서 오직 하나님만 참되시고, 변하지 않는 분이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시기에 하나님을 믿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 공로가 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회개와 믿음으로 구원받는 자는 다른 사람들도 구원 얻도록, 다른 사람이 회개하고 믿어서 구원 얻도록 돕습니다.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이 회개하고 믿어 구원 얻게 하는 일에 헌신하는 일도 우리의 자랑과 공로가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사람들의 죄를 다루면서 서로 실족하기 쉽고, 또 믿음으로 한 일 때문에 교만하기 쉬우니 그것 때문에도 겸손해야 합니다. 한 마리 잃어버린 양과 같은 사람들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그런 자들이 회개하고 믿도록 겸손하게 섬깁시다. 잃어버린 나를 하나님이 먼저 찾아주셨으니, 구원해 주셨으니 아직 남아 있는 잃어버린 자들을 찾는 일에 기쁨으로 겸손히 헌신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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