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누가복음 강해 (37) 누가복음 22:19-62

따뜻한 진리 2022. 4. 10. 22:41

누가복음 22:19-62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예수님은 자신의 십자가 죽음이 어떤 의미인지 제자들에게 성찬으로 가르쳐주셨습니다. 출애굽기에서 그저 몸의 죽음을 막아준 유월절 어린양과 달리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은 우리가 죄 때문에 당할 참혹한 저주, 영적 죽음을 근본적으로 해결해주는 능력이 되십니다. 또 출애굽이 이스라엘을 바로의 핍박과 육신적 노예 생활에서 벗어나게 했다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모든 믿는 자들을 죄의 노예와 영원한 심판에서 벗어나게 하는 진정한 자유와 해방을 줍니다. 이렇게 성찬은 예수님이 잡히시기 전 제자들과의 뜻깊은 자리였는데, 예수님은 그 자리에서 슬픈 이야기를 하십니다. 바로 두 제자의 실패를 공개적으로 예고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가룟 유다가 자신을 배반할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성찬이 있기 전 유다는  대제사장들에게 예수를 잡아갈 수 있도록 협조하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성찬을 마칠 때 쯤 예수님은 자신을 팔아넘긴 자가 그 자리에 함께 있다고 공개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할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32절을 보면 예수님은 그런 배신을 하더라도 베드로가 자신에 대한 실망감과 죄책감 때문에 좌절하지 않고, 다시 돌이킬 수 있도록 기도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결코 자기는 예수님을 배반하지 않는다고, 예수님이 가시는 곳을 어디든 목숨을 걸고 갈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감람산으로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곧 일어날 일 때문에 고통 속에서 온 힘을 다해 기도하셨는데, 땀이 핏방울처럼 흘렀다고 누가는 말합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기도하시는 동안 제자들은 피곤해서 잠이 들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깨워 기도하라고 말씀하실 때 결국 예수님을 잡으러 온 무리들이 나타나 예수님을 잡아갔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끌려가신 대제사장의 집 근처에 따라갔다가 자신을 알아본 사람들이 자기를 향해 예수의 제자라고 아는 체했을 때, 세 번이나 아니라고 부인했습니다.

 

    마태복음을 보면 가룟유다는 예수님이 잡혀가신 후 양심의 가책을 받아 대가로 받은 은 삼십을 도로 가져다주고 자살을 했습니다. 유다의 최후에 대해 여러 해석들이 있지만 유다는 자기가 예수님을 팔아넘긴 일을 진짜 반성한 것이 아니라 자존심을 스스로 지키려 한 결과라고 생각됩니다. 유다가 정말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깨달았다면 예수님을 위해 살면서 생명을 내놓아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유다와 베드로의 속을 다 알고 계시고, 앞날도 훤히 내다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려주셔도 그들은 자신의 생존 본능과 자기 의를 이겨내지 못했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넘기는 일을 중단하지 않았고, 베드로도 두려움 속에서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본성상 자기 목숨과 안전과 자존심을 우선시하는 인간을 잘 아시면서도 끝까지 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과 다를 바 없는 죄인들, 우리들도 구원하시려고 십자가 길을 가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과 예수님 이외의 다른 사람들이 크게 다른 것을 대조시켜서 보여줍니다. 제자들을 포함해서 본문에 등장한 사람들은  자신의 살길을 위해 움직입니다. 가룟 유다는 줄곧 따라다녔던 예수님이 더 이상 자기가 기대한 분이 아니라는 사실 때문에 결국 팔았습니다. 또 제자들은 성찬 자리에서 서로 자기가 높다고 싸웠습니다. 인간은 자기가 살아남기 위해 남을 밟고 올라섭니다.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다툽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잡으러 온 대제사장들 역시 자신들의 종교적 권력을 놓칠 수 없기 때문에 자기 살길을 지키기 위해 예수님을 없애려 한 것입니다. 베드로 역시 예수님이 위험에 처하신 것을 느끼고 자기는 휘말리지 않기 위해, 살기 위해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자기 살길을 마련했습니다.

 

    그렇게 다들 자기 생존의 길을 마련하고, 모색하는 중에 예수님만 살길이 아닌 죽는 길을 가셨습니다. 22절을 보면 예수님은 자신을 판 가룟 유다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셨지만 동시에 몸을 가진 완전한 인간이셨기 때문에 우리와 같이 생존 본능이 있으셨습니다. 편한 길, 고통 없는 길, 살 수 있는 길을 가고자 하는 마음이 분명히 있으셨습니다. 그런 길을 갈 수 있는 엄청난 능력도 있으셨으니 그 유혹이 더욱 컸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버지와 약속하신대로, 정해진 대로 길을 가셨습니다. 살 길이 아니라 죽는 길에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오래전부터 작정된 그 길을 가셨습니다.

 

    42절 기도하는 장면에서도 그런 예수님의 태도가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모든 불안과 고통, 살고자 하는 욕망이 있음을 정직하게 고백하시면서도 하나님의 뜻에 따르겠다고 기도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자신의 길을 따르라고 제자들에게 성찬을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다른 복음서 저자들과 달리 누가는 예수님이 성찬 자리에서 발을 씻기신 사건을 기록하지는 않았지만 서로 다투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자기처럼 종의 자리에 있어야 한다고 가르치신 것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서로 살겠다고, 높은 자리를 지키겠다고 하지만 예수님은 진정 높은 자,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겸손하게 다른 사람의 발을 씻기는 길, 섬기는 길, 죽는 길을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성찬과 잡혀가심과 십자가 죽음은 하나님이 피조물인 우리를 섬기시면서 너희는 이런 나를 닮아야 한다는 교훈을 몸소 분명하게 보여주신 사건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드러내는 길이 아니라 하나님을 드러내기 위해 낮아지고 죽는 길을 가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마지막까지 가르쳐 주신 삶의 방향입니다. 하나님과 무관한 채로 살려고, 이 세상에서 살아남으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과 관계되고 하나님을 위한 삶을 살려다가 죽는 것이 진짜 생명을 얻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일생 동안 그 본을 보이셨고, 십자가에서 자기 살과 피를 주시는 것을 성찬을 통해 가르치셨고, 종처럼 발을 씻기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이신 분이 이처럼 낮아지셔서 우리를 섬기셨는데, 지금도 섬기고 계신데 피조물인 우리가 어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존재로 사는 것을 마다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고백하고 드러내는 삶을 사는 일 때문에 손해보고, 무시당하고, 어려운 당하는 일을 어찌 주저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모두 주님을 높이고, 또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게 하는 일을 위해 섬기는 종이 됩시다. 우리의 행동, 말, 시간, 건강, 직업, 공부를 통해 자기 살 길을 구하는 자들이 아닌 주님을 따르는 종이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