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3:8-19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아담과 여자는 금지된 선악과를 먹고 눈이 밝아졌고, 하나님이 주신 자신들의 몸을 부끄럽게 여길 뿐 아니라 하나님을 피해서 숨었습니다. 8절을 보면 ‘그날 바람이 불 때’라고 말합니다. 이 ‘바람’은 그저 공기의 흐름인 바람으로 해석할 수 없습니다. 그런 뜻이라면 아담과 여자가 벌거벗고 있고, 죄를 범해서 두려워하고 있는데, 바람까지 불어서 더 춥고 두려웠다는 의미일 수밖에 없습니다. 타락이라는 이 중대하고 절망적인 순간에 에덴동산에 그저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는 것이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이 ‘바람’은 1장 2절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영’을 뜻하는 ‘루아흐’라는 히브리어 단어가 동일하게 사용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 즉 창조 때 수면 위를 운행하신 성령, 또 사람을 살아 있는 영이 되도록 생명을 부여하신 그 ‘숨’이신 성령이 여기서도 등장하신 것입니다. 창조의 영이신 성령은 증인이자 심판자로서 그날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아담과 여자는 하나님의 얼굴, 하나님의 눈을 피해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여자가 어디 있는지 모르실 리가 없었지만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부르셨습니다. 또 아담이 자신의 벗었음을 어떻게 알게 되었고, 왜 두려워하는지도 하나님은 아셨지만 ‘누가 너의 벗었음을 알게 했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자신의 상태에 대해 하나님께 정직하게 말할 기회를 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악과로 일어난 사건에 대해 먼저 남자에게 책임을 물으셨습니다. 사탄은 뱀을 이용해서 먼저 여자에게 접근한 다음 아담을 넘어뜨렸지만 하나님은 남자에게 가장 먼저 책임을 물으셨습니다. 그런 순서로 물으신 것은 남자가 다스리고 책임져야 하는 질서를 뱀이 교활하게 뒤집어서 죄짓게 한 것을 하나님이 바르게 세우신 것입니다.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라고 하나님이 물으시자 아담은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가 줘서 먹었습니다’라고 대답하여 여자를 비난했고, 나아가 여자를 주신 하나님께도 책임을 떠넘겼습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이 여자에게 책임을 물으시자 여자는 뱀이 속이고 부추겨서 먹었다고 뱀에게 책임을 떠넘겼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책임을 물을 때는 남자, 여자, 뱀의 순서로 말씀하셨지만 죄로 인한 저주를 말씀하실 때는 거꾸로 뱀, 여자, 남자의 순서로 하셨습니다. 뱀은 배로 기어 다니면서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어야 했는데, 그것은 뱀이 영리하고 교묘한 일을 했지만 결국 비참한 삶을 살게 된다는 뜻입니다. 다음으로 여자는 임신하고 아이를 낳는 과정에서 고통을 얻게 되고 남자를 다스리려 하지만 오히려 다스림을 받을 것이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여자가 아이를 출산하는 것 자체는 죄 때문에 생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에 아이를 낳아 하나님의 형상이 땅에 많아지게 하는 것이 본래 주어진 거룩한 사명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자는 죄 때문에 아이를 낳는 과정에서 고통을 겪게 되었습니다. 또 여자가 남자의 다스림을 받는 것은 하나님이 원래 의도하신 질서였습니다. 하나님은 여자가 남자의 다스림 아래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사랑과 만족과 안전함을 누릴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여자는 자신의 죄성으로 인해서든, 바른 다스림을 상실한 남자의 무능함에 의해서든 남자의 권위를 우습게 여기고 자신이 머리가 되려고 하겠지만 오히려 다스림을 받을 것이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다음으로 아담에게 저주하셨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여자의 말을 들었기 때문에 평생 고생해야만 먹고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담이 일하는 것 자체는 선한 것이었습니다.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다스리고, 돌보고, 일하면서 하나님을 닮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로 인해 사람이 정직하게 땀 흘리고 수고한 대가가 제대로 나오지 않는 일이 일어납니다. 자신의 다스림을 받아야 하는 땅이 아담에게 좋은 열매를 내주지 않고 가시와 엉겅퀴를 내줄 것이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은 죽어서 흙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죽어서 흙으로 돌아간다’는 표현이 우리에게 자연스러운 것처럼 여겨질 수 있지만 본래 사람에게 죽음은 당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에덴의 환경에는 동식물들의 죽음이 있었고, 그 죽음을 통해 상위의 존재를 섬기는 원리가 있었지만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자로서 죽음 없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헌신하고 봉사할 수 있는 존재였습니다. 