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창세기 강해 (32) 창세기 20:1-18

따뜻한 진리 2022. 12. 11. 18:27

창세기 20:1-18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오늘 본문에서 아브라함은 이전 애굽에서 저질렀던 잘못을 반복합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자신의 안전을 위해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속인 일입니다. 아브라함은 아비멜렉이 다스리던 그랄이라는 지역으로 옮겨갔습니다. 그랄 사람들은 사라를 아브라함의 여동생으로 알게 되었고, 왕 아비멜렉은 신하를 보내 사라를 데려갔습니다. 우리는 90세의 할머니인 사라가 무슨 매력이 있어서 데려갔을까 의문이 들게 됩니다. 어떤 학자는 하나님께서 사라에게 아이를 주시기 위해 건강하고 젊은 상태가 되게 하셨을 거라고, 즉 회춘했을 거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아비멜렉에게도 매력적이었고, 아브라함에게도 근심을 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아브라함이 한 곳에 정착해서 나라를 이룬 왕은 아니었지만 많은 재산과 사람들을 거느리는 족장이었기 때문에 아비멜렉이 그와 연합하기 위한 정략 결혼의 차원에서 사라를 데려갔다고 말합니다.

 

    어쨌든 그날 밤 하나님께서 아비멜렉의 꿈에 나타나셔서 사라를 건드리면 죽을 것이라고, 사라는 아브라함의 아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비멜렉은 분명 사라를 아브라함의 여동생으로 알고 있고, 자기는 잘못이 없는데 하나님은 죄 없는 자를 죽이실 것이냐고 억울함을 호소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비멜렉이 잘못한 것이 없음을 아시지만 아비멜렉이 하나님께 죄를 짓지 않도록 막으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비멜렉이 사라를 건드리려 한 일이 단지 사라의 남편 아브라함에게 잘못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죄를 짓는 일이었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아비멜렉의 잘못은 아브라함과 사라를 통해 이삭을 낳게 하려는 하나님의 계획과 그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려는 계획을 망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불러 왜 자신을 속였냐고 묻자 아브라함은 아비멜렉의 나라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태도가 없어서라고, 또 그동안 가는 곳마다 그래왔다는 변명을 했습니다. 아브라함의 행동과 변명은 결코 떳떳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조카 롯이 손님들을 대접할 때 자기 체면을 위해 딸들을 넘긴 것처럼, 아브라함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아내 사라를 넘겼습니다. 아브라함의 잘못 때문에 사라는 물론이고, 아비멜렉의 집안도 위험에 빠졌고, 하나님의 계획도 위태로워졌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전에 저질렀던 잘못을 반복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또 아브라함의 잘못을 수습하시고, 전화위복의 기회로 바꾸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브라함의 이런 잘못을 따라해서는 안 됩니다. 신천지는 아브라함이 속인 것, 라합이 정탐꾼들을 숨기기 위해 거짓말한 것처럼 성경 속 인물들의 속임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방법이라고 포장해서 자신들의 전도와 확장에 거짓말과 속임수를 사용합니다. 참된 기독교 신앙은 그럴 수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악할지라도 성도는 거짓말을 하고 속여서는 안 됩니다. 본문의 아브라함처럼 사람의 거짓과 잘못을 하나님이 역전시키셔서 은혜로 바꾸시기는 일이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을 우리가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의도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거짓과 속임수, 죄를 정당화하면 안 됩니다.

 

    아비멜렉은 사라를 돌려보내면서 은 천 개를 주었고, 아브라함에게는 많은 가축을 주며 자기 땅에 거주할 수 있도록 허락했습니다. 그렇게 아비멜렉은 자기가 죄가 없다고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보상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마무리되지 않았습니다. 아비멜렉 집안의 여자들이 아이를 낳지 못하는 불임 상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18절이 말하는대로 그것은 하나님께 일으키신 일이었습니다. 그 문제 해결은 아브라함의 기도에 달려 있었습니다. 7절에서 하나님은 아비벨렉에게 아브라함이 선지자이고 그가 너를 위해 기도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정말 아브라함의 기도로 아비멜렉 집안의 여인들이 다시 아이를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비멜렉은 절차상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잘못한 것이 없고, 당시 풍습상 힘과 재력이 있으면 남의 여자를 얼마든지 취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했겠지만 그가 자기 쾌락을 위해서였든, 권력을 확장하기 위해서였든 자기능력을 남용한 것은 분명 죄입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그런 것들을 추궁하실 수 있었지만 침묵하셨습니다. 대신 하나님은 아비멜렉의 목숨을 위태롭게 하시고 그의 집안에 불임의 문제로 대가 끊기게 하셔서 그가 추구해온 모든 것이 더는 지속되지 못할 공포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문제가 오직 아브라함이라는 중보자를 의지하는 것으로만 해결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자기 시대의 관습과 도덕 수준에서 나름 떳떳하다고 자부해도 그것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인간이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가치, 생명은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구원의 길, 유일한 중보자를 믿고 의지하는 것에 있음을 아비멜렉에게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규칙이나 법을 어기는 것보다 가장 큰 죄는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를 거절하는 것입니다. 어떤 죄보다 독생자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이 가장 큰 죄입니다.

 

    다음으로 아비멜렉 집안의 불임 문제는 아브라함에게도 교훈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아비멜렉 집안의 여자들이 아이를 낳지 못하게 되었다가 다시 회복된 일이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그동안 아이를 낳지 못한 것도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임을 아브라함은 생각해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16:2). 불임은 그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문제였지만 사라의 불임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저 우연히 생긴 아브라함과 사라의 불임 문제를 해결해 주려 오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사라의 불임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기 위한 계획에 아브라함과 사라를 끌어들이시기 위한 계획이었습니다.

 

    정리하면 아비멜렉이 사라를 범하지 않고, 죄를 짓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개입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거짓말로 일어날 위기를 막으신 것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인간은 죄 때문에 자신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위태롭게 만들지만 하나님은 처음 약속하신 것을 이뤄내십니다. 위기를 통해 하나님 자신을 더 풍성히 드러내십니다. 더 신뢰하게 하십니다. 아비멜렉이 이 사건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믿게 되고, 하나님이 보내실 구원자를 의지하게 되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만큼은 아비멜렉 집안의 여자들을 불임으로 만드셨다가 다시 자녀를 낳을 수 있도록 회복시키신 하나님이 자신과 사라를 다루시고 계심을 확인했을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이 늙은 사라를 통해 아들을 주실 수 있음을 아브라함이 소망하게 했을 것입니다. 사라를 불임이 되게도 하시고 아이를 낳을 수 있게도 하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가져가시기도 하고, 주시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절망스런 일도 웃을 일도 모두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하시는 일들입니다. 우리가 사람이 낳을 수 없는 구원자를 소망하도록, 그 아들을 잘 믿도록 한 방향으로 몰아가시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