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창세기 강해 (20) 창세기 11:1-9

따뜻한 진리 2022. 9. 18. 16:57

창세기 11:1-9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방주 밖으로 나온 노아의 가족은 시간이 흐르면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나라를 이루게 됩니다. 10장에 등장하는 세 아들들의 각 족보 마지막 부분을 보면 각 언어와 종족과 나라로 나뉘었다는 말이 반복됩니다(5, 20, 31절). 그러므로 본문 11장에 등장하는 바벨탑 이야기는 시간상 앞 10장의 이야기들 다음에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10장의 이야기가 진행되는 중에 일어난 족속과 언어와 나라가 나뉜 일이 어떻게 된 일인지를 설명해주는 것입니다.

 

    바벨탑은 고대 바빌론 제국 때의 건축물로 계단식 피라미드 모양의 신전 또는 제단 역할을 한 지구라트로 흔히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지구라트는 바빌론 이전 시대에도 존재했고, 여러 곳에 만들어졌습니다. 우리가 산에 가면 돌을 쌓아놓은 것을 흔히 볼 수 있듯이 인간은 높은 구조물을 쌓는 것에 신성함과 공로를 부여합니다. 본문은 인간들이 이렇게 무엇인가를 높이 쌓는 행위가 어떤 의미인가를 밝히면서 하나님이 어떻게 개입하셨는가를 말합니다.

 

    1절을 보면 본래 온 세상 사람들의 언어가 하나였다고 말합니다. 사용하는 말이 하나였을 때 사람들은 서로의 생각과 지식을 쉽게 나누고, 하고자 하는 일을 위해 힘을 모으는 것도 어렵지 않았을 것입니다. 게다가 점점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이전에 할 수 없었던 일들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모양이 제각각인 돌들을 힘겹게 운반하고 다듬어서 건축을 했는데 이제는 원하는 모양과 크기로 벽돌을 만들어서 더 효율적으로 건물을 만들고 도시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발전한 기술과 일치된 인간들이 도시와 국가를 이루면서 한 말은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드러내고 온 지면에서 흩어짐을 면하자’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죄인인 인간들에게 벌과 저주만 주시지도 않고, 쉽게 용서해주시면서 은혜만 베풀어주시지도 않으셨습니다. 최종 심판과 구원의 때까지 은혜와 죄로 인한 고통을 모두 베푸셨습니다. 그래서 아담에게 주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명령을 노아에게도 주셨고, 살인한 가인에게 많은 은혜를 베푸셨지만 통제된 고통을 겪으면서 자기 죄의 무거움을 생각하고 하나님께 의존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의 죄로 인해 임시적 조치를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바벨을 이루려 했던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일반 은혜를 누리고 있으면서도 죄인으로서 겪어야 하는 여러 불안과 고통은 없애겠다고 결심한 것입니다. 흩어지거나 떠돌아다니지 않고 모여서 하나님께 대항하고, 하나님께 의존하는 일을 그만두고 자신들의 지혜와 능력을 가지고 살아가겠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그래서 높은 바벨탑은 높은 하나님의 산을 인간이 이루겠다고 시도한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 나라를 높은 산으로 표현한다는 것을 여러 차례 살펴봤습니다. 에덴이 있던 산, 방주가 머문 아라랏산, 모세가 하나님을 만난 시내산 등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의 순종을 통해 에덴이 하나님 나라와 연결되는 통로로 만드시려 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인간에게 하나님 나라를 허락해주시려 했지만 죄로 인해 좌절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벨을 쌓으려던 사람들은 자신들이 직접 하늘에 닿겠다고, 신적인 나라를 이루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죄인의 현실을 슬퍼하면서 겸손히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하나님의 구원 방법에 의존하면서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는 하나님 나라를 고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 힘으로 인공적인 높은 산 에덴을 만들어 하늘에 닿게 하고 자기들의 이름을 내겠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사탄이 거짓 하나님 행세를 한 것처럼 그를 닮은 죄인들이 하나님 나라의 모조품을 만들려 한 것입니다.

