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창세기 강해 (6) 창세기 2:16-17

따뜻한 진리 2022. 6. 12. 19:11

창세2:16-17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언약이라는 것은 그것에 참여하는 당사자끼리 서로의 권리와 의무를 지키겠다고 약속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 자체가 언약적입니다. 하나님은 만드신 것들을 책임지고 돌보시는 분이시고, 만들어진 모든 것들은 생겨난 시작부터 자신이 피조물이라는 것을 시인하면서 지으신 이를 고백하는 것에서 언약이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피조물은 명령에 순종합니다. 첫 사람 아담은 그런 언약적 세계 안에 있었습니다. 지난 시간에 살핀대로 에덴은 성전이었고, 아담은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땅의 모든 것을 다스리지만 그 모든 것과 함께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아담은 에덴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자신과 주변의 세상과 동식물들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나는 하나님께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창조 사건에서부터 피조 세계와 에덴의 모든 구성들이 아담을 둘러싼 언약적 구조였습니다. 그런 암묵적이고 직관적인 언약을 넘어 하나님은 언약적인 관계를 더욱 분명하게 하셨습니다. 아담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말로 전달하신 것입니다.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그렇게 능동적으로 행해야 할 긍정적 명령 뿐 아니라 부정적인 금지 명령도 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선악과를 두고 하신 언약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언약은 행하면 살고, 어기면 죽는다는 조건적인 언약입니다. 아담이 죽음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을까요? 그는 에덴의 환경 속에서 죽음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하위의 생명이 상위의 생명을 위해 구별되고 희생하는 그 죽음을 에덴에서 목격했고, 그 자신도 그 질서 안에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선악과를 두고 경고하신 죽음은 그런 죽음과 달랐습니다. 그 죽음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에덴의 원래 질서 속에서 하나님을 높이는 헌신으로써의 영광스런 죽음이 아닌, 질서가 뒤집히는 죽음, 비참한 죽음, 영원한 관계의 단절인 죽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언약으로 아담을 일정 기간 시험하기로 하셨습니다. 아담이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부인하지 않고, 인정하고, 순종하면 아담은 하나님이 일곱째 날 보이신 영광스런 안식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아담이 순종했다면 세상은 하늘 위의 하나님 나라와 하나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위대한 일을 아담의 순종의 결과, 행위의 결과로 두셨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7장 2항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과 맺은 최초의 언약은 행위 언약이었다. 하나님은 이 언약에서 완전하고 인격적인 순종을 조건으로 아담에게 그리고 아담 안에서 그의 모든 후손에게 생명을 약속하셨다.’ 행위 언약은 행한대로 결과를 얻는 것입니다. 첫 조상 아담은 온 인류의 운명이 달린 막중한 책임 가운데 있었습니다. 아담의 순종과 불순종에 따라 그에게서 태어난 모든 후손이 완성된 하나님 나라를 태어나면서부터 누리느냐, 죄인으로 비참한 가운데 태어나 사느냐가 결정되었기 때문입니다.

 

