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7:6-8:19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지시하신 대로 방주가 완성되었습니다. 방주 안에 노아와 아내 그리고 세 아들과 그 아내들까지 모두 8명이 들어갔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방주 안으로 동물들을 태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수많은 동물들을 노아가 다 모아서 방주에 들어가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동물들을 노아 앞으로 불러모으셨습니다. 정결한 동물은 암수 일곱 쌍씩, 부정한 동물들은 두 쌍씩 오게 하셨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아담이 이름을 어떻게 짓나 보시려고 그의 앞으로 동물들을 모으신 것처럼 방주에 들어갈 동물들을 노아 앞으로 하나님이 모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방주에 부정한 동물들보다 정결한 동물들을 더 많이 태우신 이유는 방주에 있는 사람들의 음식으로 그것들을 사용하고, 제사에도 사용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정결한 동물과 부정한 동물들의 숫자 차이와 별도로 하나님이 그 두 부류를 함께 태우신 이유도 있습니다. 홍수 심판으로 인해 방주 바깥에 있는 사람들과 방주 안에 있는 사람들이 구별되었지만, 그 심판이 완전한 심판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정결한 동물들과 부정한 동물들이 방주에 함께 있었던 것처럼 홍수 이후 다시 시작되는 새로운 세상 역시 완벽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들로만 시작되는 세상이 아니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래서 방주 안에는 정결한 동물과 부정한 동물이 함께 있었습니다.
방주 문이 닫히자 땅 속에서는 깊은 샘들이 터져서 물이 솟구쳐 나왔고, 하늘에서는 물이 쏟아져 내렸습니다. 그렇게 40일 밤낮으로 땅에 물이 차올랐습니다. 창조 때에 하나님이 세상의 물들에게 모이라고 명령하셔서 물들이 물러간 자리에 땅들이 드러났는데, 그렇게 나뉘고 묶여있던 물들이 이제는 심판을 위해 다시 모여 땅의 멸망을 일으켰습니다. 땅을 드러나게 했던 물은 이제 다시 땅을 덮어 보이지 않게 했습니다. 그래서 땅과 땅 위에 있던 것들은 보이지 않고 오직 방주만 물 위에 드러났습니다. 방주 안에 있던 노아와 가족들은 첫 40일 동안 물이 위아래에서 쏟아지는 엄청난 소리와 사람들의 비명소리를 들으며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그 후 잠잠해진 상태에서 하루하루를 기다렸을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끝까지 지키실 것인가? 이 방주에서 무사히 나갈 수 있을 것인가 의문을 품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6장 18-19절의 내용대로 하나님이 노아의 가족과 동물들을 방주에 들여보내신 것은 그들을 심판 가운데 보존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8장 1절을 보면 하나님은 자신이 하신 그 약속을 기억하셨습니다. 그리고 바람을 땅 위에 불게 하셔서 물이 물러가 줄어들게 하셨습니다. 이 바람은 창조 때 수면 위를 운행하시던 성령을 생각나게 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널 때 밤새 불었던 동풍을 생각나게 합니다. 8장 4절에 방주가 아라랏산에 닿아서 머물렀다가 거기서 노아의 가족들이 나왔다는 것은 높은 산의 성전이었던 에덴에서 아담과 하와의 가정이 시작된 것을 생각나게 합니다. 그렇게 노아 가족과 동물들이 방주 안에서 약 1년 정도를 머물다가 나왔습니다.
이렇게 성경은 노아 시대의 홍수를 창조와 에덴의 이미지 속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홍수 사건은 하나님께서 창조를 뒤집어 역전시키셔서 옛 세계를 멸망시키는 심판이었고 또한 노아의 가족들과 동물들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다시 시작하신 새 창조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홍수로 인해 발생한 이 혼돈은 창조 때의 깊은 혼돈이 사실이었고, 그런 상태에서의 창조를 주관하신 분이 하나님이셨음을 확인시켜준 일입니다.
우리는 홍수 심판을 통해 노아 가족을 제외한 지상 위의 모든 사람들을 멸망시키신, 죽이신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하나님을 잔인하다고 말해야 할까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의심해야 할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분명 사랑이십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아무렇게나 다 허용해주는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기준이 있는 거룩한 사랑입니다. 노아 시대의 사람들은 매우 부패했습니다. 그들은 도덕적으로 절망적인 상태여서 아브라함 시대에 심판받은 소돔과 고모라와 유사한 상태였습니다. 사람이 선과 악의 기준이신 하나님을 떠나면 도덕적으로 타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사악한 범죄를 저지른 범인이나, 자기 국민의 최소한의 인권도 보장하지 않는 악한 지도자는 반드시 처단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마땅한 심판을 행하신 것입니다. 홍수 심판은 노아의 온전함과 심판당한 당시 사람들을 비교하면서 그것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심판은 악인들에게 마땅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선한 자들을 보호하고 지속시키기 위해서 반드시 있어야 할 일입니다. 하나님은 심판을 통해 악인들을 끝내시고 자기 백성들을 살리십니다. 보호하십니다. 홍수 심판이 그러했든 마지막 심판 또한 그럴 것입니다. 아마도 그 최종 심판 때가 가까워지면 진정한 성도들이 참 신앙을 지키면서 살아가기 어려운 때가 될 것입니다. 성도들은 주님이 속히 오셔서 악인들을 심판해주시길 바라게 될 것입니다.
본문을 통해 생각해 볼 또 다른 한 가지는 하나님의 침묵입니다. 하나님께서 홍수를 준비하는 기간 동안은 노아에게 나타나셔서 친밀하게 말씀하셨고, 홍수 심판 중에도 보호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홍수 기간이 얼마나 되는지는 말씀해주시지 않았습니다. 또 노아와 가족을 방주로 들여보내시고 문을 닫으신 후부터 방주에서 나오게 하실 때까지는 아무 말씀을 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노아와 그 가족들은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지만 밀폐된, 갇혀 있는 공간에서 마냥 기다리며 불안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노아는 어느 정도 물이 빠진 후 까마귀와 비둘기를 날려 보내어 상황을 살피려 한 것입니다. 8절은 그런 방주 속 노아 가족들을 생각하면서 그런 중에도 하나님께서 방주 속 노아의 가족들을 기억하셨다고, 잊지 않으셨다고 말합니다.
그런 일이 역사와 우리의 인생 속에도 일어납니다. 분명 하나님이 약속하셨는데 잊으신 것 같은, 하나님의 침묵으로 인한 불안한 기다림이 있을 수 있습니다. 노아는 그런 불안함 끝에 방주에서 나오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결국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들을 잊지 않으신 것을 확인했습니다. 우리도 인생 중에 그런 경험을 많이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잊지 않고 계시는구나 하는 경험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죽는 순간까지 별 말씀을 하지 않으시는 것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나를 잊으신 것 같은 경험을 하면서 살다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성도들이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가운데 죽임당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도 그런 하나님의 침묵 가운데 죽으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결국 죽는다고 하나님이 자신의 약속을 안 지키시는, 못 지키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상 가운데 지키시고, 영원히 보호하신다는 이 약속을 죽음이 방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자신의 약속을 잊지 않으십니다. 우리를 잊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살아 있는 동안도 확인하지만, 또한 죽어서도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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