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창세기 강해 (18) 창세기 9:6-7

따뜻한 진리 2022. 9. 4. 21:28

창세기 9:6-7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우리는 지난 시간 홍수의 시작과 마침, 그리고 방주 밖으로 나온 노아에게 하나님이 일반 은혜 언약을 맺으시고 무지개를 보여주신 것에 대해 살폈습니다. 이 시간에는 이 일반 은혜 언약이 구원받은 신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겠습니다.

 

    하나님은 노아와 일반 은혜 언약만 맺으신 것은 아닙니다. 홍수가 일어나기 전인 6장 18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홍수 심판을 예고하시면서 방주를 지으라고 명령하실 때 노아와 그 가족들과 언약을 세우셨는데, 이 약속은 구원 은혜 언약의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방주가 최종 심판 가운데 구원받은 자들이 속하게 될 하나님 나라를 상징했기 때문입니다. 구원 은혜 언약을 누리려면 하나님 앞에서의 죄인 됨을 인정하고 하나님이 보내신 구속자를 믿어야 합니다. 또 일반 은혜를 누리려면 도덕적이고 성실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불신자들은 구원 은혜 언약에 저항할 뿐 아니라 일반 은혜 언약 마저 이기적으로 사용하거나 자기 죄로 인해 일반 은혜도 누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두 가지 언약 모두 자신을 위한 것으로 믿고 누릴 뿐 아니라 이 언약이 다른 사람들에게 복이 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도록 섬겨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는 가정과 교회와 국가라는 공동체 안에서 이 언약의 복들을 경험하게 되는데 일반 은혜는 주로 가정과 국가에 대해 말합니다. 물론 가정과 국가에도 구원 은혜의 요소가 있고, 반대로 교회에도 일반 은혜의 요소가 있지만 주로 신자나 불신자나 구별 없이 함께 소속되는 공동체가 가정과 국가이기 때문에 일반 은혜의 측면에서 다루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정을 이 세상의 기본적인 제도로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첫 아담과 하와에게 가정을 이루라고 요구하셨을 뿐 아니라 방주에서 나온 노아에게도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라’는 말씀을 1절과 7절에서 두 번 반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홍수 심판 후에도 여전히 가정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가정은 아버지이신 하나님과 자녀인 우리, 남편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신부인 교회의 관계를 설명하는데 중요하게 사용되는 이 땅의 유비입니다. 또 가정은 하나님이 구원받을 자들을 세상에 보내시는 통로가 됩니다. 하나님은 가족을 통해 구원하시고, 믿는 부모 안에 자신이 선택하신 자들을 자녀로 보내어 예수 믿게도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십계명 가운데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를 규정하는 조항과 부부의 관계를 규정하는 조항을 두신 것입니다. 내 부모를 공경하라, 간음하지 말라가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받지 못할 자들도 가정을 통해 태어나게 하시고, 가정을 통해 상당한 복과 사랑을 누리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일반 은총의 대부분이 건전하고, 건강한 가정을 통해 채워집니다.

 

    성도의 가정을 통해 일반 은혜만 누릴뿐 아니라 구원의 은혜도 누리므로 자신의 가정을 거룩하게, 건강하게, 복되게 돌보고 지켜야 합니다. 세상이 점점 자신의 자유와 욕심과 쾌락을 위해 결혼 관계를 회피하고 가정을 무너뜨리고 있지만 성도는 가정을 잘 지켜야 합니다. 성도는 결혼과 자녀 양육의 문제에 있어서 세상 사람들처럼 이기적인 판단을 해서는 안 됩니다. 경제적으로나 자연 환경적으로나 불안과 고통이 많아지는 세상이어도 우리는 할 수만 있다면 혼인하여 자녀를 낳아 양육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요구하셨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을 자들을 낳아서 기르고 섬기는 것이 성도의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신약이 말하듯 그것은 강제가 아닙니다. 믿음 안에서 기쁨으로 감당해야 할 일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자신의 가정을 지킬 뿐 아니라 종말 때까지 이 세상 속에 하나님이 원래 의도하신 가정들의 모양이 잘 유지되도록 도와야 합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세상의 법이 모든 사람에게 죄에 대해 경각심을 갖도록, 죄의 대가를 치르게 하는 처벌의 수준을 갖도록 지켜야 합니다. 어려운 말로 응보적 정의입니다. 6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의 생명을 해치면 안 되고, 그런 일이 발생하면 동일하게 그 사람도 벌을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홍수 심판 이후에도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그냥 두면 사악함이 점점 심해져서 세상은 빨리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죄인들을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실 때까지 또 선택받은 자들이 태어나서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기까지 세상의 죄는 통제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누구나 죄인이어도 보편적인 복을 누릴 수 있고, 잘못 하면 법의 테두리 안에서 처벌도 받게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원리를 잘 모르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실수를 하기 쉽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신 내용들을 현실 속 정부에 적용하려고 합니다. 한쪽 뺨을 맞으면 다른 쪽도 돌려대고,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국가의 법에 적용하려는 것입니다. 모든 죄인을 다 용서해줘야 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 나라를 묘사하신 것이고, 거듭난 성도에게 요구하신 것입니다. 산상수훈은 하나님 나라의 윤리이고, 신자들의 자발적인 사랑과 희생과 헌신에 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대해 평화운동, 인권운동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에게 사랑과 자비를 무조건 베풀면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노아 홍수 심판이 왜 있었는지를 생각하지 않는 것이고, 사람이 어려서부터 악하다는 하나님의 말씀도 비웃는 것입니다. 이 세상 정부나 법질서는 노아 언약에 따라 최종 심판 때까지 죄를 엄중하게 처벌해야 합니다.