    개혁신앙의 선조들은 이 행위 언약이 가려지지 않게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들이 행위 언약이라는 개념과 용어를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행위 언약의 반대자들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모든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은혜로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아담이 아무리 충성하고, 잘 한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조건을 만족할 수 없는데 과연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순종을 조건으로 영생을 주시겠다는 언약을 맺으셨겠냐, 하나님께서 사람의 순종에 따라 엄청난 결과가 좌우되게 요구하셨겠냐고 반론을 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의 수준이 하나님 보시기에 어떠하든 상 주시는 것과 징계하시는 것의 책임을 사람에게 지우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아담이 하나님께 순종하는지 아닌지에 따라 결과를 얻게 되는 행위 언약 아래 있었음을 분명히 인정해야, 아담과 함께 모든 인류가 죄인이 되었다고 말하는 성경의 주장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아담이 그저 하나님이 다 받아주시는 은혜 아래에만 있었다면 어찌 모든 인류가 죄인이 된 것입니까? 첫째 아담이 자기 행위에 따라 결과를 얻는 행위 언약의 효력 아래 있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된 것처럼, 둘째 아담인 예수님의 순종하신 행위로 인해, 예수님의 공로로 인해 믿는 사람 모두에게 구원의 영향력이 미치는 원리도 바르게 설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아담이 행위 언약 아래 있었음이 분명해야 이스라엘이 율법 아래 있었던 의미도 분명해집니다. 하나님은 아담처럼 출애굽 한 이스라엘을 다시 행위 언약 아래 두십니다. 이미 죄인들인 이스라엘을 율법, 행위 언약 아래 두신 것은 율법을 지켜야 구원해주시겠다는 뜻이 아니라 아담이 행위 언약 아래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순종하는 것이 인간의 본분임을 이스라엘에게 다시 가르치신 것입니다. 또한 아담이 범죄하였듯이, 이스라엘 역시 아담의 후손으로서 아담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으니 율법 아래서 자신들의 비참한 죄를 깨닫고 하나님이 보내실 구원자를 겸손히 기다리게 하신 것입니다. 아담은 타락 전이었고, 이스라엘은 타락 후 죄성을 가진 인간 집단이라는 차이는 있지만 성경은 아담과 이스라엘 둘 다 행위의 조건 가운데 있었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호세아 6장 7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불순종한 이스라엘을 향해 “그들은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에서 나를 반역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이나 이스라엘에게 행위, 율법을 요구하셨다는 것이 우리에게 불편한 마음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가 은혜에 기초하지 않고, 행위나 공로로 기초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로우신 분이십니다. 창조라는 시작부터 은혜이고, 구원과 종말의 완성도 은혜입니다.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저 하나님의 은혜만 알고, 은혜만 누리는 것이 우리의 본분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행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을 전지전능하신 분이 편하게 수고 없이 창조하신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삼위 하나님은 헌신하시고, 수고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 2장은 하나님의 행하심으로 가득합니다. 삼위 하나님은 온 세상 창조를 행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창조의 일을 하신 후 자기 행위를 스스로 검증, 평가하시고 만족하셨습니다. 그래서 보기에 좋았다고 말씀하신 것이고 자신이 완전한 안식을 누릴 자격이 있다는 것을 일곱째 날에 보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형상으로 지으신 인간도 그런 영광에 참여하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하나님의 수준 만큼 위대한 행위를 할 수도 없고, 행위 언약을 실행할 능력과 성취와 공로와 만족도 하나님께 얻어야 하지만 아담이 하나님처럼 따라함으로써 하나님의 수고에 대해 공감하고, 하나님을 더욱 존경하게 되고, 영광 돌리게 하신 것입니다.

 

    아담이 그런 영광스런 행위 언약을 준수하는 일에 실패했지만 행위 언약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율법을 지키지 못했다고 해서 율법, 십계명이 없어지지 않은 것처럼 말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어 행위 언약을 위반해서 기회를 잃었지만 행위 언약이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대신 완전히 행하시고 그 공로를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첫째 아담이 행위 언약 아래 있었음을 분명히 해야 하는 이유는 둘째 아담이신 예수님이 자신의 행위로 죗값을 치르시고 죄를 이기시고, 하나님의 만족이 되신 그 공로가 우리에게 전가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나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님의 공로에 의지하는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을 얻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위해서는 무슨 행위를 더 잘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착하고, 다른 사람을 잘 돌보고, 정의로운 행동을 하고, 하나님을 위한 행동을 한다고 해서 그것이 구원에 보탬이 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자는 자신의 행위가 구원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함을 알아도 선을 행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을 닮아서 성실하고, 정직하고, 거룩하고, 정의롭고, 사랑하고. 배려하고, 섬기는 행위들을 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수록 하나님 닮은 행위를 하며 사는 것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우리의 마땅한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이 없는 태양과 달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움직이고 있고, 우리보다 낮은 위치에 있는 수많은 생명들도 하나님이 만드신 질서에 따르며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살고 있는데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자들이 하나님 닮은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죄이고 비참함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은 하나님이 내게 좀 잘해주셨기 때문에, 죄인인데 지옥 안 보내시고 천국 가게 해주시니까 그저 고마워서 은혜 갚는 시늉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로서 당연하고도 영광스런 의무이기 때문에 행하는 것입니다. 그런 이해 속에서 예수님은 ‘행하는 자라야’ 한다고, ‘열매로 알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창조에서나 구원을 위해서나 열심히 일하시는 분이시기에 우리도 하나님처럼 행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