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1:1-2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에베소서는 바울이 교회를 위해 쓴 편지입니다. 이 편지에 에베소서라는 이름이 붙어있지만 단지 에베소교회를 위해서 쓴 것은 아니고 소아시아 여러 교회를 위한 편지였습니다. 당시에는 문서를 복사할 수 있는 인쇄술이 없었기 때문에 교회들은 사람을 통해 바울의 편지를 전달받아서 집회 때 낭독해주거나, 그 편지가 그 교회에 머무는 동안 누군가가 손으로 베껴서 복사본을 만들어 놓고 계속 사용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여러 교회가 돌려 읽은, 회람한 편지이지만 에베소서라고 이름 붙인 것은 아마도 에베소라는 지역이 중요했거나 이 편지를 그 에베소교회가 가장 처음 받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바울이 에베소서를 쓸 때는 로마에서 가택 연금 상태에 있었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붙잡혀 약 2년간 죄수의 신분으로 집안에 갇혀 있는 동안 교회를 위해 글을 쓴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를 통해 교회에 담긴 놀라운 비밀을 말합니다. 교회는 그저 사람들이 모인 종교 집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방법이라는 것, 그렇기에 예수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는 지체인 성도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본문으로 들어가면 1, 2절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라고 말합니다. 바울의 이 말은 그저 형식적인 인사의 표현들이 아닙니다. 바울은 인사를 통해서 성도들을 하나님께 사로잡히게 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있게 하며, 우리는 그것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을 처음부터 분명하게 말합니다. 바울은 하나님과 우리가 어떤 관계인지를 생각하게 만듭니다. 편지는 그 글을 쓰는 발신자와 글을 읽는 수신자의 관계에 의존한 것이고, 둘의 관계를 더욱 긴밀하게 만듭니다. 편지를 통해 서로에게 더 집중하게 됩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께 붙들려 있는 자이니 편지를 읽는 성도들 역시 하나님께 붙들려야 한다는 것을 확실하게 한 것입니다.
교회는 살아계신 하나님에 의해 세워지고, 모이고, 활동하는 공동체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중심이 되는 것이 아닌 인간들의 관심과 욕구, 인간 서로의 상호작용이 거의 전부가 되고 마는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많은 교회들이 진지하게 하나님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어색하게 느끼는 것이 현실입니다. 성도들끼리의 교제 속에서 진지하게 하나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어색한 것은 물론이고, 예배 시간 설교 속에서도 하나님을 진지하게 다루는 것을 어색해합니다. 수많은 교회들은 자신들을 알리는 홍보물이나 홈페이지에서 신구약 성경과 신앙고백서, 교리들을 표준으로 믿고 따른다고, 자신들은 믿어도 되는 안전한 집단이라고 인증마크를 스스로 붙이지만 실제로 신구약 성경을 바르게 가르치지 않고, 또 중요한 교리를 가르치지도 않습니다. 예배나 모임에서 하나님을 언급하는 것이 그저 자기들이 신자들의 모임이라고 마킹하는 행위에 그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신들의 모임이 교회라는 것, 지금 행하는 것이 예배라는 것, 설교라는 것을 알리는 표식 수준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것을 서로가 부담스러워 하는 것입니다. 때로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경우들도 주관적인 체험이나 신비적인 내용들을 설교하고 간증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 내용의 상당수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바르게 드러내지 못합니다. 하나님으로 인한 참 감격과 영광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런 수준에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러나 바울은 자신과 성도들을 하나님 앞에 두고 있습니다. 인사부터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계획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1절에서 바울은 먼저 자신이 하나님으로 인해 사도가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는 본래 유대인으로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색출하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예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그를 새롭게 만드시고 자신의 사도로 삼으셔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섬기게 하셨습니다. 바울이 하고 싶어서 사도가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계획대로 바울을 움직이신 것입니다. 바울이 자신을 하나님의 뜻으로 사도된 자라고, 하나님의 종이라고 말하는 것은 자신의 권위를 하나님께 두어서 사람들이 복종하고, 존중하도록 만들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어떤 사역자들은 자신을 ‘주의 종’이라고 말하면서 대단한 권위를 가지고, 자신을 함부로 여기지 못하게 만드는 표현으로 사용하곤 합니다. 그런 뉘앙스가 교인들에게 그대로 전달되어서 자신들의 목사를 ‘주의 종’이라고 부르면서 떠받드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런 의도로 자신을 하나님의 뜻대로 사도된 자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에 대한 비난과 핍박이 거센 상황 속에서 수많은 고생을 하고 있었습니다. 맞기도 하고, 살해 위협을 당하고 감옥에 갇히면서 고생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로 부르신 하나님의 주권을 찬양하고, 그것을 영광으로 인식하면서 자신이 사도의 일을 감당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겸손하게 표현한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고난을 통해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교회를 섬겼지만, 자랑하지 않고 겸손하게 자기는 하나님의 주권에 따라, 하나님의 은혜로 그런 일을 감당하는 것이라고 하나님을 찬양한 것입니다.
2절에서 바울이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라고 인사를 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축복이 아닙니다. 그는 성도들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평강이 없으면 안 되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생각하게 한 것입니다. 교회는 교인들끼리 사이좋게 친목을 도모하고 행복하게 생기있게 지내면서 봉사를 많이 한다고 해서 교회다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런 실천이 있어야 하겠지만 무엇보다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성도가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며 살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이 누구시며, 자신들을 위해 하나님이 어떤 일을 행하셨으며, 자신들이 하나님께 어떻게 의존되어 있는지를 끊임없이 생각하고 확인하며 깨닫는 것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은혜로 죄인들이 거듭나 교회를 이루었으니 계속해서 교회는 하나님이 중심이 되셔야 하고, 하나님께 의존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교회가 항상 하나님을 바라고, 하나님께 의존해야 함을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존재의 의미, 삶의 의미가 필요한데 이 세상은 점점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에서 오는 의미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중세 시대를 지나 근현대로 오면서 인간들은 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의미를 찾는 것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신이 없어도, 인간을 만든 신의 목적 같은 것이 없어도 인간이 삶에서 겪는 다양한 경험들과 감정과 감동들이 삶을 의미 있게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교회마저 그렇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로 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얼마나 위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신지 깨달아야 합니다. 자기 아들을 통해 영광 받으시려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과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그 아들을 머리로 하는 교회의 지체로 부르신 것이 얼마나 우리를 영광스럽게 하는지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앞으로 우리가 함께 에베소서를 계속 살펴보면서 그 풍성한 진리를 계속 확인하고, 하나님이 의도하신 교회와 성도의 영광을 경험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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