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창세기 강해 (5) 창세기 1:29-2:19

따뜻한 진리 2022. 6. 5. 17:41

창세기 1:29~2:19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그 끝을 다 알 수 없는 우주를 통해서 자신의 존재와 능력의 범위가 어떤지를 드러내셨을 뿐 아니라, 우주에 비하면 지극히 작은 공간인 지구에는 다른 곳과 비교할 수 없는 복을 집중적으로 부으셔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나타내셨고, 또 지구의 어떤 공간보다 에덴에 복을 더하셨고, 또 지구의 어떤 생명들보다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시고, 생기를 불어넣으셔서 복되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우주라는 가장 큰 것보다 사람이라는 작은 피조물에 인격적인 하나님의 신비와 영광을 가장 집약적으로 담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세계를 창조하신 것 자체로도 기뻐하셨지만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자기 형상을 닮은 인간이 자신과 교제하고, 자기를 닮은 일을 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하나님을 예배하고 높이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사람은 땅의 모든 것의 주인이고, 많은 복을 누리지만 그것들을 가지고 하나님을 높여야 합니다. 그것은 왕 같은 제사장의 삶입니다.

 

    그런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을 경배하라는 뜻은 무엇보다 성전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하나님과 친밀하고, 하나님으로 만족하고, 하나님을 가장 귀하게 여기고, 경외하고, 섬기고, 순종하고, 예배하고 자랑하는 것이 인간의 본분인데 그것이 성전과 그 안에서 일하는 제사장의 사역을 통해 가장 분명하게 계시된 것입니다. 그 성막은 출애굽 후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주셨지만 이미 태초의 에덴에서도 하나님은 아담이 그런 역할을 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인간이 제사장처럼 하나님을 예배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은 태초부터 드러난 명령이었습니다. 그래서 성막에는 우주의 이미지와 에덴의 이미지와 하나님과 교제하고 예배하는 것을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미지가 모두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주와 지구와 에덴과 성막과 그리스도라는 겹겹이 싸인 하나님의 반복된 메시지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거하며 친밀한 관계를 누리길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즉 우주, 에덴, 이스라엘의 성막,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과 함께 하며, 하나님께 가까이 나갈 수 있을까를 말해줍니다. 그중에서 오늘 본문은 에덴이 하나님을 만나고 예배하는 성전으로 의도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전에 언약으로 보는 성경 시리즈를 설교할 때 에덴동산이 왜 성전이었는지에 대해서 살펴본 적이 있는데 여기서 다시 간단히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 성경에서는 이스라엘이 만든 성막과 성전 말고도 모세를 만나신 시내산,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 계시록의 심판 장소를 의미하는 시온산을 성전으로 가리킵니다. 그런데 본문 10~14절을 보면 에덴은 주변 강들이 흘러나오는 높은 산이었습니다. 둘째로 에덴에 있던 선악과와 생명나무는 성막 안에 있었던 언약궤와 나무 모양의 촛대와 나란히 연결됩니다. 셋째로 본문 10-14절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보석과 금속들은 성전에서 섬기던 대제사장의 예복, 특별히 가슴에 붙이는 흉패에도 등장합니다. 이후 계시록 21장에 가면 마지막 때 이뤄질 종말론적 성전에 기초석으로 이 보석들이 다시 등장합니다. 넷째로 아담과 하와가 타락해서 쫓겨날 때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의 동쪽 문밖에 두 그룹(천사의 형상)을 세워두셔서 에덴을 지키게 하십니다. 마찬가지로 성전 지성소의 언약궤 위에는 그룹이 마주 보고 지키고 있는 형상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그룹의 존재 역시 에덴이 성전이었음을 말해줍니다. 다섯째로 하나님께서 아담을 에덴에 두셔서 경작하고 지키게 하셨는데, 여기서 사용된 단어(아바드, 샤마르)는 성막 안의 제사장의 임무를 묘사하는 데도 사용됩니다. 즉 에덴은 성전이었고, 거기 세워진 아담은 제사장이었던 것입니다.

 

    아담이 제사장이었던 것은 단지 하나님이 아담에게 종교적이고, 형식적인 일만을 시키셨다는 것이 아닙니다. 지난 시간에 살핀 대로 아담은 하나님을 닮은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아들과 같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주신 많은 복들을 누리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생명들을 자기 아래에 두면서 잘 돌볼 수 있는 권리와 책임이 있었습니다. 그는 왕 같은 제사장이었습니다.

 

    본문은 아담이 하나님과 다른 피조물들 사이에서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7절을 보면 하나님은 아담에게 생기를 불어넣으셨습니다. 이 표현은 하나님이 사람을 자기 형상대로 만드셨다는 내용과 함께 사람이 어떤 다른 피조물들보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우위에 있고, 우선적인 존재라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이 그런 특성을 가질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성령 하나님으로 인해 가능합니다. 이는 마치 요한복음 20장 22절에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사람이 참된 하나님의 형상이 되려면 성령께 의존된 생명을 가져야 함을 의미합니다.

