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창세기 강해 (15) 창세기 6:9-7:5

따뜻한 진리 2022. 8. 14. 20:10

창세기 6:9-7:5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아담 이후로 인간들은 점점 하나님에게서 멀어졌습니다. 하나님을 의존하고, 즐거워하고, 높이고, 예배하는 것이 인간의 마땅한 본분이지만 가인의 후손들은 하나님 없이도 잘 살 수 있다고 자랑하는 것을 넘어 자신들을 신이라고 여겼습니다. 선을 넘은 인간의 악함에 경건한 셋의 후손들마저 영향을 받았고, 결국 노아 한 사람만 하나님을 높이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노아마저 어찌 된다면 더 이상 땅에는 하나님을 기억하고 예배할 사람들이 남지 않고 전멸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상황을 허락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반대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전멸시키려 했지만 반대로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인 노아를 제외한 모든 인간들을 멸망시키기로 하셨습니다. 그것이 홍수 심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물 심판에서 노아의 가족을 살리기 위해 방주를 준비하게 하셨습니다. 방주는 지금 우리가 보는 배 모양이기보다는 거의 상자 형태, 욕조 형태를 이루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배는 물에서 앞으로 가는 것이 목적이지만 방주는 안전하게 떠 있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이 방주는 나무로 만들어졌고, 길이는 약 150m로 축구장의 1.5배 정도의 길이이고, 폭은 25m, 높이는 15m였습니다. 그리고 꼭대기에서 50cm 아래에 창문이 있고, 그 옆에 문이 만들어졌고, 내부는 3층으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이러한 구조는 노아가 설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지시하신, 가르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그의 가족 그리고 동물들을 방주에 태우기로 계획하셨습니다. 방주에 타지 못한 모든 땅의 생명들은 물에 잠겨 죽게 됩니다. 본래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호흡을 불어 넣어주셔서 살아있는 자가 되게 하셨고, 숨을 쉬며 살게 하셨습니다. 인간은 중단할 수 없는 지속적인 호흡, 숨 쉼을 통해 하나님이 자신에게 생명을 불어 넣어 주셨음을 기억해야 했고, 육신이 그런 숨을 통해 살아가듯 영혼도 하나님과 소통, 호흡하며 살아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6장 3절이 말하는 대로 하나님은 사람에게서 자신의 영 즉 성령을 거두셔서 악한 인간들의 영적 호흡을 끊으셨고, 이제는 홍수를 통해 육신적인 호흡도 모두 끊으신 것입니다.

 

    이 홍수 사건은 하나님이 이 세상의 창조주이실 뿐 아니라 이 세상의 재판장이심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거역하는 죄인들에 대해서 인내하시는 분이시고, 은혜로우신 분이시나 영원토록 내버려 두시지는 않습니다. 결국 심판하는 분이십니다. 그 심판 때를 위해 하나님은 어떤 자들을 선택하셔서 은혜를 베푸시고 자기에게로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은 그 구원하신 자를 중심으로 하는 소수만을 남겨두고 모든 것을 진멸한 후 새롭게 시작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노아와 그의 가족만 남겨두시려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노아 홍수 사건을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우리가 살피는 창세기와 함께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이렇게 모세 오경은 출애굽 한 이스라엘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홍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신들이 경험한 홍해 사건과 비슷하다는 것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홍해를 건널 때 하나님께서 애굽 군대는 물에 빠져 죽이시고 자신들은 살려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노아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이 자신들도 살리시고, 지키시고 인도하시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노아 홍수 사건이나 홍해 사건이 그러했듯 앞으로 임할 최종 심판은 악인들의 멸망의 순간이 되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고통 중에 건짐을 받는 순간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두려운 심판 속에서 본문은 심판 받은 부패한 악인들과 구원받은 노아를 대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가인 족보의 흉악함에서 시작해서 자칭 하나님의 아들들의 교만에 대해 고발했고, 12절에서는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부패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노아에 대해서는 9절에서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라고 말합니다. 또 22절을 보면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대로 다 준행하였더라”라고 말하고, 또 7장 1절을 보면 하나님이 노아를 의롭다고 말씀하신 것을 기록하고 있고, 5절에서도 노아가 하나님이 명하신대로 다 준행했다고 또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노아에 대해 탁월하게 여기신 것, 노아의 공로를 인정해주신 것은 과장이 아니라 사실이었습니다. 본문이 행위에 따른 심판과 구원을 분명하게 반복해서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노아가 자기 공로로 구원을 받았는가?’하고 질문하게 됩니다. 물론 노아는 자기 노력으로, 자기 공로로 구원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노아가 자기 시대 다른 인간들보다 상대적으로 경건하고 하나님을 경외했지만 그것으로 구원받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홍수 심이 종말의 최종심판을 예고하는 모형이었다는 것을 노아에게도 적용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노아를 단순히 홍수 사건에서 살아남을 의인으로만 여기신 것이 아니라 최종 종말 심판 때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모형으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노아 한 사람의 온전함과 공로로 그의 가족들이 구원 얻은 것처럼 예수님 한 분의 완전한 순종과 공로로 우리도 구원을 얻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를 그런 예표로 사용하시기 위해 선택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노아가 홍수 심판을 준비하고 살아남기까지 흠 없이 의롭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할 수 있도록 도우셨습니다. 6장 8절이 말하는 대로 노아는 하나님께 특별한 은혜를 입었습니다. 하나님께 은혜를 입어서 완전하고 의로운 노아보다 더 나은 예수님은 자신의 공로로, 완전한 의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노아와 함께 그 가족들이 방주에 들어간 것처럼 예수님은 우리를 자녀, 가족 삼아주셔서 구원의 방주로 인도하십니다.

 

    이렇게 노아 시대의 홍수 사건은 이 세상에 끝이 있음,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노아가 예표한 예수님께서도 마지막 때가 있음을 예고하셨습니다. 자신이 다시 오실 때에 대해 준비하게 하셨습니다. 이 세상은 노아의 홍수에 대해 무관심하듯 세상의 마지막 심판에 대해서도 무관심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는 심판을 생각해야 합니다. 단지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노아처럼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고, 의롭고, 하나님이 주신 소명대로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기 위해 심판의 때를 생각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노아가 불의한 현실 속에서 하나님과 긴밀한 관계를 가졌던 것처럼 우리도 불의한 현실 속에서 낙심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하나님과 긴밀한 관계를 갖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