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18-25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하나님은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라는 적극적인 명령과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금지 명령으로 아담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순종하는지를 행위로 드러내도록 요구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명령이 결과를 내도록 도울 여자를 아담에게 보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여자를 주시기 전 먼저 아담이 맡은 일인 생명들을 다스리고 돌보는 일을 하도록 동물들을 아담 앞으로 모으셨습니다. 아담은 동물들을 관찰하고 이름을 붙이면서 자기 자신이 혼자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깊은 잠이 들게 하신 후 아담의 몸을 통해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마치 결혼식장에서 신부의 아버지가 신부를 데리고 입장하듯이 여자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을 이루고, 독립된 가정을 이루어 하나님을 드러내는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제도입니다. 마가복음 10장을 보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으니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 이 세상은 남자와 여자가 서로 좋아해서 결혼하는 것처럼 묘사하지만 결혼, 혼인은 하나님이 시작하시는 일이고, 하나님이 마치시는 일입니다. 이 결혼 관계에서 두 남녀가 하나가 되어 자녀들을 낳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뛰어넘는 또 다른 목적이 있습니다.
창세기 1장 27절을 보면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시고”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신 이유는 사람이 남녀가 하나님의 형상을 닮는 일을 하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에 자기를 닮은 형상들을 낳아 번성하면서 형상의 근원이신, 닮음의 원형이신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신 것입니다. 결혼은 하나님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단지 하나님은 사람이 자녀를 낳는 일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남편과 아내의 관계 자체를 통해서 하나님의 계획을 드러내게 하셨습니다. 결혼을 통해 맺어지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드러내는 비유입니다. 모형입니다.
에베소서 5장을 보면 31절에서 바울은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라고 말합니다. 두 남녀의 결혼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의 언약을 지키는 사랑을 보여주기 위해 존재합니다.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 비유에서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금식하지 않는 것을 지적할 때 예수님이 “그 날에 이르러 그들이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은 여러 비유 속에서 자신을 신랑으로 묘사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신랑이라면 계시록 21장에서는 교회를 어린양 예수님의 신부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과 구원받는 성도인 교회를 남편과 아내의 관계로 의도하신 것이 분명합니다. 남녀의 결혼은 그저 자신들의 사랑을 이루고, 사람들 앞에서 확인받고, 유지하기 위한 관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 즉 예수님과 교회의 관계를 드러내기 위해 하나님이 만드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신랑이시고, 구원받는 성도들의 교회는 신부입니다. 결혼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어떻게 사랑하시는지 그 언약 관계를 보여주는 모형입니다. 하나님은 이 계획을 태초 에덴에서부터 아담과 하와를 통해 드러내셨습니다. 첫째 아담과 하와의 관계는 둘째 아담 예수님과 교회의 관계를 내다보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두 남녀가 서로를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을 하는 것이라 생각하지만 하나님이 의도하신 것은 결혼 관계 속에서 사랑을 배우는 것입니다. 두 남녀가 결혼을 하게 만드는 사랑이라는 감정은 시간 속에서 사라집니다. 상대를 목숨처럼 여기면서 사랑한다고, 너 없으면 나는 죽는다고 고백하면서 서로 하나가 됐지만 얼마 안 가서 언제 그랬냐는 듯 변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이처럼 고귀하면서도 위태로운 이 결혼을 통해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를 드러내시려 하십니다.
참사랑은 상대에 대한 설레는 감정이 식었을 때 비로소 배우게 되는 것이고, 수고롭게 실천되는 것입니다. 결혼 관계 속 남자와 여자는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어떻게 사랑하시는지를 보고, 기억하고, 본받고, 따를 때 서로 참사랑 할 수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변하지 않는 참사랑, 자기를 내어주는 참사랑이 하나님께만 있다는 것을 남편과 아내는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의존하지 않으면 그런 사랑을 배울 수도 없고, 상대에게 드러낼 수도 없습니다. 그런 신앙을 배우고 고백하게 하시려고 결혼이라는 거룩한 결속, 속박을 주신 것입니다. 사랑이 결혼 관계를 가능케 하는 것이 아니라 결혼이라는 하나님이 주신 언약 관계가 사랑이 무엇인지를 경험하고 배우게 만드는 장치입니다. 하나님께서 피조물에 불과한 우리를 언약으로 관계를 맺으시고, 우리가 어떠하든지 참으시고 희생하시면서 그 관계를 유지하고 완성하시는 것처럼 결혼 관계는 그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결혼 관계는 우리의 사랑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와 언약을 맺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우리를 위해 언약을 맺으시고 헌신하신 사랑을 끊임없이 확인해야만 결혼 관계를 복되게 지켜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결혼 관계가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시는 언약적 관계를 보여주고 고백하는 것이라고 해서, 아무 상대와 결혼해서 그 관계를 끝까지 유지하기만 하면 된다고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그런 언약 관계를 함께 이루고, 고백하고, 지킬 상대를 잘 찾아서 만나야 합니다. 서로의 사랑에 대한 감정적 확신도 결혼의 시작에 필요합니다. 그러나 내가 얼마나 상대를 사랑하느냐, 상대가 나를 얼마나 사랑해주냐를 느끼고 확인하는 것은 결혼의 중심된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결혼의 최고의 목적은 교회를 위해 자기를 내어주신 참된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상대에 대한 태도와 행위로 고백하는 것에 있습니다.
우리는 배우자가 나와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느낄 때, 죄인인 내가 거룩한 주님과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배우자가 변화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할 때마다 주님에 대하여 내가 고집스럽고 변하지 않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배우자가 나의 분노를 유발할 때 내가 주님의 분노를 유발하는 죄인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러한 나를 신부로 여겨주시고 관계를 끊지 않으시고 영원토록 지속하시는 진정한 남편이신 주님의 사랑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 관계를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 믿음이 혼인 관계를 지키는 것으로 고백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와 맺으신 언약 관계를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신 것을 기억하고 믿고 고백하는 것이 결혼 관계 속에서 드러나야 합니다. 예수님의 자기부인이 남편에게로, 또 남편에서 아내로 연속적으로 전달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의 결혼이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드러내는 비유, 모형이라는 것은 결국 실체, 진짜가 완성되면 사라진다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과 성도인 우리가 하나가 될 때 지상의 결혼은 그 역할을 다하게 됩니다. 마태복음 22장 30절에서 예수님은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지막에 주님과 성도들이 완전한 교제를 이루는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면 남녀의 결혼 관계는 그것이 가리킨 진짜 실체에게 자리를 내주는 것입니다. 결혼은 시간 속에서 잠시 그리스도와 교회의 영광을 지시하는 모형입니다. 하나님은 미천한 피조물이자 벌 받아야 할 죄인인 우리를 새롭게 하셔서 자기와 하나 되게 하십니다. 이 놀라운 사랑을 남녀의 한 몸 되는 결혼 관계를 통해 드러내셨습니다. 우리의 결혼들은 일시적이지만 그러나 예수님을 드러내는 것이기에 고귀하고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우리는 이 결혼 관계 속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고백해야 합니다.
'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창세기 강해 (9) 창세기 3:8-19 (0) | 2022.07.03 |
---|---|
창세기 강해 (8) 창세기 2:25-3:7 (0) | 2022.06.26 |
창세기 강해 (6) 창세기 2:16-17 (0) | 2022.06.12 |
창세기 강해 (5) 창세기 1:29-2:19 (0) | 2022.06.05 |
창세기 강해 (4) 창세기 1:26-28 (0) | 2022.05.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