 

    본문은 하나님이 그들의 그런 말을 들으시고 그들의 도시와 탑을 보시려고 내려오셨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인간들이 스스로 하늘에 닿겠다고, 신적인 나라를 이루겠다고 말했지만 하늘에 닿기는커녕 하나님이 내려오셔야 할 만큼 여전히 땅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들이었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의 언어를 나누어서 혼잡하게 만드셨습니다. 서로의 말과 뜻이 통하지 못하게 하셔서 어리석은 계획이 중단되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사람의 일을 막아 좌절시키고, 시련을 주시는 하나님의 개입은 선악과를 먹은 남자와 여자에게 그랬듯이, 동생을 죽인 가인에게 그랬듯이 저주인 동시에 은혜였습니다. 인간이 더 교만해지고, 하나님과 더 멀어지는 것을 막기 위한 일이었습니다.

 

    인간이 성을 쌓고 도시를 이루는 것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나라를 이루는 것 자체를 하나님이 거부하시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자기 형상을 닮은 자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선물로 주려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아브라함을 통해 이루셨고, 그 선택된 특별한 나라 이스라엘을 주변 나라에 보이심으로 하나님 나라의 거룩함, 구별됨이 어떤 것인지를 알리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죄인들이 이룰 수 없고, 죄인들이 들어갈 수 없음을 보이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죄를 깨끗이 씻으시고, 자신의 영으로 새롭게 하신 자들만이 속할 수 있는 그런 나라입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는 자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바벨탑을 쌓으려 했던 자들은 그런 하나님의 계획을 무시하고 자기들이 하나님 나라를 이루려 했습니다. 초점이 사람에게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그 나라의 중심으로, 초점으로 두시려 합니다. 인간들은 자기 죄로 인한 현실의 불안과 고통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런 일반 은혜와 일반 저주 속에 살게 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약속된 아들을 기다리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바벨탑 이야기 앞뒤에 있는 노아 아들들의 족보는 인간들이 추구하는 강한 세력과 큰 나라가 아닌 가족의 연결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들에게 구원을 허락하시는 일에도 자신이 원래 지시하신 방법인 생육하고 번성하는, 가족을 통해 은혜를 베푸는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이 무너뜨리려고 하는 가족관계, 집단적 세력에 비하면 공격받기 쉬운 연약한 가족의 연결을 통해 하나님은 약속된 구속자를 보내십니다. 족보가 그것을 말합니다.

 

    바벨탑이 가진 의미는 현대 도시 속에서 그대로 재현됩니다. 본래 사람은 하나님의 손길이 드러나는 자연의 장엄함 앞에 노출될 때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생각하게 되고, 뜨거운 햇살과 추운 겨울과 천둥 번개와 폭풍 앞에 약함을 알고 겸손해지고, 생명을 직접 키우고 필요에 따라 취하는 과정에서 깊은 감사를 하게 됩니다. 그렇게 자연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찾고 의지할 기회를 자주 얻게 됩니다. 그러나 인간은 도시를 이루어 여러 위협을 손쉽게 막아내고, 인간이 한 일들을 놀라워하고 자랑하는 일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묵상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이룩한 업적과 작품과 기술들을 묵상하고, 경배하고, 인간 도시에 헌신하는 환경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성도는 도시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도시 안에서 하나님이 주신 일반 은총을 많이 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도시가 우리에게 주는 착각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도시는 결국 사라집니다. 도시는 거대한 무덤과 같습니다. 참 나라, 참된 도시는 인간이 세운 도시가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시는 나라입니다. 그 나라는 말 그대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인 나라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높임을 받으시고, 찬양받으시는 곳입니다. 인간들의 도시는 많은 사람들을 모이게 하지만 깊은 고독과 소외를 만들고, 거기에서 적응하기 위해 인간성을 상실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 그 도성은 거기 속한 백성들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가장 가치를 발하고, 하나님 안에서 풍성한 교제와 기쁨을 누리는 나라입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가 우리를 영원히 안전하게 보호하는 성이고, 주님 안에서 참된 생명과 기쁨을 누리게 하는 곳임을 믿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장에서 예수님은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간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