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1:27-12:9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하나님께서 노아 시대에 온 세상을 홍수로 심판하신 후 인류가 여전히 죄인임에도 종말 때까지는 더 이상 온 세상을 물로 심판하지 않고, 또 누구나 보편적인 복을 누리도록 일반 은혜를 노아를 통해 약속하셨습니다. 이 일반 은혜는 죄인인 인간들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사랑하는가에 상관없이 복을 누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하나님이 주신 일반적인 복을 통해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 앞에서 주의하기는커녕 죄를 깨닫고 하나님을 찾게 하려는 의도로 남겨진 불안과 고통을 없애려고 시도합니다. 하나님 없이도 우리들끼리 힘을 합쳐 완벽한 세상을 이룰 수 있다는 환상을 가지고 도전을 합니다. 그것이 바벨탑으로 나타났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이 세상의 방향입니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일반 은혜, 우리가 먹고 마시고 누리는 좋은 것들은 이 현실 속에서 매우 실제적이고, 풍성하지만 그것은 죄인들에게 착각을 가져옵니다. 일반 은혜 자체는 우리에게 진정한 복, 구원, 하나님 나라를 가져오지 못합니다. 그것이 노아 언약의 한계입니다. 어떻게 죄인이 죄를 해결 받고 구원받아 하나님 나라 백성 되는가는 일반 은혜에 나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일반 은혜도 소중하고 감사한 것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구원에 관한 특별 은혜입니다. 가죽옷과 여자의 후손으로 약속된 이 특별 은혜는 바로 아브람을 통해 서막이 열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혼돈 가운데 있는 우주를 말씀으로 움직이신 것처럼 하나님은 아브람을 말씀으로 움직이셨습니다. 12장 1절을 보면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고향 친척과 아버지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앞의 11장 31절을 보면 아브람은 아버지 데라를 포함한 가족들과 함께 가나안으로 가려는 시도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중간에 하란에 머물러 있는 중에 아버지 데라가 죽었습니다. 하란에 계속 머무를 뻔했는데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계속해서 가나안으로 가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으로 가라고 하시면서 아브람에게 주신 약속의 표현에는 특징이 있는데, 먼저 하나님께서 “내가”라는 말을 강조하셨습니다. 1절부터 보면 “내가 내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라는 표현에서 드러나듯 하나님은 자신이 주권적으로 반드시 하시겠다는 결심을 나타내셨습니다. 이는 앞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인간들이 ‘나’를 높이고, 바벨탑에서 ‘우리’를 높인 것과 대조가 됩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약속하신 내용을 보면 아브람에게 좋은 땅과 많은 후손들과 아브람의 명성과 같은 지극히 현세적인 복들을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은 구원과 하나님 나라에 관한 것인데 왜 현세적인 복을 약속하셨을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람의 수준에 맞춰서 복에 대한 약속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후손과 땅은 이중적인 의미입니다. 현세적인 의미와 영적이고 영원한 의미가 함께 담겨있습니다. 죄로부터의 구원, 하나님 나라, 구원자에 관한 내용들이 가장 중요한 복이지만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것, 아브람이 바라고 기대할 수 있는 현세적인 것들로 하나님이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은 아브람의 후손인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 1차적으로 실현되었습니다. 자녀가 없던 아브람에게서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이 나왔습니다. 또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간 후 다윗 왕 때 이스라엘은 막강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땅과 후손과 영광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약속하신 땅과 후손과 영광스럽게 되는 복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주신 약속의 성취는 가나안이라는 이 땅에서의 복,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복을 넘어 하늘의 복을 가리킵니다. 아브람에게 약속하신 가나안 땅과 후손과 아브라함의 이름이 영광을 얻게 되는 복은 완성될 하나님 나라와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으로 인해 구원받는 백성들과 믿음으로 영광을 얻게 되는 것까지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주신 약속은 땅에서 하늘까지, 물질적인 것에서 영적인 것으로 나아갑니다.
아브람은 처음부터 그런 하나님의 계획을 다 알고, 이해하고 가나안 땅으로 간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아브람은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에 따라 출발했고, 결국 가나안에 도착했습니다. 아브람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 뭔가 인격적인 끌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브람이 처음부터 하나님을 풍성히 알고, 하나님의 뜻을 잘 이해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 인격적인 신뢰를 가지고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제단을 쌓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이 시간 이후로 아브람에 대해 계속 살피겠지만 하나님은 그의 이해와 믿음이 더 자라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런 아브람의 처음 상태와 수준을 잘 아셨기에 자신이 하실 일을 위해 아브람을 다루시고, 성장시켜 나가십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가 아직 영적인 시각을 갖지 못할 때 우리의 육적인 수준, 우리가 주로 관심 갖는 것들, 땅의 수준에 맞춰 좋은 것을 주셔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결코 그런 수준에 머무르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복을 주시고, 아브람이 세상의 복이 되게도 하시지만 진정한 복의 주체, 복 자체는 하나님 자신임을 아브람이 나중에 깨닫게 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런 이해와 믿음을 갖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다루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태어나게 하시고, 은혜 베풀어 주시는 것으로 인생을 삽니다. 우리 인생의 복이 하나님이 주신 것에 달려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구원 역시, 심판 후의 운명 역시 하나님의 선택과 찾아오심, 부르심에 달려 있습니다. 본문은 아브람이 그런 은혜를 입은 것을 보여줍니다. 이미 나이가 많이 들었고, 고향에서 떠나 가나안에 가지 못한 채 하란에 표류하듯 머물러 있었고, 자신의 유산을 이어받을 자녀도 없는 아브람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약속을 믿고 떠났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한 사람 아브람을 부르셨습니다. 세상 인간들은 보기에도 막강하게 힘을 합쳐서 나라를 이루어 하나님 나라에 대항하고 스스로 구원하려 하지만 하나님은 아브람을 부르시듯 한 사람 한 사람을 부르셔서 하나님 자신에게 반응하고, 믿고, 구원 얻고, 복을 누리게 하십니다. 그것이 위태롭게 보이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일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언약 안에서 살게 하시고, 또 언약 공동체인 교회 안에서 자라게 하시지만 결국 한 사람 한 사람을 부르시고 인도하십니다. 우리는 아브람이 하나님께 반응하면서 길을 떠난 것처럼, 천로역정에서 크리스천이 홀로 구원의 길을 찾아 나선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이끌리고, 하나님이 우리의 죄와 심판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에 귀가 열리고, 땅의 사라질 복이 아닌 하나님이 주시는 영원한 복을 바라며 신자의 삶을 살아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게으름과 방종과 여유로움과 상황에 핑계하지 않고 하나님께 반응해야 합니다. 우리를 그 여정으로 부르신 분, 시작하게 하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도우십니다. 아브라함에게 그렇게 하신 분이 우리에게도 그렇게 하십니다.
'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창세기 강해 (23) 창세기 13:1-18 (0) | 2022.10.09 |
---|---|
창세기 강해 (22) 창세기 12:10-20 (0) | 2022.10.02 |
창세기 강해 (20) 창세기 11:1-9 (0) | 2022.09.18 |
창세기 강해 (19) 창세기 9:18-29 (0) | 2022.09.11 |
창세기 강해 (18) 창세기 9:6-7 (0) | 2022.09.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