 

    인간은 도덕적으로 자율적이고, 선한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십계명을 벗어난 다른 기준들을 만들어서는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종말 때까지 모든 생명들을 보존하시겠다는 일반 은총과 함께 죄에 대한 통제를 살인에 관한 법, 피흘림에 관한 처벌 규정으로 노아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도덕법. 십계명, 그리고 그것을 기초로 만들어진 법들은 인간의 죄를 드러내고 고발하는 기능도 있지만 타락한 현실 속에서 인간이 그나마 복을 누릴 수 있도록 돕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그것들을 지킨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지만 악한 인간들이 자기 욕심을 통제하고, 서로를 해치지 않고, 질서를 지키게 하면서 하나님이 주신 복을 가능한 보편적으로 골고루 누릴 수 있도록 돕는 장치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세상의 법과 정부에 대해 이런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성도는 세상 정부가 인간의 죄성을 바르게 다스리고 통제하도록 감시하고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정부가 지나친 권력을 가지고 국민들을 억압하는 것도 악한 것이지만, 지나치게 자유와 쾌락을 허용하고 처벌의 수준을 너무 낮추어서 사람들이 법을 두려워하지 않고 방탕한 사회가 되지 않도록 막아야 합니다. 죄에 대한 기준이 낮아져서 양심이 부패하게 되는 것은 결국 그 사회를 망하게 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선택하신 백성들만 복을 주실 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인간들에게도 복을 주시고, 그 복을 누리도록 죄를 통제하십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는 하나님 나라만 생각하면서 염세적으로, 세상을 냉소하면서 살면 안 되고, 일반 은혜로 운영되는 세상 나라의 시민으로서도 충실해야 합니다. 그래서 결혼한 후에 예수님을 믿게 된 성도는 예수님 믿지 않는 배우자와 가정을 잘 섬겨야 하는 것이고, 극심한 종교적 탄압을 하지 않는다면 자기 나라를 버리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예수 믿은 후에도 주변 환경을 그대로 인정하고, 그 속에서 신자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성도는 자기 나라의 법의 한계와 약점을 알아도 잘 지켜야 합니다. 법의 취약점과 사법제도의 허술함을 알아도 나에게 이기적으로 이용해서는 안 됩니다. 성도와 교회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예배와 신앙생활을 위한 종교의 자유를 정부에 요구하고 확보해야 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힘이 있을 때 예수 믿지 않는 자들의 권리와 자유도 보장해주어야 합니다. 기독교 외의 다른 종교들이라고 해서 무조건 탄압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종말 때 까지는 모든 사람을 보호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구원받은 자로서 하나님 나라를 준비하되 이 세상 사람들의 유한한 삶에 동참하고 섬겨야 합니다. 때로 세상 사람들이 무시하는 법과 질서도 성실하게 지키는 모습을 보여줘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구원받을 자만 치료하신 것이 아니라 그렇지 않은 자들도 치료하신 것처럼, 원하는 자는 누구에게나 은혜를 베푸시고, 배고픈 무리 모두에게 떡과 생선을 주신 것처럼, 하나님 나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로마에 세금도 내신 것처럼 우리도 그러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것에서 자유롭지만 하나님을 위해 복음을 위해 종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복음, 구원의 은혜를 전달하는 종이 될 뿐 아니라 이 땅에서 잠시 누리다 사라질 일반 은혜 아래 있는 생명들을 위해서도 섬기는 종이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