 

    1장 26절을 보면 하나님은 아담에게 땅의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셨고, 29절을 보면 땅의 씨 맺는 채소와 열매 맺는 나무를 먹을 것으로 주셨습니다. 이 구절만을 보면 하나님께서 최초 사람에게 풀, 곡식, 과일 같은 식물만 음식으로 주신 것처럼 생각하게 됩니다. 또 창세기 9장에서 홍수 심판이 끝난 후 하나님이 노아에게 ‘모든 산 동물들’을 음식으로 허용하시는 내용이 나오기 때문에 홍수 이전에는 사람이 식물만 먹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말씀하신 ‘모든 산 동물들’에서 ‘모든’은 방주 안에서 거룩한 것과 부정한 동물을 구별했었는데 이제는 그런 제한을 하지 말고 동물을 음식으로 취해도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에덴에서 첫 사람에게 음식으로 주신 것에 모든 식물만 포함시킨 것은 뒤에 나올 선악과를 분명히 대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즉 모든 채소와 모든 나무 열매는 먹어도 되지만 그 선악과만은 금지된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입니다.

 

    처음부터 동물도 사람의 음식이었다는 것은 타락 전에도 에덴에는 죽음이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생태계는 죽음을 통해 자기보다 상위에 있는 다른 생명을 섬기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식물들은 초식동물의 먹이가 되고, 초식동물들은 육식동물의 먹이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 역시 다른 생명체들의 헌신을 통해 자신의 몸의 생존을 이어나갈 수 있습니다. 아담은 다른 생명들이 사람의 생명을 위해 구별되고, 성별 되어 봉사하는 것을 보고, 음식으로 그것을 경험하면서 자신도 하나님께 구별되어 드려져야 하는 존재임을 알았어야 합니다. 그것이 다른 짐승 제사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신을 드리는 사람의 헌신, 성전에서 일어나는 일이었습니다. 거룩, 성별, 드림이 성막 안에서 일하는 제사장의 역할이었습니다. 아담이 이 질서에 순종하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때 땅도 아담에게 기꺼이 복종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아담이 최소한의 수고로 곡식과 열매를 얻을 수 있도록 땅이 결실을 내놓았습니다. 또 여러 동물들도 아담에게 순종하며 모여들고 돌봄을 받았으며, 아담이 필요할 때 자기를 아담을 위한 음식으로 제공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이 에덴의 질서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담에게 동물들을 보내셨을 때 동물들이 순종한 것입니다. 동물들을 자세히 관찰하고 이름을 붙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피조세계가 그렇게 자기에게 복종하는 것을 보면서 아담은 살아있는 나무에서 과일을 딸 때, 살아있는 짐승 한 마리의 생명을 끊고 그 고기를 음식으로 취할 때 엄숙해야 했고, 자신의 생명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도록 의도되었음을 생각해야 했습니다. 그런 질서는 거룩한 것이었습니다.

 

    아담은 그렇게 땅 위의 모든 것들의 주인이었지만 자기보다 높으신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할 때 하나님을 닮은 영광스러운 주인의 역할을 지속할 수 있었습니다. 봉건시대에 왕이 자신에 대한 충성을 조건으로 영주에게 영토와 그 주권을 허락해주었듯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에서 왕 같은 제사장 역할을 하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도록, 하나님께 충성하길 원하셨습니다. 이 땅의 다른 생명들이 사람을 위해 존재하듯 사람은 자기 위에 계신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려져야 합니다. 그것이 성전 에덴 가운데 아담을 두신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이런 구도 속에서 바울은 로마서 12장에서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순종과 헌신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이 부당하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고,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영광스러운 존재가 되게 하셨으니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기꺼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드리는, 바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것을 무엇을 보고 알 수 있습니까?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아담이 하지 못한 하나님께 드리는 성별, 드림을 완수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반항한 인간을 따라 피조 세계도 인간에게 저항하고 위협을 하는, 죄로 인해 뒤집힌 상태가 되었으나 예수님은 이런 세상 속에서 오히려 낮아지셔서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드림으로 우리의 죄를 해결하셨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위치와 역할이 무엇인지를 다시 깨닫고 회복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유튜브 콘텐츠와 예능 프로그램들에서 음식, 운동, 음악, 영화, 반려동물, 취미, 오락 무엇을 하든지 그 자체에 자기 영혼을 내주는 듯한 천박하면서도 광적인 리액션을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무엇에 진심이다.’라는 표현이 이런 문화의 영적 상태를 드러내 줍니다. 하나님이 이 피조세계를 통해 우리가 누리게 하시는 일들이 과연 하나님 앞에서의 나의 위치와 역할을 확인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로 연결되는지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이 왕 같은 제사장의 태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진심이어야 합니다. 경건한 체가 아니라 하나님을 가장 우선시하고 즐거워하기 때문에 당연하게 그러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