사람의 죽음은 처음에는 의도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죄로 인해 사람이 썩어서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다른 피조물들처럼 되어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영광을 발산하기 위해 지어진 자가 수모를 당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다스림의 질서를 어겼기 때문에 땅이 아담에게 순종하지 않고, 아담은 죽는 다른 생명체들과 유사해지는 비참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뱀이 땅을 배로 기어 다니게 된 것, 여자가 임신과 출산 과정에서 고통을 겪고 남자를 지배하려 하지만 도리어 지배를 당하게 되는 것, 또 아담이 땀 흘리고 수고하지만 오히려 피조세계가 좋지 않은 결과를 내놓아 고생하고 결국 죽는 것은 모두 인간이 하나님이 주신 다스림의 질서를 위반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불복종이고 모욕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주인 되심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에 사람은 자신의 위치와 역할에서 영광을 얻게 되는데 이제는 부끄러움과 불만족과 허망함과 저항과 굴욕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본문은 아담의 범죄로 인해 모든 피조세계가 함께 일반 저주를 겪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아담과 여자와 뱀에게 내려진 선고는 일반적인 뱀과 남자와 여자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일입니다. 구원받는 자나 구원받지 못하는 자나 관계없이 겪습니다. 그래서 보편적으로 여자들은 출산의 고통을 겪어야 하고, 남자는 수고하며 일해야 합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태어나면 죽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은 그 자체로는 저주가 아닙니다. 타락 전 하나님이 사람에게 의도하신 일들을 계속 유지하면서 고통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죄인이 되었어도 여전히 아이를 낳고, 죄인이 되었어도 여전히 일하는 것입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의 형상이 일그러졌고 고통을 겪지만 여전히 하나님이 시키신 일을 하면서 복을 얻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타락 후 아담의 죽음을 하나님이 말씀하셨지만 이 죽음이라는 일반 저주에는 은혜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로마서 6장에서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말하듯 사람의 죽음은 분명 죄의 결과,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비참한 결과입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이 자기 인생 속에 앞두고 있는 죽음 역시 일반 저주와 일반 은혜가 함께 섞여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자들은 아담 이후로 일어나는 인간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을 더욱 가까이하고, 어떤 이들은 하나님을 더욱 원망하다가 진짜 영원한 죽음으로 떨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범죄 한 사람에게 저주하신 본문에서도 은혜를 발견하고, 그 저주가 진짜 저주를 미루면서 베풀어진 은혜임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범죄 한 이후 에덴에 바람으로 표현된 성령이 나타나신 것, 숨은 아담과 여자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말씀하신 것은 최후 심판의 날에 대한 예고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짓기 전 관계가 좋았던 아담에게만 찾아오시는 분이 아니라 죄를 지은 이후에도 찾아오신 하나님이십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다 아시는 하나님은 자신을 무시하고, 반역한 인간을 일방적으로 영원한 벌에 던져 넣으실 수 있으셨지만 하나님은 그런 죄인을 찾으시고, 자신과 마주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죄로 인해 앞으로 겪게 될 고통을 예고하셨지만 진짜 형벌은 미루셨습니다. 범죄 한 피조물들을 향해 에덴에 찾아오신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신 하나님은 마지막 때에도 다시 찾아오실 것입니다. 아담과 여자가 자신을 결코 숨길 수 없었던 것처럼 그날에는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숨길 수 없습니다. 아담이 범죄 했어도 베풀어진 은혜, 지금 우리가 저주 가운데서도 경험하는 이 은혜를 최종 심판 때에는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렇게 늦춰지고 연기된 심판으로 주어진 시간이 바로 현재의 역사입니다. 이 일반 저주와 일반 은혜가 함께 베풀어진 가운데 믿지 않는 자들은 자기 죄를 부인하고 고통과 참혹함을 주시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부인하면서도 하나님이 주신 은혜는 이기적으로 취하고 있습니다. 아담 이후의 족보가 그것을 보여줍니다. 어떤 후손들은 죄를 지었는데 은혜를 누리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고, 어떤 후손들은 하나님 편에 서서 자신의 고난과 죽음으로 하나님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아담의 죄에 대한 저주 중에서도 그를 찾으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베푸시는 선하신 분이십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우리의 죄책과 지은 죄에 비하면 약한 고난들과 과분한 복들을 주시면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진짜 심판 전 하나님께로 뉘우치고 돌아오기를 바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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